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제 8 장. 마왕, 그리고 마왕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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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는 비장의 수로 준비해두었던 7량의 물건을 꺼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건에 탑승한 자율형골렘이 그것을 몰고 나왔다.
“우와…….”
마도공학소 핵심 연구원으로 온갖 물건을 봐왔던 공녀마저 그것의 부분부분을 보았을 뿐 완성품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감탄을 참을 수 없었다.
키가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아이언골렘이 선로 위의 지룡 시체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자율형골렘은 단순한 명령밖에 이행하지 못해서 코어 부품처럼 사용할 뿐이었고 클레어가 원거리에서 패널을 들고 조종하는 방식이었다.
패널에 떠있는 버튼들을 누르고 이리저리 기울이면서 지룡들을 선로 밖으로 밀어낸 클레어는 연구를 위해 지룡 시체 한 구를 열차에 싣기로 했다.
기관사가 차량에 가득한 짐들 때문에 난색을 표했지만 클레어가 아이언골렘을 직접 몰고 갈란드까지 가기로 해서 비어있는 7량에 반토막낸 지룡을 실을 수 있었다.
공녀가 시간을 들여 얼음의 마력으로 꽁꽁 얼려놓아 냉동 창고처럼 된 7량에 지룡을 실었다.
물과 바람의 마력으로 선로를 청소한 공녀가 출발 신호를 하자 열차와 아이언골렘이 출발했다.
벨로나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과 레인저, 호위병들을 전부 열차에 태운 공녀는 클레어와 함께 골렘의 어깨에 올라탔다.
“어때?”
항상 졸려 보이던 클레어의 눈이 반짝였다.공녀는 골렘의 외장갑을 두드려보고 마력의 흐름을 살펴보기도 하면서 꼼꼼하게 점검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멋져.”
“그렇지?”
클레어와 공녀의 사이에서는 말이많이 오갈 필요가 없었다.
가끔 설명을 하다가 폭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몇 마디 단어로 통용되는 클레어의 대화방식을 공녀가 그녀와의 대화에 적극 채용한 결과였다.
뿌듯해하는 클레어를 보며 자신이 만든 파츠가 골렘의 어디에 들어갔는지 살피던 공녀의 눈에 저 멀리 2구역, 3구역이 보였다. 선로 근처까지 나왔던 걸어 다니는 늪의 마족들은 그냥 이쪽에 혼란을 주기 위한부대였는지 1구역의 주력들이 패퇴하자 스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열차는 무사히 갈란드에 도착했다.
열차가 도착하고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공녀와 클레어를 태운 골렘이 갈란드 북쪽 기차역에 도착했다.
“리에!”
플랫폼에 나와 있던 황자가 거대한 골렘을 몰고 온 공녀를 맞이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골렘이 팔을 플랫폼까지 뻗자 골렘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린 공녀는 생각보다 각도가 가파르고 속도가 빨라 그만 플랫폼의 바닥에 발을 쾅 찍고 균형을 살짝 잃었다.
“아.”
과거의 어느 때처럼, 넘어지려는 공녀의한쪽 손을 황자가 잡아냈다.
황자는 공녀가 손을 뿌리치기 전에 먼저 손을 놓았다. 하지만 공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목을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전하.”
“응.”
공녀의 생소한 반응에 황자가 볼을 긁적이자 보다 못한 벨로나가 공녀의 어깨를 잡았다.
“벨로나?”
공녀가 돌아보자 벨로나가 허리에 한쪽 손을 얹고 공녀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아직 일러요.”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줘서 감사인사를 한 것뿐인데?”
공녀의 변명을 들은 벨로나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공녀의 성격상 황자에게 감사인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보인 탓이었다.
“벨로나 경, 너무 그러지 마. 리에가 감사할 줄 아는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황자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보였다. 그 미소를 본 공녀는 본능적으로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아래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황자가 안쓰러워서 그동안 관성적으로 틱틱거렸던 것을 조금 누그러트린 것뿐인데 다들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공녀는 한숨을 쉬고 플랫폼을 돌아보았다.
공녀보다 한참 전에 도착한 열차에서 아직도 물품들이 내리는 모습을 보니 정말 대대적인 수송이었구나 싶기도 했고, 이 정도의 물품을 싣게 되면 아무리 숨기려도 해도 어디선가 이야기가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극비에 진행되는 수송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마도공학소나기차역을 감시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족들이 저 정도로 병력들을 끌고 나올 정도로 열차에 실린 것이 늪지의 마족들에게 타격이 클 거란 것은 외부인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탄약 등의 물자나 병사 수송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눈여겨보지 않으면 일상적인 수송과다를 바 없어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제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의 ‘조직’의 첩보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반증했다.
그들은 갈란드 행 열차에 물품들이 실리는 것을 보고 바로 마족들에게 알릴 정도의 원거리 통신 능력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파멸의 군세를 상대하는 것과 분열의 죄업 갚기,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기만에 의문의 조직까지. 공녀가 신경써야할 문제가 많았다.
공녀는 기합을 넣게 위해 양 뺨을 손바닥으로 찰싹 친 뒤 갈란드 남쪽 외곽에 설치되어있는 군 주둔지로 향했다.
새로운 병기들의 시연을 놓칠 수는 없었다.
“반갑습니다. 마도공학소 마석연구소장 클레어입니다.”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장교 및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어는 덤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 5년간 공녀가 정성들여 가르쳐준 발표용 대화법을 능숙하게 쓰는 클레어를 보며 공녀는 발표 시작도 전에 박수를 칠 뻔했다.
“이번 무기들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공급된 이유는 황실의 재정지원과 마탑의 협력, 젊은 드워프 장인들이 다수 제국 병기창으로 합류한 점과…….”
클레어의 설명이 갑자기 빨라지고 필요 없는 말이 길어지자 공녀가 손가락으로 조그맣게 X표시를 만들었다. 공녀를 주시하고 있던 클레어는 헛기침을 하고 다음 대사로 넘어갔다.
“……해서, 지원을 해주신 황실과 제국 재정부에 마도공학소를 대표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클레어가 황자를향해 고개를 숙이자 황자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클레어의 인사를 받았다. 클레어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서 황자의 표정을 살피던 공녀는 몰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클레어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기존에 발리스타를 운용하던 분들 있나요?”
병사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그 수를 빠르게 헤아린 클레어가 옆을 향해 손짓을 하자 연구원 한 명이 장총 여러 발을 묶어놓은 것 같은 몸체의 바퀴 달린 물건을 끌고 왔다. 다른 연구원 한 명은 총알이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가져왔다.
클레어는 손을 들었던 병사 두 명을 지목해 앞으로 불러냈다.
“발리스타는 커다란 화살 여러 발을 장전해놓고 손잡이를 돌리면 화살이 연속해서 나가는 무기죠. 이제 이 무기가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클레어가 앞으로 나온 병사들에게 짧게 설명을 했고, 그들은 옆 상자에 들어있던 탄창을 무기의 위쪽에 달린 통에 장전했다.
그리고 미리 설치되어있는 과녁을 향해 조준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드르르륵-
순식간에 총알 수십 발이 과녁을 박살 내버렸다. 사람들이 놀랄 틈도 없이, 클레어는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늪지의 마족들 중 날개가 달린 개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총탄이 먹히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마력 보호막이 있을 거라고 추정중이죠. 하지만 이 탄창과 내부 구조에 속성의 마석이 들어가 있어서, 이렇게 탄창을 바꿔주면.”
클레어가 붉은색 띠가 둘러져있는 탄창으로 갈아 끼운 다음 옆에 있는 과녁을 조준했다.그 과녁에 다루가 마력 보호막을 씌우고 잽싸게 옆으로 빠지자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드르르륵- 콰앙
과녁에 맞은 총탄이 폭발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불타버린 과녁의 지지대밖에 남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을 잊고 놀라워하다가 누군가를 시작으로 박수가 이어졌다.
클레어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 다음 물품의 설명을 시작했다.
기관총에 이어 대포, 거대 아이언골렘, 늪지의 마족에만 반응하는 지뢰, 마력보호막이 걸린 이동식 참호, 말이 아닌 마석으로 움직이는 마차의 군용 개조형 모델 등 전장의 판도를 엎어버릴 만한 물품들이 소개되었다.
신무기 시연회가 무사히 끝나자 공녀는 클레어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갔다.
클레어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지만 그녀가 지쳐있다는 것을 대번에 파악한 공녀는 그녀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가져다주었다. 해외에서 개인적으로 수입한 고급 제품이라 공녀가 아껴서 마시던 것이었다.
“수고했어.”
“응.”
밖에서는 신무기들의 편제를 나누고 주요 지점에 배치하느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을 새워가며 수송열차를 지켜낸 공녀와 기사들에게는 며칠의 포상휴가가 주어졌고, 클레어는 신무기의 운용방법 및 유지보수 관련 교육을 위해 며칠 더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자신의 막사에 침상 하나를 더 가져다놓은 공녀는 그곳에 클레어를 머물게 했다. 밤을 새다시피 한 둘은 곧 각자의 침상으로 기어들어갔다.
“공학소 생각나네.”
“응.”
지난 5년간 둘이서 밤을 새며 연구하다가 공학소 한쪽 구석에 있는 수면실에서 동시에 쓰러지듯잠들었던 적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공녀와 클레어는 침상에 누워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수다를 떨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며칠간은 무기와장비들의 배치와 적응훈련으로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녀는 원래 휴가였지만 자신이 관여했던 물건들이 많았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자신이 전선에서 빠져도 대처가 가능한지 가늠해보기 위해 클레어와 함께 막사와 요새, 갈란드 시내 등지를 돌아다녔다.
“여어. 아리에.”
“루테스 오라버니.”
공녀와 클레어는 갈란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야전병원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루테스와 마주쳤다. 루테스는 공녀의 옆에 있는 클레어를 보고 공녀에게 질문했다.
“친구분?”
“네. 마석연구소 소장 클레어 양이에요. 어,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네요.”
클레어와 루테스는 탐색하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같은 결론을 내렸다. 동류의 냄새가 났다.
하얀색가운을 입고 눈 밑에는 다크써클을 드리운 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고, 루테스가 먼저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테스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아리에의 둘째 오빠예요.”
클레어는 루테스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클레어 피셔. 아리에의 친구이자 동료. 입니다.”
둘은 공통점을 하나 더 찾았다. 둘 다 아리에를 너무 좋아했다.
왠지 모를 동질감에 의기투합한 둘은 부끄러워진 공녀가 멈출 때까지 한동안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갈레이시아 대늪지 한 가운데에 있는 리자드맨들의 성소.
인간들이 늪지의 마족이라 부르곤 하는, 고대 리자드맨의 피를 이은 선택받은 부족의 족장 천막 안에서 검은 머리의 인간이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늙은 족장과 부족 주술사가 벌벌 떨며 인간에게 고개를 조아렸고, 다른 리자드맨들도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엎드려있었다.
“흥. 언제 봐도 이곳은 시설이 너무 열악하단 말이지.”
그의 말을 들은 족장이 머리를 땅에 박으며 사죄했다.
인간들의 편에 선 늪지 외곽 쪽 배신자들의 부족은 마을이 크게 발전하고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늪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부족은 아직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인간들과의 전쟁 때문에 마을의 인구가 줄어들고 키우던 지룡들도 거의 전멸해버린 상태에서 그들의 ‘주인’이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족장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인간의 손에 파괴적인 힘이 깃들었다. 그가 손을 뻗자 족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자신의 머리가 터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자 족장은 슬며시 눈을 떴다.
인간의 손에서 생성된 검정색 구체에,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죽어간 리자드맨들의 원혼과 그들이 갚지 못한 죄업들이 모였다.
“너희가 너무 약해서 그분의 도움이 되지를 못하겠구나. 그분께서 강림하실 날이 머지않았는데 우리는 그 전에 전멸 당하게 생겼어. 그래서는 선봉을 자처한 내꼴이 말이 아니겠지.”
인간이 구체가 들려있는 손을 번쩍 들자 몇 달 전 그가 처음 이곳에 와서 비슷한 일을 했던 때처럼, 리자드맨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날개달린 마족을 만들어낸 장본인에 의해 늪지의 마족들은 한 번 더 진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