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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7 (60/82)



〈 60화 〉제 9 장. 남부전선 이상 없다 - 7

60 -

공녀는 나란히 서있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치유의 마력을 쏟아 부었지만 자잘한 상처가 남은 레무르트, 특수한 마석을 깨서 일시적으로 힘을 끌어올린 상태로 기절해서 기운이 다 빠진 카디엄, 한쪽 팔을 살살 쓰다듬고 있는 벨로나.
그리고 멀쩡한 마테스.

공녀는 시선을 뒤로 돌려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용인들을 보았다.
대부분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사망자도 있었다.
검은 기운마저 모두 소모한 그들은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저대로 두면 저들 중 또 다른 사망자가 나올 것이다.

공녀는 잠시 갈등했다.
어찌 보면 저들도 이 세상의 죄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나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적을 함부로 살려서 돌려보냈다가 저들에 의해 아군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공녀는 자신을 용서할  없을 것이다.
공녀는 그냥 용인들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자, 돌아가죠.”

“네!”

공녀의 말에 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고, 그들은 돌아서서 아이언골렘 근처에 모여 있던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공녀는 마지막까지 용인들을 지켜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가 걸음을 한 발짝 뗀 순간,

“!!!”

무시무시한 마력의 흐름을 느껴져, 공녀는 무기를 빼들었다.
홀스터에 있던 탄창을 손으로 쳐올려 두 자루의 총에 장착한 공녀는 압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총구를 향했다.
별이 흩뿌려져있는 어두운 밤하늘 쪽이었다.

마력의 흐름 때문에 대기의 흐름마저 바뀌어버리는 광경을 목도하고 소름이 돋은 공녀는 지상의 용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몸을 땅에 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추고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는 인간이든, 마족이든, 동물이든 대부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용인을 지배하는 자가 온다.

쿠웅-

마치 운석이 충돌한 것처럼 땅이 움푹 파였다. 구름처럼 피어난 흙먼지는 이내 거친 마력의 흐름에 의해 흩어졌다.

클레어는 아이언골렘의 조명을 다시 켰다. 잠시 방황하던 조명이 무언가를 포착했고, 그곳에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은 검은 옷의 인간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

재빨리 공녀의 곁으로 달려온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옷과 로브를 걸친 장신의 사내는 용인들과 닮은 샛노란 홍채로 공녀를 쳐다보았다.

“그대가 마왕공녀인 모양이군.”

상상 이상으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용인들이 조금씩 떠는 것이 보였다.
공녀는 마른침을 삼킨 뒤 앞으로 나섰다. 벨로나가 옆에 따라붙으려 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다음 두어 걸음 더 전진한 공녀가 입을 열었다.

“마왕은 아니지만 공녀는 맞아요. 아리에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공녀가 가볍게 목례하자 인간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이 시대의 그대가 가진 이름이로군. 아리에라. 좋은 울림이다. 헌데 제즈릭이라 하면  제즈릭인가?”

검은 인간이 분열의 지식을 가진 공녀조차 모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녀는 그에게서 모종의 정보를 얻을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요. 제 가문을 아시나요?”

검은 인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말에 모두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말을 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알다마다. 마신을 모시는 일곱 제사장 가문 중 하나, 제즈릭 가문이라 하면 예전부터  유명했지.”

사내는  이상 인간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리자드맨이나 용인조차 아닌 듯 그의 몸집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새 아이언골렘만큼이나 커진 그를 보고 놀란 공녀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검은색의 무언가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오랜만에 보는 과거의 인연이 또 다른 과거의 인연의 후손의 모습을 하고 있구나. 정말 흥미로워. 근 천년 동안의 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구나!]”

늪지의 지배자, 블랙드래곤 세트라무스가 천년 만에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트라무스는 반 바퀴 돌아 용인들의 옆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겁먹은 용인들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있었고, 대강 지혈한 상처부위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세트라무스는 혀를 찼다.

“[네놈들이 다섯 명이서만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 어리석은 놈들.  정도 실력으로 마왕공녀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잘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세트라무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녀는 그가 용의 숨결로 용인들을 전부 태울까봐 걱정했지만, 세트라무스는 검은 기운을 머금은 숨결을 뱉어냈다.
용인들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돌아가서 혼날 준비나 해라.]”

기운을 차린 그들은 허겁지겁 돌아갈 채비를 차렸고, 세트라무스가 고갯짓을 하자 재차 절을  다음 쏜살같이 늪지 쪽으로 달려갔다.

세트라무스는 남겨진 케톤의 시신을 마치 담뱃불 끄는 수준의 가벼운 입김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매캐한 시체 타는 냄새가 났다.

“[앞으로 늪의 일족이 너희 평야의 일족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트라무스의 말에 공녀를 비롯한 기사들은 엄청나게 놀라고 말았다.
적 세력의 수장이 직접 나서서 종전이나 휴전을 선언한 것이었다.

“정말인가요?”

“[그렇다. 오랜만에 그대를 만나서 이것저것 들었고, 우리가 감당할 죄업도 상당히 많이 갚았다. 이 정도면 그분께서도 만족하시겠지.]”

세트라무스의 말에 공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좋았지만 그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저를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말씀도…….”

“[아, 그렇군. 그대는 아직 자신이 어떤 자인지 모르겠군. 크큭. 일이 점점 더 재밌어지겠어.]”

세트라무스는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큭큭대며 웃던 그는 이내 머리를 낮추고 공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분께서 강림하시는 날까지 많이 강해져라. 그리고 내 아이들이 그대의 종족에 대해 일으킨 전쟁은 훗날의 상처를 미리 받아내는 일이니 너무 언짢아하지 마라. 그대들보다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으니.]”

늪지의 마족들과의 전쟁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떠올리며 마테스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드래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초대마왕이 강림할 때 감당해야하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풀어낸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간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가족, 후손들이 고스란히  고통을 받았겠지.’

어찌 보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전쟁이었다.
마테스는 조용히 그들을 위해기도를 올렸다.

[혹시 저를 그…… 마왕으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면…….]

공녀는 용인의 언어로 세트라무스에게 말했다. 그는 흥미롭다는 말투로 공녀의 뒷말을 짐작해 대답했다.

[아아, 마왕 ‘분열’을 말하는 것인가? 그녀가  안에 있었고, 지금도  일부가 함께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대의 안에 있는 ‘분열’만 보고 그대를 알은 체 한 것은 아니야.]

세트라무스는 드래곤의 얼굴로 미소를 지어냈다. 무시무시한 이빨이 가득 드러났다.

[혹시 그대는 생각해  적이 있는가?]

[네? 어떤 생각 말이죠?]

[‘분열’이 왜 하필 그대의 몸속에 들어왔는지.]

공녀는 5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테르한의 기억이 지배적일 때, 분열은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분열이 ‘차기 마왕’이 될 육체로 들어온 거라고…….]

자세히 설명하려면 테르한의 영혼이 분열과 융합되었던 것이나 정화의 진 따위를 언급해야했지만, 공녀는 자신의 약점이  수 있는 정보들은 숨기기로 했다.
공녀의 대답을 들은 세트라무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분께서 그대의 육체를 차지할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군. 마왕 ‘분열’이라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겠거니 했건만.]

[무엇을 알아본다는 말이신지.]

[아니다. 내가 전부 말해버리면 재미가 없지. 나중에 ‘분열’에게 물어보아라. 어쩌면 그녀가 그대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세트라무스는 날개를 펼쳤다. 공녀가 보았던 제일 덩치가 큰 지룡도 그에 비해서는 어린아이 같은 정도의 크기였다. 공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아까 낮에 검은 지룡이 보이던데요.]

[아, 그거? 나다. 몸이 찌뿌둥해서.]

그제야 전쟁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그 검은 지룡-처럼 보이던 세트라무스-는 공녀로서도 상대하기 버거울  같았으나, 그 정체는 세트라무스 본인이고 그가 직접종전을 선언했다.

긴장이 풀린 공녀는 가만히 서서 날아가는 세트라무스를 지켜보았다.

[나중에 ‘그분’께서 강림하시는 날, 다시 만나도록 하지. 아리에 제즈릭.]

세트라무스는 천천히 선회하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도중에 고도를 낮춰 걸어가던 용인들을 앞다리로 움켜쥐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래저래 부하들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일단락되었으니 우리도 가볼까요?”

공녀가 박수를 한 번 친  기사들에게 명령하자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채비를 차렸다.
공녀가 아이언골렘의 어깨에 올라타자 말 네 필과 골렘이 출발했다.
종전이라는 낭보를 들고서.


“호외요! 호외! 전쟁이 끝났습니다!”

갈란드 시내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이 힘차게 외쳤다.
종전소식에 이미 거리는 축제분위기였다. 도시를 빠져나갔던 친지나 가족들에게 마법우편을 발송하려는 사람들이 우체국으로 몰렸고, 신문을 파는 소년은 그들에게 신문을 제법 많이 팔 수 있었다.

추가로 발행된 신문을 들고 거리로 나선 소년에게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한 소녀가 동전을 건넸다.

“신문 한 부만 주실래요?”

우아한 말투에 아름다운 외모를 한 소녀의 하늘빛 머리가 햇살에 반짝였다. 소년은 얼굴을붉힌 채 재빨리 신문을 건넸다.

“고마워요.”

소녀의 미소에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소녀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던 소년은 그녀의 얼굴을 어디서 많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팔던 신문에 1면에 찍혀있는 얼굴의 주인공이 눈앞의 소녀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제, 제즈릭 공녀님!”

신문을 읽고 있던 공녀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외침에 주위의 이목이 공녀에게로 쏠렸다.
공녀를 알아본 시민들이 공녀를 연호하며 몰려들었다.

“으앗! 잠시만, 잠시만요!”

공녀가 시민들에 의해 헹가래를 당하는 사이 신문이 공녀의 손을 떠났다.

[제 1 면]

「남부 늪지 전쟁 종전. -아리에 제즈릭 공녀가 이끄는 정예기사단이 늪지의 마족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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