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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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않네요.”
“그냥 겁먹은 거 같은데.”
공녀와 벨로나가 쑥덕대는 이곳은 제1요새의 지하감옥.
요즘 짓는 요새에는 감옥이나 수감소가 따로 없는 것이 추세였지만 제1요새는 꽤 오래 전에 지어진 나름 역사 깊은 곳이었기에 정석적인 지하감옥이 존재했다.
지하감옥에서 구속복에 갇힌 용인이 질린 표정으로 도리질을 하고 있었고 그 앞에 선 클레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용인의 머리에 달린 아가미를 당겨보거나 볼을 콕콕 찔러보거나 수상한 약품을 얼굴 반쪽을 덮을 정도로 치덕치덕 바르거나 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비인도적인 실험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단어 그대로의 의미인지, 저 용인이 인간이 아니라서 한 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클레어의 직책은 마석연구소장 이었지만 마도공학의 모든 분야에마석이 들어가기에 다방면에 능통했고, 알레온의 딸이라서 그런지 생체실험에 거리낌이 없었다.
“클레어. 뭐 바르는 거야?”
보다 못한 공녀가 클레어를 살짝 제지하려는 의도로 질문했다. 내부의 배신자나 적의 정보 등을 캐내기도 전에 용인이 까딱 잘못되기라도하면 기껏 잡아온 것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클레어는 용인의 얼굴을 딱 절반으로 나누어 한쪽에 바르던 약품을 공녀에게 쑥 내밀었다. 살짝 경계하던 공녀는약품의 냄새가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에 그것을 찍어본 공녀는 일종의 확신을 갖고 클레어를 향해 외쳤다.
“왜 포로한테 화장품을 바르고 있어!?”
클레어가 엄지를 척 세웠다.
“피부미인의 지름길.”
“오. 그거 아가씨가 광고하시던…….”
“벨로나!!”
공녀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빽 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몇 개월 전 마도공학소 사업부서에서 개발한 기능성 화장품의 광고를 신문에 싣게 되었는데 그 모델에 아리에 제즈릭 공녀가 발탁되었던 것이다.
공녀는 한사코 사양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마도공학소 사업부서에서 벌어다준 돈으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광고를 찍게 되었다.
굳은 얼굴과 딱딱한 미소로 하루 종일 사진을 찍어댄 공녀에게 그날의 일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클레어가 그것을 굳이 지금 포로의 얼굴에 바르는 의도가 무엇일까. 공녀는 클레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빠졌다.
“아리에. 오해 금지. 검은 기운과 마력반응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
“아.”
화장품에는 곱게 갈은 마석 석분이 들어있었는데, 피부 타입에 따라 다른 마석을 사용했다.
온갖 실험을 통해 화장품의 주 기능인 미용에 효과가 있도록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 마력 반응을 억제하는 기능이 발견되었다.
그 마력반응이라는 것에는 검은 기운도 포함되어있었는데, 공녀가 용인의 체내에 있는 마력을 전부 뽑아냈음에도 검은 기운을 발휘한 것을 보아 체내가 아닌 다른 곳에 저장되어있는 마력을 끌어다 쓰는 능력일 가능성이 컸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인의 뺨을 잡아당기던 클레어는 패널을 조작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검은색 기운이 덜 빠졌는지 얼굴에는 비늘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었는데, 시간을 재던 클레어가 하얗게 덧칠해진 반대편 얼굴의 화장품을 걷어내자 비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마력 상쇄 간섭으로 기운을 지우는 것이 가능.”
속성이 다른 화장품들을 섞으면 마석가루들로 인해 다양한 마력반응이 일어나는데, 방금 클레어가 바른 것들은 마력 상쇄 간섭, 즉 일정 영역의 마력을 제거하는 성질이 있던 모양이었다.
클레어가 패널에 메모를 하는 동안 공녀는 내부의 적을 잡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정체는 거의 밝혀지기 직전이었다.
용인이 자기도 모르게 한 말 중 공녀가 자기들의 말을 쓴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
저번에 늪지의 마족 포로를 잡았을 때 잠깐 썼었지만 현재 주둔지에서 그에 관한 소문은 돌고 있지 않았다.
아마 이쪽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공녀가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배려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오히려 적군에게 퍼져있었다는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 포로를 다루던 병사 세 명, 심문에 참관하던 장교 한 명. 그리고 공녀와 마족.
‘그 장교, 분명히 레노아 사령관의 휘하 장교였지.’
아무래도 병사보다 장교가 내통자일 가능성이 컸다. 일개 병사가 내통자 노릇을 하기에는 전장이 만만치 않았다. 내통자가 전투 중에 죽기라도 하면 우스운 일일 것이었다.
장교의 얼굴이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보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공녀는 황자에게 지난 근무 시프트 자료를 받기로 하고 일단 눈앞까지 닥쳐온 전투를 준비했다.
제2요새에서 한 발 물러선 제국군은 지형적 요건이 훨씬 나은 제1요새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룡 수 마리는 너끈히 해치울 수 있는 대포들이 요새의 성벽을 따라 죽 늘어서있었고, 첨탑에는 날개달린 마족들을 대비하여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요새의 문에는 마법사들이 마석을 깨서 그 파편을 뿌리면서 보호의 술식을 걸었다.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진과 술식은 파멸의 마의 기운 속에서 그나마 마법사들이 활약할 여지를 주었다.
다만 매개체가 필요한 술식은 마석을 거덜 내는 원인이 되곤 하였다.
공녀는 전체적인 상황을 체크한 뒤 지하감옥에서 다른 기사와 교대하고 온 벨로나와 함께 정찰에 나섰다. 이제 슬슬 해가 질 무렵이었고 시간을 따져보니 지금쯤이면 늪지에서 상륙을 할 참이었다.
제1요새는 제법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쪽은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공녀와 벨로나는 절벽 위에 있는 첨탑으로 향했다.
첨탑 위의 병사들을 격려한 뒤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간 공녀는 안경을 쓴 채 늪지 방향을 조망했다.
늪지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서 가장자리가 간신히 보이는 수준이었는데 한 무리의 마족들이 포착되었다. 날개달린 마족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까 낮에 봤던 검은 지룡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암살자가 잡힌 것을 알아차려서 적게 온 건가?”
“그게 벌써 저쪽까지 퍼졌을까요?”
“뭔가 신호를 주고받기로 했었을 가능성도 있지.”
“그러네요. 소식이 끊겨서 뭔가 잘못된 것은 알았는데 그냥 빠지기도 뭐해서 항의하러 온 건가요?”
“글쎄. 내가 봤을 때는…….”
거리가 워낙 멀어서 벨로나는 볼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안경을 쓴 공녀에는 확실히 느껴졌다.
저 멀리서걸어오는 다섯 명의 마족들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족들을 전부 합친 것만큼이나 강했다.
지금 지하감옥에서 클레어에게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는 용인이 그야말로 암살에 특화된 자였다면 저들은 전사 또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내뿜고 있는 투기가 보이는 듯해서 공녀는 오랜만에 몸이 긴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벨로나. 우리 둘 빼고 여기서 가장 강한 세 명을 꼽으면 누구누구가 뽑힐까?”
공녀의 다소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벨로나는 손가락 세 개를 들고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마테스 선배, 카디엄 선배, 레무르트 선배?”
카디엄과 레무르트라면 지난번 지룡을 처음 조우했을 때 따라왔던 다섯 명의 기사들 중 두 명이었다.
“누가 기사아니랄까봐 다 기사만 뽑네. 그러면 5대 5로 싸울 때는?”
공녀가 조건을 걸자 벨로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재차 의견을 피력했다.
“음. 그렇다고 달라지나요? 전부 기사면 합 맞추기도 쉽고 하니까 더 좋을 거 같은데요.”
벨로나의 말에 공녀는 요새 뒤쪽에 서있는 아이언골렘에 눈길을 주었다. 벨로나의 시선이 공녀를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포함한다면 레무르트 선배는 빼고.”
“너 생각보다 가차 없구나. 일단 골렘은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뭐, 대인전에서는 기사가 제일 강할 테니 네 말이 거의 맞겠지.”
적의 동향을 파악한 공녀와 벨로나는 첨탑에서 내려왔다.
상대방이 강자다섯 명을 뽑아서 이쪽으로 보낸 이상 마땅히 나가서 응대를 해야 할필요성이 있었다.
공녀는 마테스와 카디엄, 레무르트, 혹시 몰라서 클레어까지 호출했다. 다행히 모두들 제1요새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마도 저들은 5대 5 전투를 제안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이유가 있나요? 그냥 요새에서 대포 쏘면서 농성하면 물러날 거 같은데.”
벨로나의 발언에 공녀가 피식 웃었다.
“기사답지 않은 현실적인 말이구나. 맞아. 저들이 한 100명쯤 몰려왔으면 나도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우리가 요새에 틀어박혀 있으면 저들은 그냥 물러나거나 우회해서 뒤를 칠 수도 있어.”
“수가 적으니까 침투하기도 용이한 거군요.”
“응. 저들도 용인이라고 가정하면 옷으로 대충 가린 다음 갈란드에 몰래 침투해서 깽판을 벌일지 누가 알아? 차라리 미리 나가서 영격하는 게 나아.”
벨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사이 호출 받은 이들이 모였다.
덩치가 거의 테르한만하고 양손검을 주로 쓰는 마테스, 탄탄한 체형에 긴 검을 쓰는 전형적인 기사인 카디엄, 땅딸막하고 근육질이며 배틀액스를 쓰는 하프드워프 레무르트.
잠시 후 회색의 긴 머리를 휘날리며 실험용 흰색 코트를 입은 클레어까지 모이자 공녀가 상황을 설명했다.
지하감옥에 들러 용인을 한 번씩 구경한 기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하감옥에 경비를 다수 세워둔 공녀는 지상으로 올라와 기사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용인 사냥에 나설 겁니다. 겁먹으신 분?”
기사들이 난폭한 미소를 띠며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 역시 비슷한 미소를 띠며 영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