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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1 (54/82)



〈 54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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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기의 배치가 끝나고 갈란드 제2요새의 보강공사도 마무리되었을 무렵, 계절은 완연한 봄에 접어들었다.
갈레이시아 대늪지에도 봄은 찾아왔다.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꽃피었고 마른풀 가득했던 초원에는 초록빛 융단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늪지의 마족들은 간간히 늪지 저 멀리서만 관측되었을 뿐, 공격을 해오는 낌새는 없었다.
 주간 적들이 움직일 낌새가 없자 병사들의 교대 로테이션이 원활하게 돌아갔고, 최대 가용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선에서 빠져서 갈란드나 고향으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무릇 봄이란 계절은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드는 법이었다.
공녀 역시 따뜻해진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거대한 아이언골렘의 어깨에 선베드를 장치한 뒤 추락에 대비해 바람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력커튼을 치고 누워있는 공녀는 겉으로 보면 게으름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위치가 늪지 바로 앞의 절벽 위였기에 범인(凡人)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가히 비범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아가씨. 점심 식사입니다.”

“고마워, 벨로나.”

벨로나가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녀는 공간 속성을  마석으로 제작한 안경을 낀 채 늪지대 전체를 조망했다.

공간의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지치기 때문에 몸이라도 최대한 편하게 만들어야했고, 고도와 거리로 인해 소모되는 마력의 단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최대한 가깝고 높은 곳에서 관찰해야 했다.

늪지 외곽에 위치한 일반적인 리자드맨들의 마을들은 이미  비어있었고, 늪지 중앙부부터 대륙 남서부의 바다로 이어지는 뒤편까지 마의 기운에 휩싸인 부락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며칠  그곳에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포착한 공녀는 뚫어지게 늪지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눈이 피곤해져서 안경을 벗고 잠시 쉬던 공녀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늪지  가운데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엄청난 마력의 흐름은 덤이었다.

다시 안경을 공녀의 눈에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마력의 흐름을 난폭하게 만들어 마법의 발동을 억제하는, 강력한 마의 기운이 슬금슬금 늪지의 외곽으로 뻗어나갔다.

“벨로나! 기사들 긴급 소집해!”

공녀가 아래쪽을 향해 외치자 벨로나가 절벽 뒤편의 내리막길로 달려갔다.
벨로나가 후방 쪽에서 대기하던 정찰병들과 함께 주둔지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공녀는 아이언골렘의 조작패널을 꺼내들었다.

위잉-

골렘이 가동하며 내부의 자율형골렘과 연동된 패널에 버튼이 여러 개 떠올랐다. 클레어에게서 며칠 동안 조작법을 배운 공녀는 선베드를 골렘의  튀어나온 부분에 걸고 골렘을 움직였다.

“오른쪽, 오른쪽. 전진.”

골렘이 반 바퀴 빙글 돌더니 앞으로 나아갔다. 늪지 쪽은 낭떠러지였지만 뒤쪽은 완만한 언덕길이라 여유 있게 걸어 내려온 뒤 공녀는 전진버튼을 연타했다.

골렘을 타고 갈란드 제2요새 앞에 설치된 주둔지로 귀환한 공녀는 미리 와있던 벨로나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제1요새와 갈란드 남문의 중앙 주둔지 쪽에 소집 전령을 보냈습니다. 아가씨.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까?”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늪지의 거리와 적들의 행군속도를 볼 때, 날아다니는 놈들만 오는 게 아니라면 빨라봐야 오늘 밤에나 늪지 외곽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밤에 싸우는 것을 고집하는 놈들을 생각해보면 내일 자정이 지나서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레노아 사령관님과 황자전하는 지금 갈란드 남문 쪽에 계시지? 내가 직접 가봐야  것 같아. 제2요새에서 저들을 막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1요새까지 방어선을 후퇴시켜야해. 여기는 뒤쪽 빼고  트인 곳이라 포위당하면 그대로 전멸이야.”

“그 정도인가요?”

“응. 아마 내가 직접 나서도 한 마리…….”

“네? 아가씨가 나서도요?”

벨로나가 놀라서 외치자 공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마력의 흐름 한 가운데에 있던 지룡 한 마리.
지금까지 봤던 일반적인 지룡처럼 노란색이나 초록색이 아닌, 새까만 몸통을 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지니고 있는 마력의 양이 무지막지한지 하나의 마력덩어리로 보일 정도였다.

저 정도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면 아마 오러가  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목 같이 두꺼운 곳이 아닌 눈 같은 다른 급소를 노려야 할 판이었다.

그때 공녀가 가지고 있던 통신마석이 진동했다. 마석에 마력을 흘려 넣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즈릭 공녀님이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공녀와는 다른 곳에서 정찰을 하던 레인저부대에게 나머지 통신마석을 주었으니 상대방은 레인저일 것이었다. 아마 슬슬 육안으로도 마족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3예비군단 소속 정찰병입니다. 늪지 근처를 정찰하다가 늪지 속에서 레인저들의 시신을 발견해 옮기던 도중 통신마석을 발견했습니다. 마석에 공녀님의 이름이 붙어있어서…….〕

공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적습은 이미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곳의 위치는 어디죠? 그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세요!”

〔아, 저희는 지금 제2요새 막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시신을 발견한 장소는 제2요새 남동쪽의 조그마한 근처 늪지였습니다.〕

“저는 제2요새에 있으니 자세한 것은 합류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통신을 마친 공녀가 시선을 남동쪽으로 돌리니  멀리 나무들이 모여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잠시  공녀와 통신을 병사들이 레인저 두 명의 시신을 제2요새로 옮겨왔다.

공녀는 우선 레인저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는 발견 당시의 상황 등을 물으며 시신에 덮여있는 천을 들추고 살펴보았다.

 시신에는 끔찍한 자상이 목과 가슴팍에 나있었다. 다른 시신은  한 쪽과 머리가 없었다.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으로 보건데 질 좋은 무기로 단숨에 잘라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리자드맨들은 조잡한 창과 날이 휜 곡도를 썼고,철의 질이 좋지 않아 절단면이 저렇게 깔끔하지 못하다.

그리고 늪지의 마족들은 무기를 드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마의 기운 때문인지 신체가 강화되어 손톱이나 주먹으로도 인간의 머리통 정도는 쉽게 부술 수 있어 굳이 무기를 들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니면 단순히 무기를 수급하지 못했거나.

‘조직 아니면 오러를 쓰는 마족인가?’

레인저는 기사들과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다.
레인저 두 명을 제압하려면 방심하게 만들고 기습하거나,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공녀는 현장을 살펴볼 필요성을 느꼈다. 마력의 움직임과 전에 없던 공격방식이 새로운 적이 나타났음을 암시했고, 적군이 곧 쳐들어올 상황에서 그 단서를 얻는 것은 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벨로나. 우선 현장을 보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벨로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군말 없이 공녀를 따라왔다.
남은 장교와 병사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령에게 레인저들이 가지고 있던 통신마석을 황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뒤 공녀와 벨로나는 남동쪽의 숲으로 향했다.

“여기가 현장인  같습니다.”

숲과 늪지 사이의 좁은 평지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시신이 늪지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 바로 앞쪽의 늪지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공녀는 일단 사건현장을 살펴보았다.
정찰병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군화발자국과 레인저들의 가죽장화 발자국 사이로 이질적인 발자국이 보였다.

“늪지의 마족이 남긴 발자국 같군요.”

공녀는 유심히 발자국을 살펴보았다. 늪지 쪽에서 이어진 리자드맨의 발바닥에는 아직까지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심하자, 벨로나. 아무래도 무척 강한 개체가 나온 것 같아.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위를 경계해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놈은 마족의 대장일까요?”

공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겨우 레인저 두 명을 잡으려고 대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상해.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대장 아래급인, 우리로 따지면 너나 마테스 같은 정예 기사 급일 가능성이 높아.”

집중해서 마력의 흐름을 살펴보던 공녀는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발자국은 조금 이상했다.

“레인저들의 신발을 신었나?”

숲 속으로 이어진 발자국은 가죽장화의 바닥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발자국이 거꾸로 찍혀있네. 머리를 쓰는군.”

뒤로 걸은 것인지, 신발을 거꾸로 신었는지 숲에서 늪지 쪽으로 나오는 모양새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그렇군요. 이 발자국, 숲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보폭이나 각도가 이상해요. 그리고 다른 두 발자국과 궤도가 다르네요.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놈이 있을 가능성이 커요.”

공녀와 벨로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보는 강한 적이 조그마한 숲속에 있었다.

“이만 돌아가서 대비를 할까요? 아니면…….”

“아니. 이 정도 되는 놈이 뒤로 침투한다는 것은 아마 요인 암살을 시도하는 것일 가능성이 커. 아마 용사인 황자를 노리는 것일 테지. 지금 잡아야해. 전투가 시작되면 혼란한 틈을 타서 놈이 활동을 시작할거야.”

“마족들이 병력을 움직이는 게 오히려 속임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마도.”

공녀와 벨로나는 시선을 한  교환한 뒤 숲으로 향했다. 적의강함은 미지수였지만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숲은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었고 풀들은 낮게 깔려있어서 레인저가 아닌 기사 두 명이서도 추적을 쉽게 진행할  있었다.
숲 속에서 버려진 가죽장화를 발견한 공녀와 벨로나는 근처에서 리자드맨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추적을 이어갔다.

그리고 숲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공녀와 벨로나는 약속이라도 한  양 옆으로 몸을 날렸다.

촤악

무시무시한 오러가 공녀와 벨로나가 방금까지 서있던 곳에 떨어져 내렸다.
공녀와 벨로나는 무기를 빼들고 위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무 위에서 검을 빼들고 그녀들을노려보고 있었다.

“인간?”

여자가 검을 휘두르자 오러가 지면을 강타했다. 벨로나의 특기처럼 오러를 쏘아 보내는 것에 능숙한 모양이었다.
공녀와 벨로나는 여자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몸을 큰 나무 뒤로 숨겼다.

“인간이 아니야. 자세히 봐.”

벨로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여자를 관찰했다. 머리에 양옆에 달린 리자드맨의 아가미 같은 부위와 파충류 특유의 비늘 덮인 팔다리와 리자드맨의 발. 그리고 샛노란 홍채속의동공은 세로로  모양이었다.
전체적인 외양을 보면 인간의 얼굴을  리자드맨이라고 표현 할 수 있었다.

“리자드맨 같은데 인간의 탈을 썼네요.”

날아오는 오러를 피해 고개를 움츠린 벨로나의 말에 공녀가 대답했다.

“저게 원래 그들의 모습일거야.”

“네? 그건…… 아!”

벨로나도 용마연의 기밀 자료들을 어느 정도 읽어봐서 알고 있는 정보가 많았다.

과거 종족들의 죄업이 쌓이기도 한참 전, 큰 잘못을 저질러 신에게 벌을 받은 종족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드래곤의 후손이었으나 벌을 받아 보다 원시적인 동물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그것이 리자드맨이라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즉, 저 녀석은”

“그래. ‘드라고뉴트’, 용인(龍人)이야!”

공녀의 말과 함께 그들이 숨어있던 나무가 박살났다.
공녀와 벨로나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용인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힘에 놀라며 각자의 무기에 오러를 담아냈다.

나무 위에 있던 용인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얼굴만 보면 굉장한 미인상이었다. 아직 청소년인 공녀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벨로나가 따라잡기 힘든 어른의 매력마저 느껴졌기에 공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리자드맨 따위에게 성인 여성의 매력을 느끼다니.
공녀의 내면의 테르한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절규하는 사이 벨로나가 레이피어를 용인에게 향했다.

“네놈이 먼저 공격한 이상, 죽을 각오는 되어있겠지?”

용인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세웠다.
자세히 보니 검이 아니라 한쪽에만 날이 서있는 기다란 도였다.

공녀는 자신도 가담해야하는지 싶었지만 벨로나가 자기 쪽으로 비어있는 왼손을 내밀어 제지했기에 일단은 벨로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잠시 서로를 탐색하던 두 검사 사이에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각자의 검에 깃든 오러로 인해 주변의 마력 흐름이 미칠 듯이 요동치며 흔들리던 차, 작은 새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을 신호로 두 명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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