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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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방법으로 죗값을 치른다고? 어이없는 소리군.]
기만의 기가 차다는 듯한 말에 분열이 대답했다.
[파멸을 물리친 뒤, 네가 잠시만 죄를 털어내는 일을 멈추고 있으면 돼.]
[그래서. 그 방법이 뭐지?]
기만의 말에 분열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뭐?]
공녀와 기만의 어이없다는 반응에 분열이 변명했다.
[원래는 파멸을 물리치고 내가 죄업을 천천히 갚아나갈 생각이었어. 하지만 기만이 그 사이에 껴있는데다가 다른 마왕들의 영혼을 많이 갖고 있으니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결국은 대책이 없다는 말이잖아.]
[아니. 지금당장은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서 힘들지만, 곧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 그때 물어보면 되지.]
분열의 대답에 공녀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가다 분열은 현실성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런 걸 어디다 물어보게?]
[비밀이야.]
분열은 더 이상 말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공녀는 자신에게 맡기라는 말만 반복하는 분열이 못미더워 그녀가 있을 북서쪽을 향해 눈을 흘겼다.
[분열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단은 협조하기로 하지.지금 제국의 힘만으로는 파멸의군세는 그럭저럭 막을 수는 있어도 파멸 본인은 공녀와 분열의 도움 없이는 막기 힘드니 말이다.]
[정말인가요?]
[그래. 공녀, 너는 눈앞의 적을 물리치는 데 주력하도록. 늪지의 마족 놈들은 이미 제국과 완전히 척을 졌다. 그래도 그들의 대장이 종족의 죄를 대부분 짊어지고 있으니 빠르게 대장을 잡아내면 나머지는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
공녀는 얼굴을 굳혔다.
분열이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미 전쟁으로 번진 지금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파멸의 군세가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것도, 그들과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막기는 힘들었다.
기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대장을 잡으면 그 이상의 희생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적진 한 가운데에 있을 대장만 쏙 골라서 잡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피와 시체로 죄를 갚는 일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파멸을 물리치는 그때까지.
공녀는 착잡한 심경으로 황자에게 성검을돌려주었다.
“이야기는 끝냈어?”
황자는 이제 공녀가 무엇을 하던 놀라지 않기로 했다.
용사도 아닌그녀가 성검과 대화를 하고 신성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것으로 본 뒤 황자의 안에서 공녀는 상식의 적용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지?”
“뭐, 대충 협력을 주고받자는 이야기였어요.”
황자는 공녀의 말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헤아렸다. 공녀가 아까 언급한 성검의 정체와 이제 와서 굳이 협력하겠다는 말. 그리고 공녀가 발생시킨 성스러운 파동까지.
어차피 성검을 추궁해보면 될 일이었기에 황자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지난밤에 못다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리에. 여기 일이 일단락되면 한적한 곳으로 놀러가지 않을래?”
황자의 말에 공녀는 조금 당황했다. 어젯밤에도 그렇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황자가 접근해온 적은 없었기에 그저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파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놀러갈 여유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놀러가야지. 파멸이 나올 때 즈음해서는 쉴 틈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녀의 앞에 섰다. 공녀는 소파에서 반쯤 일어나다 다시 주저앉았고, 황자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파멸과의 전투에서우리들 중 누군가가 크게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아.”
그 말만 하고 벌떡 일어난 황자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성검을 허리에 찼다.
“그러니까 추억을 많이 만들자고.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황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이성으로서의 역할인지, 친구로서의 역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구심점인 용사이자 마왕 기만이 내세우는 인류의 대장, 리베리안 황자가 사소한 것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공녀는 그가 어떠한 종류의 미련도 갖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공녀의 안에 있는 아리에가 느끼기에 썩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았다.
공녀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자전하. 대신, 사람들 없고 조용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은 곳으로 준비해주세요.”
공녀의 말에 황자는 놀란 눈을 하더니, 간만에 진심어린 미소를 얼굴에 그려냈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공녀는 막사를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의 상태를 살폈다.
야전병원까지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상처를 달고 있는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고, 며칠 전 날개 달린 늪지의 마족들을 물리칠 때에도 사상자가 조금 나왔다.
고작 40명으로 요새 내의 모든 곳을 지켜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는 곳마다 공녀에게 경외의 시선을 보내오는 병사와 장교들의 눈이 부담스러워서 벨로나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벨로나는 되레 황당한 눈으로 공녀를 보았다.
“아가씨. 저번 전투 때 지룡을 저랑 단 둘이서 단숨에 물리친 것 기억 안 나세요?”
“아, 그거 때문에?”
공녀의 ‘겨우 그런 것 때문에 호들갑이다’라는 뉘앙스의 너무나도 가벼운 발언에 벨로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녀와 동행했던 기사들이 들었으면 정신적 충격과 자기비하로 인해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광경을 가까이서 보고 압도되어 공녀를 전설적인 괴물사냥꾼의 반열에 올리려는지 여기저기에 손짓발짓 해가며 목격담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 바람에 벨로나마저 특수한 능력을 가진 공녀의 오른팔 비슷한 것이 되어있었다. 벨로나는 그런 대접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닌데다가 공녀의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를 자청하고 있기도 하니.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공녀는 그것이 정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벨로나는 만일 아가씨가 자신의 주무장인 검을 가지고 왔다면 아마 혼자서 지룡 서너 마리는 거뜬히 때려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이제 명실상부 이곳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에요. 앞으로 자주 전투를 치르실 테고, 그만큼 위험해지실 거예요.”
벨로나가 걱정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녀는 맡겨만 달라며 가슴을 탕탕 쳤고, 벨로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렸을 때그 덧없는 꽃 같던 아가씨가…….’
물론 공녀가 건강한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았지만, 그 괴리감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공녀의 앞으로 온 편지가 있었다. 어제 제도에서 클레어가 보낸 것이었다.
공녀는 마도공학소에서 연구하던 물품의 시제품들을 가지고 갈란드로 직접 오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읽었다. 공녀는 그 목록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잘만 활용하면 전선에서도, 일상에서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꽤 많았다.
「……다량의 화물이 10일 출발. 11일 도착 예정. 특수한 열차 동원. 호위 필요. 아리에가 마중 나와 줬으면 좋겠어.」
보고 형식으로 죽 이어지던 편지의 끝에클레어의 소박한 요구를 보고 공녀는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던 클레어가 마도공학소의중추 역할을 할 때까지 얼마나 뒷바라지를 해왔던가. 아마 클레어와는 그녀의 아버지인 알레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11일이라. 사흘 뒤네? 으음. 선로는 늪지랑 꽤 머니까 습격당할 염려는 별로 없겠지만…….”
지금까지 열차나 선로가 마족에게 습격당한 적은 없었다.
이번 수송은 지지부진한 전장의 판도를 정리해버릴 수도 있으며, 공녀가 전선에서 빠지더라도 지룡 등에 대한 대비가 가능한 물품들이 다수 실전배치 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중요 물자 수송인 만큼 공녀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불안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늪지의 마족의 마을을 공격했던 조직에게 이 일이 새어나갔다면…….’
아까 혹시 몰라서 기만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조종하는 인간들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내버려두면 알아서 분쟁을 만들어내니그냥 방치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기만도 방침을 바꿨으니 앞으로 조직이 눈에 띄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기만에게 그런 대답까지 들어놓고 자신이 손을 놓고 있다가 당하면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공녀는 클레어를 마중 나가기 위해 제도까지 다시 올라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전장을 사흘씩이나 비울 수는 없었다.
늪지와 선로가 가까운 지점을 골라서 인근 레인저 부대에게 정찰 및 경계를 요청하기로 했다.
만일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마의 기운이나 적군이 발견되면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늪지와 가까운 선로는 공녀가 갈란드 기차역에서 30분 이내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별 다른 일이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정대로 기차역에서 클레어와 물자를 맞이하면 되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기사와 정예병들을 따라오게 한 뒤 일단 먼저 가서 클레어를 보호할 작정이었다.
이 일을 황자에게 말하니 황자는 신중론을 제시하였다.
“지금은 마족의 움직임이 없으니 모레부터 그곳에 병사를 주둔시키는 게어때?”
“주둔지를 조성하고 하루 이틀 머무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에요. 괜히 잘 쉬고 있는 병사들 굴리지 말고 저랑 기사 몇 명만 갔다 오면돼요.”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레인저부대와 합류해서 일단 버티고 있어. 바로 기사들이 갈 테니까.”
“네. 걱정 마세요. 늪지랑 가깝다곤 해도 몇 킬로미터는 되니까 마족이 움직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레인저부대에서 통신마석으로 연락이 올 거예요.”
통신마석은 아주 희귀한 마석이 재료로 사용되는데다가 충전의 효율이 매우 떨어졌다. 게다가 한 쌍의 통신마석끼리만 통화가 가능해서 정말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잘 쓰이지 않는다.
황자는 남부전장에 있는 세 쌍의 통신마석 중 하나를 기꺼이 레인저 부대에게 양도했다.
그만큼 이번 수송은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별 다른 일 없이 이틀이 지나갔다. 아침에 제도에서 열차가 출발했다는 아펠의 마법 전보를 받은 공녀는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열차는 이곳에 내일 새벽 정도에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고 일치감치 잠든 공녀는 저녁때 깨어났다. 공녀는 벨로나를 비롯한 몇몇 기사들을 데리고 황자의 막사를 찾았다.
“수송열차 마중 다녀오겠습니다.”
공녀의 경례를 받은 황자는 마주 경례하며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이번 전쟁의 기로가 달려있는 작전이오. 별 일 없으면 좋겠지만, 만약의 사태에는 힘을 써주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경례를 마친 공녀와 황자는 잠시 서로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그만 웃어버렸다. 역시 그들 사이에 진지한 일은 어울리지 않았다.
“리에. 별 일 없으면 내일은 휴가야.”
“유급휴가인가요?”
“물론.”
공녀는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던 기사들은 공녀와 황자의사이가 소문대로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뒤 저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리에.”
공녀는 다시 한 번 경례를 한 뒤 뒤를 돌아 막사를 나섰다.그녀와 기사들을 실은 마차가 한밤중에 갈란드 시내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긴긴 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