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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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의 마족은 벌써 나흘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늪지 인근의 높은 전망대에 갔다 온 정찰병의 말에 따르면 마족들은 늪지 저 멀리에 간간히 보이는 수준이라고 한다.
두 번째 마왕과의 대화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마족들이 멀리 있다고 하니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공녀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서는 황자가 성검을 반쯤 뽑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는 공녀와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물러나도록.”
황자의명령에 호위기사와 병사들이 물러났다. 공녀도 대동했던 벨로나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기고 황자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공녀와 단 둘이 남게 되자 황자는 무게를 잡았던 것이 거짓말인 마냥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잘 잤어?”
“아뇨. 누구 씨 덕분에.”
공녀의 말에 황자는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제즈릭 공녀가 나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니. 영광인데?”
황자의 말에 공녀 역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가 황자전하 때문이랬어요? 그쪽에 있는 성검 씨 때문인데.”
황자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반쯤 뽑혀있던 성검이 미약하게 점멸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번쩍거리는 게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크흠. 어쨌든, 성검과 대화하고 싶다고 했지? 참고로 오랫동안 이야기하긴 힘들어. 성검의 능력을 쓰는 것은 어느 정도 괜찮은데, 대화를 하는 것은 정신력이 엄청 소모되거든.”
[그럴 필요 없다. 공녀에게 나를 쥐게 하도록.]
“응?”
성검과 대화를 하려던 황자는 갑작스런 성검의 요구에 잠시 당황했다가 공녀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황자가 내미는 성검을 받아든 공녀는 조심스레 검을 뽑았다. 테르한이었던 시절에 두어 번 휘둘러본 적이 있었지만 그냥 일반적인 검과 다를 게 없었는데, 공녀가 들고 보니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분열? 아니, 너는 분열이 아니군.]
머릿속에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뜸 분열부터 찾는 그에게 공녀는 핀잔을 주었다.
[이봐요. 이름 모를 마왕 씨. 분열은 여기 별로 없어요.]
성검은잠시 침묵하더니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벌써 내가 마왕이라는 것을 알아내다니. 과연 리베리안이 흥미를 가질 만하군. 게다가 분열이 ‘별로 없다’라. 조금은 있다는 소리겠지?]
성검이 스스로 진동하더니 낮은 울림이 공녀의 손을 타고 몸 전체에 퍼졌다. 기분이 나빠진 공녀가 손을 떼려 하자 성검이 재빨리 말했다.
[너무 경계하지 말거라. 흐음. 네 안에는 분열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존재하고 있군. 지금 그녀는 어디 있지?]
분열이 스스로를 여성체라고 한 것이 사실인 듯, 성검으로 의태한 마왕은 분열을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지칭했다.
공녀는 머릿속으로 분열을 그려냈다. 그러자 공녀의 안에 있던 분열의 영혼조각이 본체의 영혼과 공명하여 마치 분열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나를 찾았나?]
공녀의 머릿속에서 분열이 말을 걸자 성검이 대답했다.
[드디어 등장하셨군. 분열,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나?]
[……둘째. 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기억하는 게 아니라추론한 것이겠지. 뭐,그만큼 내 위장이 완벽하다는 것이로군.]
성검은 말로는 만족한 듯 말했지만 분열은 그 속에 감춰진 무언가를 느꼈다.
분열은 잠시 주저하더니 성검에게 말했다.
[혹시 내가 네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가?]
[…….]
성검은 대답이 없었다. 공녀는 난감해져서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분열과 이야기를 했다.
- 야, 너 혹시 쟤 이름 안 지어준거 아니야?
- 잠깐.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둘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감춘 게 아니었나?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고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채 잊어버린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 어쩔 거야. 쟤 삐진 거 같은데.
- 에이, 설마. 마왕이 그렇게 쉽게…….
분열은 말끝을 흐리며 성검의 눈치를 봤다. 다시 검을 빼든 공녀는 직접적으로 성검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진명은 무엇이죠?]
성검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툭 뱉어내듯 말했다.
[모른다. 애초에 이름이 지어진 적이 없다.]
갈란드에 있는 공녀와 지버트에 있는 분열이 동시에 식은땀을 흘렸다. 영혼이 분리가 되었어도 죽이 잘 맞는 두 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공녀의 머릿속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 지금 둘째 마왕을 설득하는 거 아니었어? 저쪽이 더 이상 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지가 않은데?
-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속이는 것에 능숙한 아이니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존재까지 속였을 거라고만 생각했어.
공녀가 성검을 집어넣었다 빼들었다 하다가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자 황자는 공녀가 혹시 다칠까봐 검을 빼앗았다.
“리에. 무슨 문제 있어?”
“어, 그러니까 성검의 이름이…… 아니, 저랑 분…… 아니, 이것도 아니지.”
공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눈을 뜬 공녀는 황자에게 질문했다.
“황자전하. 혹시 이 성검의 정체를 아시나요?”
황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성검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신이 내린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녀의 질문은 그것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성검은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족과 마왕, 그리고 자신이 쓸 수 있는 장기짝에 대해서만 언급해왔다.
사실 황자는 성검의 정체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 황자는 성검의 정체를 모르나보네.
- 그런 모양이야.
둘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어찌되었든 성검과는 협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녀는 황자에게서 다시 성검을 받아들었다. 일단 성검의 의도를 알아야 협상이 가능할 것이었다. 공녀는 성검에게 질문했다.
[성검. 당신은 인간들을 이용해서 지상에 나온 마왕들을 처치했죠.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죠?]
[글쎄. 마신의 성소에서 계속 있었던 분열 당신이 더 잘 알아야하지 않은가? 아, 하긴. 자신의 손으로 탄생시켜놓은 것도 잊어버릴 정도이니 다른 마왕들에 대해서도 잊어버린 모양이군.]
성검의 비아냥거림에 분열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 전 태어나자마자 본능에 의해 마신의영혼을 나누었을 때 자신이 마무리작업을 덜 하였기에 받는 비난이었으니 감안하긴 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가 늘어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속임수의 대가, 장난의 신.]]
갑자기 시작된 분열의 말은 공녀의 머릿속에서 크게 울렸다. 말 자체에 신의 힘이 담겨있었다.
- 분열?
- 조금만 참아.
언령의 힘을 띤 분열의 말이 계속되었다.
[[사람을 속이고, 신을 속이고, 자신을 빚어낸 자도 속이고, 끝내는 자신마저 속이는 자여. 이 세상을 지키려는 자들의 의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획책을 꾸미는 자, 그대에게.]]
공녀의 손에 성검의 떨림이 느껴졌다.
[[마신의 뜻으로, ‘기만’의 이름을 하사하노라.]]
순간 성검을 중심으로 신성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공녀와 황자가 놀라서 성검을 바라보자, 성검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완벽해졌다.]
성검의 목소리에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가 담겨있었다.
마왕 ‘기만’의 탄생이었다.
“리에. 진짜 별 일 아닌 거 맞지?”
“그렇다니까요.”
방금 발생했던 성스러운 파동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놀란 황자가 공녀를 추궁하고, 공녀는 분열을 추궁하고, 분열이 기만을 추궁한 결과, 기만이 한 대답은 그냥 기쁨의 표시였다고 한다.
못미더운 눈치로 기만을 살피던 공녀는 분열에게 속삭였다.
- 혹시 진명을 얻으면 엄청 강해지거나 하는 거야?
- 아니. 진명은 그냥 마왕이 띠는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지어주는 건데. 이름에 따라 성향이 좀 더 강해지는 경향은 있지만 대개 큰 의미는 없어.
공녀는 기만의 기쁨이 순수하게 이름을 받아서 그랬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의 1600년 만에 이름이 생긴 것이니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분열에게 이름을 받은 기만은 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너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파멸이 마신이 되는 꼴은 못 본다. 놈은 혼자서 지상의 죄를 절반이나 털어내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미친 녀석이다. 다음번에 나왔을 때 어떻게 버텨낸다 해도 놈이 죄악을 전부 털어내고 마신이 된 순간 세상은 말 그대로 파멸하고 말걸. 나는 이래봬도 이 세상을 최대한 온전히 보존하고 싶거든.]
- 저 말이 진짜일까?
- 굳이 지금 속일 이유는 없겠지. 다음 이야기부터는 걸러들어야 해. 쉽게 속지 마, 아리에.
- 알았어.
머릿속에서 분열과의 회의를 마친 공녀는 얼굴에 다소 부자연스런 미소를 띠었다.
[마침 우리랑 의견이 같네요. 하지만 기만, 당신은…….]
공녀는 뒷말을 분열에게 넘겼다.
아까는 분열이 입만 열면 기만이 시비를 걸었기에 공녀가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같은 마왕이니만큼 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왜 다른 마왕을 처치하고, 자신의 안에 가두었지?]
공녀의 체내에 있는 자신의 영혼을 매개체로거의 빙의하다시피 한 분열은 그녀의 눈을 빌어 성검을 꿰뚫어보았다. 기만이 품고 있는 열여섯의 마왕이 느껴졌다.
[성검인 척 하며 용사라고 불리는 인간을 선발하고 다른 마왕의 영혼을 흡수했군. 맙소사. 1500년 전부터 계속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잖아.]
분열의 말에 기만이 변명하듯 말했다.
[파멸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다른 마왕들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되살아날 ‘우리’가 최대한 완벽해야하지 않겠는가.]
공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만은 자신이 마신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분열. 네 생각은 어때? 기만이 마신이되어도 괜찮을까?
- 음. 확실히 기만에게는 마왕들의 영혼이 대부분 흡수되어있어. 현재 마신에 제일 가까운 자야.
공녀의 몸으로 분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하지만 기만이 마신이 된다고 해도 딱히 다를 것 같지는 않아. 세상은 물리적으로 파멸하는 대신 불신과 속임수, 배신이 난무하겠지. 게다가 죄를 털어낼 방법도 파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파멸은 스스로 나서서 부수지만, 기만은 지상의 생명체들을 이간질시켜 서로를 죽이게 할 셈 일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분열은 기만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공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검에게 말했다.
[분열과 저는 당신을 쉽게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마신이 된 뒤 파멸처럼 행동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마신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도 모르죠.]
[흥. 희생 없이 죗값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기만의 말에 분열이 대답했다.
[어쩌면.]
[뭐라?]
기만이 의문을 표하자 분열이 씨익 웃는 느낌으로 말했다.
[기만. ‘평화로운 죗값 치르기’에 관심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