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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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과 아이언골렘이나아갔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그들의 등 뒤에는 석양이 지고 있었고 사악한 의지를 가진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을 탄 채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며 전진하던 기사들은 아이언골렘의 어깨에 올라타 수납 칸에서 각종 무기들을 꺼내는 공녀를 잠시 구경했다.
그들을 가르치던 10살짜리 꼬맹이는 이제 제국의 핵심 인물이 되어있었다.
마도공학소, 용사마왕연구소, 마탑 등등 온갖 곳에서 활약하는 공녀가 몇 년 전 그들의 후배 한 명과 했던 대화는 생도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자신보다 어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몸져누워있었다고 알려진 공녀에게 검술 대련을 지고 울분에 차서 한 말로 전해진다.
‘공녀님은 검술에 그다지 시간을 많이 쓰지 않아도 강한데 그 재능이 부럽다’는 식의 말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녀의 답은 ‘그 정도 재능도 없으면 기사 후보생 때려치워라’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초대마왕에 대한 이야기와 대륙 및 인류의 위기, 기사단의 중요성 등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공녀는 말의 마무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영혼의 고향은 기사단이다’라고.
그 뒤로 ‘영혼의 고향’이라는 단어가 양성소에서 크게 유행했고, 누군가 심심풀이로 음과 가사를 붙여 어설픈 노래로 만들기도 해서 공녀는 한동안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그 나이대의 청소년들은 대개 그런 멋져 보이는 단어를 입에 올리곤 하는 법이었지만 테르한의 인생까지 합하면 살아온 인생이 40년이 넘어가는 공녀로서는 상당히 쪽팔린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위기의식을 갖게 된 생도들은 공녀의 철저한 교육에 의해 역대 최고의 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공녀가 가르쳐준 속성 오러를 깨우치고 정식기사가 된 뒤 전장에서 5년을 보낸 현 기사단 최강자 마테스를 비롯하여 공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사들은 백여 명이 넘어갔다.
임관 시험을 통과하는 연령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공녀의 또래들이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한데, 아마 연령제한이 없었으면 기사단원이 50명은 더늘었을 거란 말도 있었다.
요 근래 기사단 양성소에서 가르치는 커리큘럼은 실전적이고 빠르게 강해지는 것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기사들은 그만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머지않아 하늘과 땅을 가른다는 초대마왕이 등장할 것이다. 마왕의 하수인인 늪지의 마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일 것이다.
마테스는 두께가 한 뼘은 되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분리했다. 그의 검은 너무 크고 길어서 검집에서 뽑는 것이 힘들었기에 악기케이스처럼 옆으로 열리는 검집을 사용했다.
마테스가 무기를 준비하는 것을 본 카디엄과 레무르트, 벨로나 역시 무기를 꺼내들었다.
저 멀리서 적들이 보였다. 보통 인간의 걸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지라 잠깐 지켜보는 사이에 투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일행은 잠시 말을 세우고 공녀를 돌아보았고, 골렘의 어깨에서 내려온 공녀가 신호를 주자 클레어가 패널을 조작하더니 골렘의 머리 부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것처럼 인간과 늪지의 마족 사이에 동그랗고 밝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제2요새와 제1요새의 중간쯤 되는 그곳은 주위 수백 미터 안쪽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평지였다. 그나마 잡초가 낮게 깔려있어 황무지는 겨우 면한수준의 평탄지.
힘 싸움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공녀는 무대에서 십여 미터 떨어져있는 적들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전부 용인들이었고, 포로로 잡혔던 암살자처럼 호리호리하고 미려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형과는 달리 그 투기만큼은 어지간한 정예기사들보다 강해서 공녀는 순간 맹수 앞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낮에 잡았던 녀석하고는 조금씩 다르게 생겼네요.”
“그러게.”
벨로나의 말처럼 용인이 전부 암살자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암살자는 침투를 위해서였는지 머리 양쪽에 달린 아가미와 비늘달린 팔, 리자드맨의 다리를 제외하고선 전부 인간이나 다름없는 외형이었지만 눈앞의 적들은 다소 이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인간과 비슷한 얼굴을 지니고 있긴 했으나, 다섯 중 셋이 꼬리가 달려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날개까지 달려있었다.
그리고 꼬리가 없는 둘 중 한 명은 머리에 뿔이 달려있었고, 전부 없는 한 명은 커다란 덩치에 피부 전체에 검은 비늘이 달려있었다. 그냥 피부가 검은 줄 알았더니 전부 비늘이었다.
적들이 낮은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니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꼬리와 날개를 모두 가진 녀석이었다.
“그쪽이 마왕공녀?”
공녀를 가리키며 녀석이 말하자 벨로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그 호칭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발끈해 무기를 세워들었다.
공녀는 흥분한 기사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마왕은 아니지만 공녀는 맞아. 너희는 드라고뉴트 맞지?”
“그렇다. 잘 알고 있군.”
뭔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며 공녀는 양 손을 허리에 얹었다.
“늪지에서 여기로 쳐들어와놓고 뻔뻔하네.”
“평원은, 너희 것인가?”
“평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희 인간들이 이곳을 멋대로 자신들의 땅이라 규정하고 우리를 늪지로 내쫓은 것 아닌가?”
갑자기 복잡 미묘한 종족과 영토 문제를 제기한 용인을 향해 반박하려던 공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공학이나 검술, 마력에 대한 것이라면 심도 깊은 토의가 가능했지만 이런 역사나 정치가 들어간 논쟁은 공녀가 꺼리는 것이었다.
결국 공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말싸움 하러 왔어, 그냥 싸우러 왔어?”
주무기인 바스타드소드가 아닌 팔뚝길이만한 소검 두 자루를 양손에 든 공녀는 위협적으로 검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러자 논쟁을 하던 날개달린 용인이 피식 웃더니 뒤를 향해 손짓을 했고, 다른 네 명이 그의양 옆에 섰다.
[마음에 드는군. 좋아. 화끈하게 가자고.]
덩치 큰 비늘의 남성체가 말하자 그 옆에 있던 뿔 달린 여성체가 핀잔을 줬다.
[이 싸움밖에 모르는 녀석.]
[헹. 너도 사실 몸이 근질거리잖아?]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야? 좀 씻고 다니지 그러냐.]
용인들의 말을 듣던 공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나치게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냥 특이한 갑옷이나 장신구를 달고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저기. 그래서 어떤 식으로 무엇을 위해 싸울 건데?]
공녀의 발언에 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모습에 공녀의 옆에 서있던 기사들이 무기를 재차 세워들었고,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용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와, 우리 말 진짜 유창하게 잘하네.]
[난 또 다른 네가 말하는 줄 알았어.]
[뭐? 나는 저런 목소리 아니잖아.]
[그렇긴 해. 너처럼 걸걸한 목소리는아니었지.]
[이 자식이…….]
[자, 그만.]
날개달린 용인의 말에 다른 용인들이 조용해졌고 한숨을 내쉰 날개달린 용인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소개가 늦었군. 우리는 마왕 ‘파멸’님의 선봉이자 우리의 주인이신 ‘세트라’님의 수하. 이 세상의 모든 종족이 지은 죄업을 없애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다.”
“죄업…….”
용인의 말에 공녀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마족들과는 다르게 저들은 마치 거래나 협상을 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공녀는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마왕의 강림 목적은 지상의 죄업을 없애는 것이지.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하려고? 지금까지는 너희 종족들을 통째로 이쪽에 부딪치는 바람에 서로 간 피해가 컸는데, 그것을 답습해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공녀의 말에 용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더니 온몸에서 검은 기운을 피워냈다. 공녀를 비롯한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무기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이 기운이 느껴지나? 이것은 우리 종족이 짊어진 ‘죄업’ 그 자체다. 그간 우리 종족들이 희생하고 남은 것들이지. 설령 우리가 모두 죽더라도 죄업은 갚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죄업을 한데 모아서,”
용인이 눈을 뜨자 노랗던 눈동자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는 이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너희의 죄업에 부딪친다.”
말이 끝나자마자 용인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돌진해왔다.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공녀는 양손의 소검을 교차하며 용인의 팔을 막아내었다.
끼기긱
강철에 손톱이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오러를 띤 공녀의 무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녀는 혀를 한 번 차고 마력을 발산해 용인을 밀어내었다.
“휘유~”
용인이 놀리듯 휘파람을 불며 뒤로 물러났고 공녀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기를 바꿔들었다.
“설마 내 공격을 그냥 받아 내다니. 그러고 보니 너희는 왜 ‘죄업’을 모두가 조금씩만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상태로 싸우면 질 텐데.”
용인의 말에 공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늪지의 마족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 종족들을 희생해가며 죄업을 한데 모아 역량이 뛰어난 자들에게 맡겨 갚게 한다. 쉽게 말하면 파멸이 직접 나선 것의 소규모, 다수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종족의 죄업을 힘으로 삼아 강해져상대를 멸함으로써 죄업을 없앤다. 그 개념은 인간에게도 통용되는 일이었다.
공녀는 품에서 통신마석을 꺼내들었다.
“1분…… 아니, 5분만 기다려. 죄업이든 빚이든 제대로 갚게 해줄 테니까.”
용인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공녀는 통신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가씨. 저거 진짜 상대 가능해요? 오러가 깃든 무기가 부서졌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그래서 통신하고있잖아.”
“아!”
아까 낮에 암살자를 잡기 전 레인저들에게서 통신마석을 회수한 공녀는 그것을 어떤 인물에게 발송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공녀의 통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통신이 시작되었다.
〔리에. 무슨 일이야. 심심해?〕
“전하. 전에 알려드렸던 통신마석이랑 공간마석을 이용해서 성검의 기운을 보내는 방법 기억하시죠?”
〔아, 그거. 물론이지.〕
“제가 가지고 있는 통신마석 쪽으로, 성검의 힘을 집중해주세요.”
〔성검? 어, 거기가 어딘데?〕
“제2요새 근처에요.”
〔어려울 거 같은데. 여기서 거의 3~40킬로미터 정도 되지 않나?〕
공녀는 황자의 말투와 억양에서 진짜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숨을 쉰 공녀는 억지로 내뱉듯 말했다.
“……끝나고 모레 정도에 갈란드 구경이나 갈까요?”
〔콜.〕
곧장 통신이 종료되고 마석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클레어가 골렘에서 내려와 동그란 수신 장치를 달자 그 기운은 보다 안정적으로 그들을 감쌌다.
‘이건 신성력이 아니라 인간의 죄업이지.’
공녀는 씁쓸한 기분으로 마왕 ‘기만’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우오오!”
공녀가 말하는 도중 레무르트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울끈불끈한 근육을 더욱 부풀리며 배틀액스를 크게 휘둘렀다.
“효과가 엄청나네요, 교관님! 지금이면 지룡도 때려잡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그래요?”
공녀는 살짝 조바심이 났다. 레무르트는 물론이고 마테스,카디엄, 벨로나, 심지어 클레어까지 기만이 가진 신성한 하얀색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공녀만이 기존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가씨?”
이상을 눈치 챈 벨로나에게 공녀가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자 기사들은 일단 공녀를 뒤쪽으로 보냈다.
아무리 공녀가 강하다곤 하지만 성검의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전투에 내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공녀는 안 나오는 건가?”
날개달린 마족의 말에 마테스가 앞으로 나섰다.
“싸울 때는 ‘대장’이 제일 나중에 나서는 법이지. 어때. 우리의 방식대로 싸우는 것은?”
“호오. 흥미롭군. 어떤 식으로 싸울 테지?”
마테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순서를 정했다. 레무르트가 제일 먼저 나서게 되었다.
“1대 1로 붙어서, 이긴 자가 연속해서 그 다음 순서와 싸운다. 가장 마지막인 대장이 잡히는 쪽이 진다.”
“잘하면 한 명이 전체를 이길 수도 있는 방식이군. 좋다. 대장이 가장 강력해야겠네. 그럼 내가 대장인걸로.”
날개달린 용인의 말에 비늘 덮인 용인이 불만을 표했다.
[어이, 케톤. 네가 제일 똑똑한 건 인정하지만 제일 강한 건 아니지.]
[조용히 해. 케톤이 대장인 건 맞잖아. 어차피 우리 중 누가 제일 강한지는 의미가 없어.]
한 동안 언쟁을 하던 용인들도 순서를 정했는지 꼬리만 달린 여성체가 제일 먼저 나왔다.
“잘 부탁해, 도끼씨.”
“레무르트다.”
“도끼로 충분하잖아~”
거의 공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 용인이었다. 제법 발랄하고 친근하게 구는 그녀를 보면서도 레무르트는 방심하지 않았다. 방금 날개달린 녀석의 공격을 못 봤다면 적당히 봐주면서 싸웠을지도 몰랐다.
레무르트가 배틀액스에 오러를 불어넣으며 빛 속으로 들어왔다. 용인은 품에서단도 두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아까 공녀가 했던 것처럼 무기를 서로 부딪쳤다.
“내 이름은 메르실라. 네 목숨을 거두어줄게.”
“피차일반이다.”
잠시 서로를 탐색하던 둘은 천천히 서로를향해 접근하더니 이내 메르실라가 크게 발을 디디고 레무르트에게 단도를 내지르며 결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