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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4 (51/82)



〈 51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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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플랫폼에 의자를 가져다놓은 공녀는 그곳에 앉아서 팔짱을 낀  통신마석을  쥐고 있었다. 벨로나만이 공녀의 바로 뒤에서 경계를 취하고 있었고 다른 기사들은 밤을 새기 위해 4개의 조로 인원을 나누었다.

한 동안 술렁이던 기사들은 결국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고, 두, 세 번째 순서에 걸린 기사들은 한숨을 쉬며 대기실에 들어갔다. 제일 처음 순서로 경계조에 선발된 기사들은 대기실과  근처에 자리 잡은 공녀 사이를 오가며 경계를 섰다.

“벨로나. 너도 가서 쉬어. 나는 걱정 말고.”

공녀는 통신마석을 책임지고 지키고 있었기에 잠들 수 없었다. 제국 기사단원들은 전부 믿을만한 이들이었지만 어디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기사에게 맡기기엔 부담스러웠다.

“아뇨. 아가씨가 깨어계신데 쉴 수는 없죠.”

“괜찮겠어?”

벨로나가 조금이라도 쉬어두어야 나중에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자신과 함께 클레어를 구하러 갈 수 있을 것이었다.
현재 이곳에서 공녀의 전력질주를 따라올 이는 그리브에 바람의 마석, 특히 속도와 관련된 마석을 전부 때려 박은 벨로나 정도였고, 다른 기사들은 말을 타야 했다.
근처에 말들을 대기시켜놨지만 예상 충돌지점까지는 길이 평탄하지 않아 꽤 돌아가야 했기에 사태가 벌어지면 일단 공녀와 벨로나가 먼저 도착할 것이었다.

“네. 하룻밤 정도는 새도멀쩡합니다. 아직 한창 팔팔한 나이니까요.”

벨로나의 말에 공녀는 피식 웃었다. 공녀의 신체는 팔팔한 나이라기 보단 아직 덜 자란 나이었으나 테르한의 일생까지 합치면 이미 청년기를 지날 무렵이라 벨로나의 젊음이 살짝 부러웠다.

두 시간이 지나 자정이 되자 두 번째 경계조가 대기실에서 나왔다. 공녀는 머리에 물의 마력을 회전시켜가며 뚜렷한 정신을 유지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깜빡 졸 뻔한 공녀는 잠깐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어느덧 새벽 네 시. 마지막 경계조가 대기실 밖으로 나올 무렵, 통신마석이 깜박이며 빛을 냈다. 낮은 진동음에 모두가 긴장했고, 공녀는 통신마석을 발동시켰다.

“이쪽은 갈란드. 말씀하십시오.”

공녀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한 듯 약간 뜸을 들이던 상대방이 신속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이쪽은 레인저 본부. 선로 1구역에서 늪지 근처에 설치해둔 마법 등불이 꺼진 것을 확인. 점점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경계조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기사들은 곧장 대기실로 향했고, 공녀와 벨로나는 무기와 갑옷을 착용하고 곧장 선로로 달려 나갔다.

“늪지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약 15킬로미터입니다. 날아다니는 마족들을 확인. 너무 멀어서 개체 수는 식별 불가능.〕

“알겠습니다. 현재지원부대 출발. 이후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 바랍니다.”

〔라저.〕

통신이 끝날 무렵 이미 공녀와 벨로나는 갈란드에서 제법 먼 거리까지 와있었다. 선로 옆을 따라 달리는 그녀들의 발치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흙먼지가 일어났다.

“1구역이면 여기서 제일 먼  아닙니까?”

벨로나의 말에 공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갈란드에서 지원이 올 것을 고려했는지 마족들은 공녀의 전력질주로도 1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곳을 전장으로 선택한 모양이었다.
늪지까지의 거리가 꽤 멀어서 설마올까 했던 곳이었기에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나가있을걸 그랬네.”

“어쩔 수 없죠. 일단은…….”

그때 공녀의 통신 마석이 재차 진동했다. 공녀는 속도를 약간 줄이며 통신 마석을 발동시켰다.

“이쪽은 갈란드. 말씀하십시오.”

〔이쪽은 레인저 본부. 선로 2구역, 3구역에서 마족 확인. 다수의 지상군으로 보입니다. 어, 뭐라고? 1구역에서 지룡 다수 확인!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1구역에서 지룡 다수 확인!〕

공녀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통신마석에 대고 크게 외쳤다.

“갈란드 지역 레인저 부대는 지금 당장 제도발 열차로 향해주십시오! 제즈릭 공작 권한대행, 제즈릭 아리에로부터 협조 요청 드립니다!”

지역 레인저 부대는 지역을 다스리는 귀족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협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그제야 상대방이 제즈릭 공녀임을 알아차린 레인저들은 송구스러워하면서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열차를 향해 선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조그마한 배낭에서 초콜릿 바를 꺼내 벨로나와 나누어먹기도 하며 공녀는 계속 달려 나갔다. 갈란드와 제일 가까운 3구역에 도착하자 저 멀리 늪지 방향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일단 레인저 부대와 합류를 하는 것이 좋겠죠?”

공녀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벨로나를 멈춰 세웠다.

“벨로나. 미안하지만 여기에 좀 남아줘.”

“네?”

“뒤에 따라오는 기사들은 아직 이 상황을 몰라. 이곳에서 기사들과 합류해서 선로까지 접근하는 마족들을 상대해줘. 너무 많으면 후퇴하고.”

“하지만…….”

“벨로나. 시간이 없어.”

무어라 말하려던 벨로나는 공녀와 한동안 눈을 맞춘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미 수십 분 동안 마력을 가득 머금고 달려왔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결국, 현재의 자신은 아가씨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하지만 벨로나의 낙담은 길지 않았다. 아가씨를 백업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
벨로나는 공녀에게 경례를 했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멋진 활약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녀도 벨로나에게 마주 경례를 했다.

“벨로나 경의 활약도 기대할게요.”

뒤로 돌아선 공녀는 벨로나와 속도를 맞출 필요가 없어지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메마른 땅에서 일어나던 흙먼지마저 공녀가 일으킨 기류에 휘말려서 도로 땅에 처박혔다.

멀어지는 공녀를 보며 벨로나는 강해져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아가씨를 끝까지 따라갈 정도까지는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로나는 선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우-

불의 마석을 연료통에 퍼 담은 기관사는 소매로 땀을 훔쳤다. 제도에서 출발한 이 특수 개조된 열차에  사람들은 마도공학소의연구원들과 호위병들, 승무원들을 모두 합쳐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열차에 잔뜩 실려 있는 물건들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온통 천막이 쳐져있고 공학소의 대표라는 회색 머리 연구원 아가씨가 극비사항이라고 강조하는 통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이제 목적지인 갈란드까지는 약 두어 시간만 가면 도착한다. 만 하루에 다다르는 여정이 끝날 때가 다가오자 기관사는 허리를 펴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새벽, 선로에 드문드문 설치된 전등 빛만이 창문 너머로 스쳐지나갔다.

‘저건 뭐지?’

이 노선을 운행한지 어언 10년차. 지평선에 걸릴 정도로 먼 늪지에서 빛이 명멸했다. 애초에 늪지 쪽에서 광원이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점점 빛이 사라지며 무언가가 슬쩍 보이는 통에 기관사는 운전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어?”

순간 기관사의 눈에 빛 무리 너머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것이 보였다. 저 멀리 있는데도 마치 건물이 움직이는 모습에 자신이 피곤해서 착각했나싶어 눈을 비비던 그는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존! 밀러! 빨리 승객 분들 깨워!”

기관사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열차의 사람들이 깨어났다.



“20분 내로 조우할  같습니다.”

정찰을 위해 열차 위로 올라갔다 온 병사의 말에 클레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귀찮은 같은 태도였지만 그녀가 사실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 챈 연구원들은 클레어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플람 연구원.”

“넷!”

결국 가장 가까이 있던 연구원이 클레어에게 붙잡혔다. 다른 동료들이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딴청을 피웠고, 플람은 각오를 다지며 클레어의 앞에 섰다.

“클레어 연구소장님.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노려보던 클레어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열차에 실린 물품 목록.”

“여기 있습니다!”

옆에서 튀어나온 다른 연구원이 미리 준비해둔 운송품 목록을 클레어의 손에 쥐어주었다. 플람이 보내는 감사의 눈빛을 받으며 연구원이 물러나는 사이 클레어는 목록을 팔랑팔랑 넘기며 읽어나갔다.

“4량, 5량. 10분 뒤 늪지 방향으로 벽면 상승 전개.”

클레어의 말에 집중하던 플람이 곧장 외쳤다.

“4량, 5량! 10분 뒤 늪지 방향으로 벽면 상승 전개!”

대기하던 병사 중  명이 곧장 후열의 차량으로 건너갔다. 현재 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머물러있는 곳은 열차의 2량이었고,  8량짜리 열차에는 각 차량마다 특색 있는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전부 동원하면 남부전선의 마족들을 밀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문제는 이것들을 전부 운용하려면 최소 수백의 숙련된 인원이 필요한데, 이곳에는 사람들이 너무 부족했다.클레어는  량에 실려 있는 물품들을 머릿속에서 재배치하며 마족들을 상대할 그림을 그려냈다. 다행히 날아다니는 마족들이 급작스럽게 다가와서 습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열차를 변변한 무기도 없는 그들이 습격해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럴 것이었다. 대신 마족들은 거대한 지룡들을 호위하며 저 앞쪽 선로로 접근하고 있었다. 열차가 아무리 속력을 내도 그 전에 통과하기는 힘들어보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거나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저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클레어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도 바빠졌다.

“8량의 자율형골렘에 마석 투입. 3기 필요.”

“골렘은 아직 출력이 불안정합니다.”

“상관없음. 자율형골렘 4량, 5량, 7량에 1기씩 배치.”

클레어의 말에 연구원은 더는 반박하지 않고 후열로 달려갔다.

“열차에 설치된 통신장비 확인 필요.”

“이상 없습니다!”

승무원의 말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준비가 끝나간다. 마족과의 조우도 머지않았다.

“기관사님. 속도 유지 부탁.”

“알겠습니다.”

클레어가 물 흐르듯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고 긴장하던 기관사는 바로 대답을 하고는 기관실로 달려갔다.
클레어는 열차에 설치된 통신장비를 테스트했다. 통신마석과는 다르게 열차 내에서만 사용이 가능했지만 즉석해서 제일 먼 8량까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승무원의 말대로 통신장비는 제대로 작동했다.

클레어의 뒤에 계속 서있던 다루가 품에서 조망의 마석을 꺼냈다. 전에 황자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상품으로 공간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 여러 명이  개월간 달라붙어 만들어내는 물건이라 제국 내에서도  개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다루가 마력을 흘려 넣자 열차의 위쪽에서 사진을 찍은 듯한 영상이 허공에 투영되었다. 다루가 마석의 방향을 돌려 늪지 방향이 많이 나오도록 조정을 했고, 곧 클레어의 마음에  정도로 시야가 확보되었다.

“오래 걸릴 예정. 힘들면 쉬면서 해.”

“걱정 말아요, 소장님. 저도 공녀님에게 훈련받아서  정도는 문제없답니다.”

마력을 쓰는 방법에 대해 공녀와 함께 연구해온 다루는 꿈에서만 그리던 마탑에 들어갈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 뒤로도 마석연구소에 소속되어있었고, 오랜만에 공녀를 만나 공학소에서 만든 물건을 설명 및 시연해줄 겸 따라오게  것이었다.

클레어는 다루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늪지 반대편 절벽 위에서 움직임을 포착했다.
다루도 그것을 발견하고 마석의 시야를 돌리자, 레인저 십여 명이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관사님! 속도를 낮춰주세요!”

다루의 외침에 잠시  열차의 속도가 줄어들었고, 열차에 밧줄을 걸고 과감하게 절벽에서 뛰어내린 레인저들은 곧 클레어에게 합류하였다.

“클레어 마석연구소장님이십니까?”

“네.”

레인저 중 대표로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 고개를 숙였다.

“갈란드 지역 레인저부대 소속 특급레인저 퓨라이 입니다. 시급한 상황이니 우선 클레어님께서 진두지휘 해주십시오.”

“이곳에  분, 다른 분들은 4량부터 7량까지 유격활동 부탁.”

클레어의 독특한 말투에 약간 당황했던 퓨라이는 곧장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열차에 통신장비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이 2량에 남기로 했다.

이제 마족들과 지룡이 코앞에 와있었다. 이미 선로를 따라서 길게 늘어서있는 놈들은 열차의 중간쯤에 몸통을 들이받아 전복시킬 것이다. 클레어는 물론 그 전에 지룡들을 거꾸러트릴 작정이었다.

“소장님! 앞에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여명을 등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 누군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족들을 거침없이 검으로 쳐내며 열차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새벽녘의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색 머리를 휘날리며 공녀가 뛰어올랐다.

기관사, 클레어, 다루, 퓨라이와 주변을 오가던 다른 이들마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에 열차 위에 올라선 공녀는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2량으로 들어섰다.

“아리에!”

클레어의 외침에 분주히 움직이던 연구원들이 구세주를 보는 심정으로공녀를 돌아보았다.

“오래 기다렸지?”

기다란 검을 어깨에 걸친 공녀의 등장에 방금까지 클레어의 내면에 가득했던 분노가  녹듯 사라졌다. 승리의 여신이 함께하는 전투는 두렵지 않았기에, 클레어는 기세 좋게 외쳤다.

“4량, 5량 벽면 상승 전개!”

수송열차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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