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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1 (48/82)



〈 48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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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는 이틀째 막사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는 벨로나나 황자, 루테스의 방문도 거절하고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어제 성검에게서 도망친 뒤 뒤따라온 황자를 뿌리친 다음 개인 막사로 들어간 공녀는 계속해서 분열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이튿날 점심이 되어서야 간신히 연락이 닿은 분열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공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 아리에,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고?


- 응. 몸은 멀쩡해. 그런데 어제는  갑자기 도망치라고 한 거야?

공녀 자신도 성검에게서  못할 위화감을 느꼈었지만, 멀리 떨어져있고 영혼의 공유도 극히 일부만 되어있는 분열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아무래도 분열이 그 이유를 잘 알 것이었다.

- 그곳에 혹시 마왕 없었어?

- 마왕?


분열의 말에 공녀는 일종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성검의 정체가 마왕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터무니없는 얘기를 분열에게 들려주자 분열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느낀 것이 그 성검의 영혼이었구나. 너에게는 내 영혼이 조금만 들어있어서 쉽사리 구별하긴 힘들었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마왕에 가까웠어. 나는 또 파멸이라도 강림한줄 알았지.


- 혹시 성검이 파멸일까?


- 아닐 거야. 성검은 천년도 넘게 지상에 있었지? 너도 보았던 마왕들이 모여 있던 곳. 그곳은 비유하자면 마왕들의 집 같은 곳이야. 지상에 나가기 전의 마왕들이 머무르다가 차례대로 나가서 원죄를 털어내고 다시 돌아오는 곳.


분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 원래대로라면 스물의 마왕들이 차례대로 나갔다가 차례대로 돌아와서 마지막 마왕인 내가 일을 끝마칠 때까지 잠들어있어야 하지. 하지만 지상에서 문제가 발생했어.

공녀는 그 문제를 알고 있었고, 원인을 짚어냈다.

용사와 성검.

- 그래. 성검을 든 용사가 마왕들이 활동하는 족족 그들을 처치해버렸지. 게다가 토벌된 마왕들은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오지 않았어. 오직 파멸만을 제외하고. 파멸은 내가 나오기 직전까지 잘 자고 있었지.


공녀는 성검이 파멸이 아닌 이유를  것 같았다.
자신의 할일을 마치고 돌아온 파멸은 분열이 지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잠들어있었으니 성검이  수는 없었다.

- 그러면, 성검이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은 다른 마왕일까?


- 내가 생각하기엔 그럴 가능성이 제일 커. 성검과 직접 대화를 했다고 했지? 아마 지금까지 성검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직접 대화를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마왕의 영혼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어서 그랬을 거야. 네  속에 있던 나처럼.

분열의 말에 공녀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파멸의 군세를 이루는 마족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인류의 구심점인 용사의 상징인 성검이 마왕이라니.

- 그렇다면 역시 두 번째 마왕이겠지? 그 녀석은 누구야?

두 번째 마왕이 ‘사라지고’ 나온 것이 성검이었으니 성검은 두 번째 마왕이 의태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 솔직히 말하면 진명은 기억이 나지 않아.


- 네가 모든 마왕을 만들어냈다면서? 마왕들의 어머니라면서?

공녀는 분열에게 야유를 보냈다. 분열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 아마도 녀석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확실히 기억하는 열여덟의 마왕들을 제외하니까  한 명이 생각났거든.

-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 마왕을 만들 때 마신의 능력과 성격, 그가 짊어진 죄들을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내가 말했었지? 그 중  속이기와 장난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따서 만든 마왕이 있어. 그 녀석의 특기는 남을 속이고 이간질하는 것이었지.

- 그런 놈이 성검이라고?


- 아마도. 결정적으로, 그는 마신의 신성력을 그대로 물려받았어. 첫째인 파멸이 마신의 마법적인 능력을 그대로 가져갔고, 둘째인 그가 신성력을 가져갔지. 그 신성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다른 이들을 속인거야. 그게 녀석의 특기니까.

공녀는 간이침상에 누워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한 차례 소리를 질렀다.
막사 밖에서 대기하던 벨로나가 황급히 들어왔지만 공녀는 손짓으로 그녀를 물러나게 한 뒤 다시 분열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 후우. 그렇다면 인간들은 지금까지 마왕을 따르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네. 이제야 그 마족이 우리를 오히려 마족이라 부른 게 이해가 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마왕을 따르는 놈들이었을 테니까.


- 그래. 나도 이젠 이해가 가는군. 성검, 아니, 둘째 녀석은 인간들을 이용해서 지상에 나온 마왕들을 잡고 있었던 것인가.

 상황은 정리가 되었다.
파멸의 군세가 한풀 꺾였지만  끝은 보이지 않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라졌던 두 번째 마왕이 성검의 형태로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며 지상에 나온 마왕들을 잡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공녀와 분열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대비해온 걸 다 내팽개치고 홀로 파멸과  번째 마왕을 상대할 수는 없어.

당연히 그렇지. 일단은 둘째와 협상을 해야겠지.


- 협상이라. 어떤 식으로 해야 하지? 파멸을 잡을 때까지만 동맹이라는 식으로?

공녀의 질문에 분열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아리에. 내가 처음 너와 했던 대화, 혹시 생각나? 파멸을 막아야하는 이유를 내가 말했던 거 같은데.


- 그야 파멸이 나오면 지상이 쑥대밭이 되니까.

대답하던 공녀는 의문을 느꼈다.


- 잠깐. 우리가 파멸을 막는다고 해도 지상의 원죄가 남아있다면 다음 마왕이 등장해서 지상에 풀어놓을 거 아니야? 그리고 원래 다음 마왕은…….

파멸 다음은 두 번째 마왕이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그때당시 분열은 성검에 두 번째 마왕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몰랐고, 다른 마왕은 이미 없었다.
공녀는 배신당한 느낌에 손아귀를 세게 쥐었다.

- 분열. 네 손으로 지상을 끝을 낼 생각이었어?

공녀의 비난어린 어조에 분열이 펄쩍 뛰었다.

- 아니야.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어. 너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세상에 남아있는 마왕이 파멸과 나뿐인 줄 알았어. 그래서 파멸을 물리친 다음에 내가 다시 강림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죄를 씻을 생각이었지.

- 평화적인 방법? 그게 가능해?

- 응.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문제는 둘째 때문에  이상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야.


공녀는 그 평화적인 방법이 매우 궁금했지만 나중에 묻기로 했다. 일단 당면한 문제는 성검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알았어. 믿어줄게. 문제는 성검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인데.

- 그건 내게 맡겨줘. 그쪽도 아마 내가 너의 안쪽에 영혼의 일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거야. 그 녀석은 이런 쪽으로 민감하니까. 언제 시간을 내서 황자와 일대일 면담을 요청해. 인간들을 매개체로 한 마왕  대화를 해봐야지.


- 나는 결국 통신마석 역할이야?

- 아니. 필요하면 나서도 돼. 다만 나하고 상의하고 나서.


공녀는 분열의 말에 수긍하고 침상에 누워 머릿속을 정리했다. 계속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에서 당분을 보내라고 아우성이었다. 공녀는 막사의 입구를 살짝 들춘 뒤 벨로나를 불렀다.


“아가씨! 몸은 괜찮으세요?”


“으응. 걱정 마. 그것보다 혹시 단 간식 같은 거 얻을  있을까? 여기는 그런 게 없으려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벨로나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공녀는 벨로나가 곧 간식을 가져올 거라 믿으며 침상에 누웠다.





어느새 깜빡 잠에 들었던 공녀가 눈을 뜨자 이미 해가 져있었다. 어두컴컴한 막사 안에 마석램프가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한 뒤 침상에서 내려온 공녀는 막사 구석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리에. 괜찮아?”

황자의 목소리에 공녀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밤중에 황자와 단 둘이 좁은 막사 안에 있는 상황에 왠지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숙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하하.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괜찮나보네.”

황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공녀에게 다가왔다. 램프의 빛을 받은 그의 눈에 깃든 열기를 본 공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났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공녀의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테르한은 이제 전장에  때나 가끔 드러났다. 이제 공녀의 몸에 들어있는 영혼의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아리에였다.


공녀는 귀족 아가씨라기 보단 연구자나 전사에 가까웠지만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황자가 아직까지 약혼대상은커녕 염문을 뿌리는  조차 단 한명, 아리에 제즈릭 공녀 외에는 없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귀찮은 약혼을 피하고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황자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 소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었다.


“저, 저기, 황자전하?”


침상은  사람  명이 누울 정도였기에 공녀는 금세 막사의 벽에 몰렸다. 황자는 공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조용히 공녀의 손을 잡았다.

공주나 다름없는 신분의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여성의 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바닥과 아무런 색깔이 물들어있지 않은 짧은 손톱.
황자는 이 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명을 건졌는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운명이 걸려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에게 공녀의 거친 손은 성녀의 손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공녀는 황자에게 손을 잡히자 내면의 테르한이 저절로 깨어났다.
팔뚝에 오소소 돋은 닭살과 황자와 맞잡은 손에서 시작된 소름이 머리끝까지 치달은 공녀는 획 하고 황자의 손을 떨쳐냈다.
황자는 아쉬운 표정을 하더니 일어섰다.

“리에가 힘들면 앞으로 성검은…….”


“내일, 성검과 이야기 할 게 있어요.”


“응? 어어, 그래. 뭐?”


성검과 대화를 하다 갑자기 도망쳐버렸던 공녀가 갑자기 성검과의 면담을 요청해왔다. 황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공녀의 말이라 들어주기로 하였고, 공녀가  수 있도록 바로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공녀는 잠시 멍하니 침상에 앉아 있다가 테이블 위의 초코케이크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머리에 당분이 돌자 방금 있던 일이 생각나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 공녀는 내면의 테르한을 일깨우며 이불을 발로 뻥뻥 차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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