〈 47화 〉제 7 장. 태동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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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래에서는 마족들의 뒤처리가 한창이었다.
마력을 온몸에 둘렀던 마족들은 특수 개조된 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총탄에 마력 방어막이 관통당한 뒤 깃털이 모조리 불타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고, 뒤이은 공격에 많은 수가 사망했다.
하지만 놀라운 생명력으로 적지 않은 수의 마족이 공격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기어서라도 도주하거나 요새 아래에서 버티면서 접근하는 병사들을 공격했다. 기사들이 나서서 대부분 처리하긴 했으나 병사들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간신히 생포한 마족을 앞에 두고 공녀는 고민에 빠졌다.
외견상으로는 리자드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온몸이 새하얗고 눈은 붉었으며 풍기는 기운에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날갯죽지에서 튀어나온, 반쯤 타버린 날개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감이 있었다. 공녀는 무심코 손을 뻗어 날개에 손을 대었다.
파직
순간 상당한 마력의 간섭을 느낀 공녀는 손에 마력을 두르고 날개를 움켜쥐었다.
자세한 것은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마력으로 처리된 인공적인 기관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큭. 그냥 죽여라.]
늪지의 마족이 외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는 그를 향해 병사가 위협적으로 창을 들이댔다. 공녀는 병사에게 창을 치우라고 말한 뒤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무릎이 꿇려진 마족을 내려다보았다.
[네놈들. 어디서 이런 날개를 달고 저런 괴물을 끌어들인 거지? 지룡은 가축이나 군마가 아닐 텐데.]
공녀의 말에 마족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군.]
[고대어에서 단어만 리자드맨의 언어로 바꾼 거잖아. 전부는 아닌 것 같지만.]
마족이 기가 차다는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살짝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뾰족한 이빨들이 보였다.
[그걸 안다고 바로 조합해서 말 할 수 있는 것인가. 다 자라지 못한 개체가 이럴 정도니 우리가 질수밖에. 애초에 고대어를 알고 있는 게 신기하군.]
[친구 중에 그 말을 쓰는 애가 있어서 말이지.]
마족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이가 공녀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인간’인가?]
공녀는 마족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족의 질문에는 도발이나 비꼼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 담겨있었다.
[그래. 나도 그렇고, 이 주변에 있는 모두가 인간이지.]
마족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보군.]
늪지의 마족은 시선을 올려 공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세로 동공이 꿰뚫어보듯 공녀를 들여다보았다.
[너는, 이곳에 있는 마족들과는 다른 것 같다. 너는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족인가?]
공녀가 마족의 질문을 받고 멍하니 있자 병사들이 이상함을 눈치 채고 마족을 끌고 갔다.
혹시 공녀가 정신 공격을 받았는지 마법사와 사제의 짧은 검사가 진행되었고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와서 모두 한숨을 돌렸다.
“저 마족이 혹여 공녀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장교의 질문에 공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공녀가 지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녀를 숙소로 안내하였다.
하지만 공녀의 머릿속은 혼란만이 가득했다. 마족한테 마족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간이침상에 누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분열을 불러보았다.
- 분열. 지금 뭐해?
분열은 대답이 없었다.
탁자 위의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지버트 마을은 지금쯤 늦은 밤일 테니 어린이의 몸을 가진 분열은 이미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공녀는 다음날까지 궁금증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 아리에. 자?
공녀는 분열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벌써 해가 떴는지 주변이 환했다. 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 이제 막 깼어.
- 어제 혹시 나한테 말 걸었어?
- 응. 자는 거 같아서 딱 한 번만.
- 무슨 일 있었어?
공녀는 마족과의 대화를 분열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분열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 마족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공녀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번에 시트리아와 대화했을 때도 느꼈었지만, 인간과 다른 종족간의 마족에 대한 인식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 인간들은 마왕에게 패배하고 타락한 종족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크엘프들은 마왕의 휘하로 들어간 종족이라고 했지.
- 그 둘이 다르다고 생각해?
공녀는 잠시 생각했다. 강한 자에게 패배한 뒤 그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 표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런데 왜 그 마족이 인간들을 보고 마족이라고 표현했을까?
- 그건…….
분열이 주저하는 것이 느껴졌다. 분열이 공녀 안에 있었을 때도 말하기 곤란한 것이 있을 때면 곧잘 저런 식으로 신중하게 말을 고르곤 했다.
- 후우. 원래는 파멸이 강림할 때 즈음 말해주려고 했는데.
- 맨날 네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하던 거?
- 음. 이 얘기는 그런 적이 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 자각은 있구나.
대륙 저편에서 분열이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공녀는조금이지만 기분이 나아진 채 분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어쨌든, 그 리자드맨이 인간들을 마족이라 부른 이유가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야. 일단 마왕이 지상에 강림하는 이유는 알지?
공녀는 5년 전의 일이 저절로 떠올랐다.
황자가 자신을 지목해서 분열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자신조차 놀랐던 내용과 나중에 분열에게 추가로 들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 지상의 종족들이 저질렀던 원죄를 실질적인 형태로, 목숨과 피와 마력으로 갚는 거잖아. 마왕은 그 집행자고. 솔직히 옛날에 지상에서 저질러진 죄를 지금 우리가 갚는 게 좀 그래.
- 마신이 그 죄를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다른 신들이 지상을 싹 쓸어버렸겠지.
- ……도대체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라. 마왕이라도 마신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니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상의 모든 종족이 죄를 저질러왔고, 그들에게 내려질 뻔한 벌을 마신이 대신 짊어졌다는 것 정도?
공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리고 마왕이 그 죄를 차례대로 지상에 갚는 거지? 쉽게 말하면 할부 비슷한 건가. 일단 마왕 탄생의 배경은 알았는데, 그게 마족의 정의랑 큰 관련이 있어?
- 그럼. 만일 네가 한 나라의 왕이고, 다른 나라 여러 개를 무너뜨리고 싶을 때 제일 효율이 좋은 건 뭘까?
- 이간(離間)의 계…….
공녀는 분열의 말을 곧장 이해했다. 분열은 계속 설명했다
- 그래. 마왕이 마신의 조각이라고는 하지만 이 행성의 날고 기는 놈들이 모이면 의외로 별 피해를 주기 힘들어. 파멸 정도를 제외하면. 하지만 각 종족의 원죄와 그에 대한 죄악감을 부추기고, 다른 이들을 공격해 서로에게 피해를 주면 갚아지는 죄는 두 배가 되지.
- 하지만 인간은 마왕의 휘하에 있지 않잖아.
-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마족을 직접 만나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만일 네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마족이 되었고, 너를 막으려드는 다른 종족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공녀는 생각이 깊어졌다. 분열이 한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그 마족이 인간을 마족이라 불린 이유는 그냥 자신들과 적대했기 때문일까?
-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래. 마족이면서도 자신이 마족임을 모른다면 자신들을 적대하는 상대를 마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 그렇지만 그 녀석들이 먼저 쳐들어왔잖아. 그건 마의 기운에 노출되어서 파멸의 조종을 받는 거 아니야?
- 음. 그건 지금 당장 설명하기는 좀 그러네. 마의 기운이란 게 꼭 느껴지는 그 기운을 의미하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분열은 잠시 망설이더니 공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 먼저 쳐들어온 것은 늪지의 마족들이지만, 전쟁의 발단은 직접 조사해봐. 내 생각이 맞는다면, 5년 전이나 그 전에 늪지에서 벌어진 일이 있을 거야.
공녀는 분열의 말에 큰 의구심을 품었다. 지금까지 전쟁이 벌어진 이유는 마의 기운에 노출된 늪지의 마족이 먼저 쳐들어왔다는 이유 딱 하나였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면?
공녀는 그 마족을 다시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과 인간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처형이요?”
공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황자에게 되물었다. 황자는 공녀의 태도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정신 공격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더 이상 얻을 정보도 없었어. 군부의 위쪽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마족을 처형했다고 하더군.”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한 황자는 잠시 후 주변에 있는 호위기사들을 잠시 물러나게 했다. 막사에 단 둘이 남게 되자 황자가 표정을 굳혔다.
“리에. 나라고해서 군에서 행해지는 일을 다 알지는 못해. 리에와 그가 대화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는데도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서 지나치게 빨리 처형을 했어. 그를 가둘 수 있는 감옥도 있었는데 말이지. 무언가 낌새가 심상치 않아.”
공녀는 한숨을 쉬었다. 외부의 적을 막기도 바쁜데 내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마족은없어졌지만, 마침 황자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공녀는 다른 것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황자전하. 전하께서는 5년 전의 일을 기억하시나요?”
딱딱한 표정을 지었던 황자는 긴장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나랑 리에랑 처음 만났을 때?”
“아뇨. 두 달쯤 뒤에.”
“납도식?”
공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살짝 저었다.
“그 직전에. 혹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황자는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그는 공작과 황실 및 정보부로부터 들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공녀에게는 그다지 알려주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꼭 알아야해?”
공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전쟁의 원인이 혹시 인간에게 있다면…….”
황자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목소리를 더욱낮추어 공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실은, 인간들 중 마족에게 협력하거나 하는 이들이 있어.”
황자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그렸다. 가로로 긴 마름모 모양에 눈동자 같은 두 개의 동심원과주변으로 갈기 같은 것이 뻗어 나온 문양이었다. 그것을 본 공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공녀는 테르한의 기억에서 도플갱어의 군에 있던, 그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는 인간들을 떠올렸다.
도플갱어의 군대는 지형이나 위치에 따라 각종 종족들로 변하였는데, 그 중 황자가 그린 저 문양의 로브를 입는 것은 항상 인간이었다. 대부분 마법이 아닌 마력을 다루어서 당시에는 제국마법사들에게 크게 밀려 별 위협은 아니었고 한다.
황자는 수첩을 뜯어 불의 마력으로 태워버렸다.
“그 놈들은 마족 군대에 항상 섞여있지. 과거의 기록에도 나와 있어. 아마 그들이 저지른 일 같긴 한데.”
황자는 뜸을 들이다 내뱉듯 말했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늪지의 마족에 소속되어있는 부락 하나를 통째로 몰살시켰다고 하네. 그들과 대립하던 리자드맨들의 증언도 있었어. 항상 경쟁을 하던 상대 부족이 있는 곳에 큰 불이 나서 가보니까 인간들이 그들을 죽이고 있었다고.”
공녀는 그제야상황을 파악했다. 인간과 늪지의 마족은 이간의 계에 당한 것이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고, 파멸이 가진 마의 기운이 그들에게 내려왔으니대적해야하는 것은 맞아. 하지만 뭔가 인위적이지 않아? 마치, 마의 기운이 그곳으로 퍼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건가요?”
황자는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눈을 감은 그는 의자에 기대어져있던 성검을 반쯤 뽑아들었다.
[그대가 아리에 제즈릭인가.]
황자의 목을 통해 누군가 고대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공녀는 성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검……님?]
[그렇다. 너희가 성검이라 부르는 존재다. 지금 그대는 이 전쟁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건가?]
[황자전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그들이 제국의 방침에 거스르는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이긴 하잖아요?]
[흐음.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그것에 큰 의미는 있는가? 마족이 이쪽에 해를 가하려고 하고 있고, 변명이나 보상이 통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니 맞서서 죗값을 치를 수밖에.]
[그건…….]
성검이 꺼낸 죗값이라는 말에 공녀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어느 신이 건넨 지도 모르는 성검. 침묵하는 신들. 갚아야하는 죗값. 마왕의논리.
공녀의 머릿속이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분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딘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곳을 벗어나!
공녀는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 쥐고 막사를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황자가 성검에서 손을 떼며 공녀를 쫓아갔다.
홀로 남은 성검은 아마 얼굴이 있었으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을 것 같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런 곳에 있었군,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