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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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나는 덧갑옷 중 검을 쥔 오른팔에 있는 근력 상승의 마석과 가슴에 있는 보호막의 마석을 전개했다.
양쪽 다리의 그리브에 박혀있는 속도 향상의 마석에 바람의 마력을 불어넣으며 레이피어의 끝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벨로나는 순식간에 용인의 코앞에 짓쳐들어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용인은 도를 올려쳐 벨로나의 레이피어를 튕겨내려 했으나 벨로나의 검이 공중에서 낭창거리며 도를 휘감아 오히려 용인의 도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순식간에 빈틈을 만들어낸 벨로나는 레이피어에 깃든 번개의 오러를 쏘는 동시에 용인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
그대로 찌르기 직전, 용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벨로나는 재빨리 뒤로 도약하며 레이피어를 크게 휘둘렀다.
파지직
번개의 오러가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고, 크게 몸을 숙여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발끝으로 벨로나의 다리를 쓸어 넘어뜨리려던 용인은 오러의 끝부분에 허벅지를 살짝 베이고 뒤로 물러났다.
평범한 늪지의 마족이었으면 살짝 베이는 것이 아니라 깊숙한 상처를 입고 번개의 오러로 인해 상처가 타버렸겠지만 용인에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검붉은 피가 흐르던 허벅지는 잠깐의 대치시간 동안 금세 아물었다. 경이적인 치유력이었다.
하지만 공녀의 눈에는 용인의 온몸을 휘감은 마력이 치유를 하는 사이에 조금 약해진 것이 보였다.
오러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이유는 저 두꺼운 마력 방어막 때문일 테지만 상처를 누적시키면 뚫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용인이 과연 그렇게 당해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벨로나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주며 공녀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행여 다른 적이 숨어 있다가 벨로나나 자신에게 기습을 가하면 바로 대처가 가능하도록 검을 미리 뽑아놓고 아래로 늘어뜨린 공녀는 계속되는 벨로나와 용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때로는 곧게, 때로는 휘어지는 변화무쌍한 벨로나의 검을 막기 급급하던 용인은 크게 뒤로 물러나더니 검을 검집 옆으로 가져가며 자세를 취했다.
벨로나가 곧장 따라붙자 용인은 검을 크게 휘둘러 반달 모양의 오러를 발사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벨로나는 허리를 숙여 오러를 피한 뒤 검을 낮게 찔러 들어갔다.
“크윽!”
용인은 급히 뒤로 뛰었으나 발도 동작이 워낙 커서 무릎을 정통으로 찔리고 말았다.
두꺼운 마력 방어막 덕분에 오러가 다리를 절단 내는 것은 막아냈으나 예기를 띤 검이 비늘 사이를 파고들어 무릎 뼈와 연골을 박살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절뚝거리는 용인을 향해 검을 겨눈 벨로나는슬쩍 눈을 돌려 공녀 쪽을 보았다.
용인이 방금 날렸던 오러는 나름 머리를 써서 벨로나와 공녀를 한꺼번에 노린 모양이었지만 공녀는 무심하게 오러가 깃든 검으로 용인의 오러를 쳐냈고, 이제는 하품까지 하며 벨로나의 옆으로 왔다.
“약하네.”
“그러게요. 오러 날리기만 배웠나 봐요.”
용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공녀는 혹시나 싶어서 늪지의 마족의 언어로 말을 걸어보았다.
[인간의 말을 알아듣나봐?]
[우리의 말을 할 줄 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왕공녀.]
[마왕공녀?]
생소한 호칭에 공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벨로나는 용인을 겨누었던 검에 힘을 주었다. 곧장이라도 찌를 듯한 동작에 조금 뒤로 물러난 용인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야.”
용인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오자 벨로나는 놀라서 공녀 쪽을 쳐다보았고, 공녀는 말없이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나가 가지고 다니던 사슬에 공녀가 마력을 억제하는 마석을 박아 넣은 뒤 용인의 손을 묶은 사이 공녀는 용인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나를 보고 희한한 호칭으로 불렀지. 그 이유는 뭐지?]
[그 손은 마음에 안 들면 죽인다는 뜻인가?]
비웃는 표정을 띤 용인의 말에 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렇게 하려고 했지.]
공녀는 용인의 몸에 있는 마력을 뽑아내 대기 중으로 방출했다.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접촉한 대상의 마력에 간섭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공녀는 마력각성지인 자신의 신체적 특징과 조합해 상대방의 마력을 흩어버리는 기술을 익혔다.
이 기술을 실전에 사용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짓이지?]
자신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용인이 발악하듯 외쳤고, 동시에 벨로나가 검을 용인의 목에 가져갔다. 꼼짝없이 몸에 있는 마력들을 빼앗긴 용인은 마력탈진증에 걸린 것처럼 몸이 쇠약해져 바닥에 엎어졌다.
“아가씨. 대체?”
방금까지 팔팔하던 용인이 쓰러지자 놀란 벨로나는 그 원인이 공녀에게 있음을 알아차렸다.
용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힘이 빠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혹시라도 내부 조력자라도 있어서 몰래 탈출이라도 해봐. 아무리 약하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기사나 병사들은 상대하기 힘든데다 갑옷이나 군복을 입으면 인간과 구별도 힘들지. 그대로 지휘관 막사로 가서 오러만 날려대도 엄청난 일이 벌어질걸.”
벨로나가 물어본 것은 용인을 저 상태로 만든 능력에 대한 것이었지만 공녀는 질문의 의도를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아가씨의 체면을 위해 그냥 넘어가기로 한 벨로나는 용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순간, 용인의 몸에서 피부를 찌르는 듯한 꺼림칙한기운이 느껴졌다. 벨로나는 용인을 밀치며 검을 뽑아들었고, 공녀 역시 검을 뽑아서 용인을 겨누었다.
손이 뒤쪽으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인의 전신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마의 기운이 솟아났다.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색의 기운이 한동안 일렁이더니 용인의 내부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용인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은 홍채와 얼굴에 곳곳에 돋아난 검은색 비늘 때문인지 더 이상 인간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던 입에서 태초의 짐승과도 같은 괴성이 튀어나왔다.
벨로나는 한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가 곧장 머리 쪽에 있는 마력을 회전시켰다.
공녀가 가르쳐준 정신 공격에 대한 대처 방법이었다.
“드래곤 피어?”
공녀는 다분히 학자의 관점에서 용인을 관찰했다. 괴성에는 마력과는 다른 힘과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한참동안 괴성을 지르던 용인의 눈이 공녀를 쫓았다. 손에 걸려있던 사슬을 힘으로 끊어버린 용인은 검을 뽑을 생각도 않고 짐승마냥 손톱을 길게 빼서 공녀에게 휘둘렀다.
“읏차.”
춤추듯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손톱을 피해낸 공녀는 검에 살짝 마력코팅만 한 채 용인과 맞섰다. 벨로나에게는 끼어들지 않도록 명령한 뒤 공녀는 용인의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용인의 왼손과 오른손이 공녀의 살을 취하고 뼈를 부수기 위해 쉴 새 없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오러도 아닌, 검날이 상하지 않도록 마력코팅만을 씌운 채 그 모든 공격을 검으로 튕겨내던 공녀는 오랜만에 검술 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테르한이 원래 사용하던 검은 그의 몸집에 비해 크지는 않았고, 분열의 검은 그 커다란 몸체에 비해서도 거대했다.
둘 모두의 검술을 쓰기 위해 한손검으로도 양손검으로도 쓸 수 있는 바스타드소드를 주력 무기로 선택한 공녀는 그 동안 검술 실력을 마음껏 펼칠 곳이 없었다.
지룡이나 기타 늪지의 마족들과는 검술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싸울 때가 많았고, 다른 기사들과의 대련은 아무래도 교육자의 입장에서 가르쳐주는식의 대련이 되곤 했다.
그나마 아펠과 대련할 때는 제법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었지만 자주 그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펠이나 공녀나 공사다망한 인재들이었다.
용인의 공격은 꽤 매서웠다. 아까 검을 들었을 때보다도 속도도 빨라졌고 공격 경로도 훨씬 까다로워졌다.
검술은 별로였지만 전투실력까지 약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력이 그대로 있었으면 공녀도 오러를 끌어내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아, 혹시 아까 내가 한 말이 허를 찔려서 이판사판 덤비는 건가?’
공녀가 말한 대로 포로로 끌고 갔다가 내부에서 탈출한 후 옷과 검을 챙긴다면 누군가를 암살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늪지전선에는 여군도 적지 않으니 크게 의심을 살 일도 없고, 세로로 되어있는 동공만 잘 숨기면 미인이었기에 다른 이의 호감을 사서 도움을 받기도 쉬웠다.
“아까는 일부러 잡혀준 걸지도 몰라. 꽤 똑똑한데.”
“마력이 다 떨어져서 오러를 못 쓰니까 본성을 드러낸 거군요.”
자신과 싸우면서 벨로나와 대화를 하는 공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용인은 다시 한 번 피어를 사용하려는 듯 검은 기운을 이끌어냈다.
공녀는 재빨리 접근해 용인의 목을 베었다.
“커억…….”
절묘한 힘 조절로 인해 딱 성대를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목을 부여잡고 용인이 뒤로 물러났다. 힘이 빠졌는지 아까 벨로나에게 파괴당한 무릎도 다시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라서 이 정도 상대했지, 일반적인 병사나 기사가 싸웠다면 일방적으로 당했겠네. 레인저들도 기습과 원거리 오러로 당했겠지.”
공녀도 용인이 제법 강한 상대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적어도 벨로나나 마테스 정도의 정예기사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포로로 데려가기에는 아까 검은 기운으로 변한 뒤 제압이 힘들 것 같고.”
변신을 한 뒤에는 사슬을 팔의 힘만으로 끊어버릴 정도로 근력도 굉장해진다. 벨로나가 고민하는 사이 공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얇은 끈을 꺼내들었다.
공녀는 비척거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용인의 발을 걸고 마운트 포지션으로 제압한 뒤 끈으로 용인의 손을 묶었다.
“엘프들과 마도공학소가 함께 연구한 제압용 끈이야. 이참에 실험해봐야지. 돌아가자, 벨로나.”
“아, 예. 진짜 그걸로 제압이 가능할까요?”
“아마도? 여차하면 베어버리지, 뭐.”
상대를 죽이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는 공녀를 보며 벨로나는 착잡한 심경이 되었다가 바로 생각을 고쳤다. 여기는 전장이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아군이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따가 막사에 도착하면 클레어 좀 불러줘. 제1요새에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공녀와 벨로나는 용인을 포로로 잡고 제2요새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