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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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력 879년 6월.
남부 늪지 전쟁이 끝난 지 약 세 달이 지났다.
블랙드래곤 세트라무스가 표명한 종전 의사를 황제와 제국 수뇌부가 받아들였고, 그렇게 갈레이시아 대늪지에서 벌어졌던 5년간의 전쟁은 조용히 끝났다.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과거 20대 마왕의 군대와 1년간 싸웠을 때보다도 피해가 적었다. 전후처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경제적인 피해가 컸던 갈란드나, 피난해왔던 리자드맨 등에 대한 지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도를 비롯한 제국 전체에서 세트라무스가 직접 언급한 ‘아리에 제즈릭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블랙드래곤이 직접 보낸 늪지의 마족 정예들과 맞선 제국 기사단과, 그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진 어린 공녀는 이미 유명인이었지만 날로 유명해져갔다.
기사단에서는 공녀를 이미 명예 교관에서 정식 교관으로 추천하는 안건이 통과되었고, 마탑에서는 공녀가 몇 달 전 켄스웰 왕국으로 떠나기 전 발표한 마석에 관한 논문을 학술지에 개제하고 그녀에게 마탑 1종 자격증을 수여했다.
공녀는 무언가를 거절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겸연쩍어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 모든 과정을 비뚜름하게 지켜보던 황자는 용사마왕연구소의 이름으로 공녀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했지만 공녀는 거절했다.
대신, 그녀는 황자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이야. 웬일이야? 맨날 이맘때만 되면 마석연구소에 틀어박혀있던 리에가 놀러가자는 말을 다 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공녀와 아펠의 거처가 되어버린 제3귀빈관의 좁은 응접실에서 황자는 시밀레가 타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황자의 말에 공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자꾸 그러면 올해도 마석연구소에 틀어박힐 거예요.”
“미안, 리에. 좋아서 그런 거 너도 알잖아.”
공녀는 한숨을 쉬고는 황자의 맞은편에 소파에 앉았다. 시밀레가 차를 따라주려고 했으나 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시밀레. 이번 주부터 쉬라니까.”
“아니요, 공녀님. 아직 괜찮아요.”
시밀레는 조금 나온 자신의 배를 살짝 어루만졌고, 공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하빈 경하고 켄스웰 왕국에서 만났었는데.”
“아, 이야기 들었어요. 그이도 공녀님과 만날 줄은 몰랐다고 하던데요.”
시밀레는 아펠과 공녀를 보러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하빈과 몇 년간의 연애 끝에결혼에 성공했고, 현재 그녀와 하빈의 2세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크고 있었다.
“응. 임무 때문에 에팔레니아 산맥의 레인저 지부로 간다던데. 내가 그쪽에 있는지 알고 있었더라고.”
“네. 그렇지 않아도 그이가 그곳에 가기 전에 황녀님하고 같이 공녀님 이야기를 했었어요.”
아펠은 황녀로 추대되었다. 황제의 형의 자식이었으니 명백한 황실의 핏줄이었으며, 용사였기에 인지도도 높아 아펠은 금세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마침 아펠이 기지개를 켜며 위층에서 내려왔다. 과거에 낯가림 심하던 소녀는 어디 갔는지 늘씬한 미녀가 된 아펠은 주말이면 항상 해가 중천에 뜰 때 즈음에 일어났다.
아펠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주중에 기사단 양성소에서 밤늦게까지 훈련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주말동안이라도 몸을 쉬어야했기 때문이었다.
거나하게 하품을 한 아펠은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잠옷차림의 그녀는 황자를 본체만체하며 공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과거 리베리안 황자를 동경하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펠. 요즘 나에 대한 대접이 조금 심하지 않아?”
“오라버니 잘못이지. 저번에 내가 발의한 안건을 무시했잖아.”
“야,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15살에 임관시험은 좀 아니지.”
황자의 말에 아펠이 입술을 삐죽이고는 물끄러미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아펠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고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예외지롱.”
“왜?”
“나는 기사가 아니라 명예 교관이었거든. 임관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었지.”
이제는 정식 교관의 자격이 공녀의 신분증에 새겨져있었다. 덤으로 마탑 1종 자격증도 갖게 되었다. 공녀의 자랑에 아펠이 불만어린 눈으로 황자를 쳐다보았다.
“아리에처럼 능력만 되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활약해야 된다고 생각해.”
“리에는, 예외잖아.”
그것에 대해서는 아펠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세상에 누가 마력각성자이자 오러를 자유자재로 쓰는 기사인 공녀와 같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펠은 자신을 포함한 또래 후보생들의 능력이 결코 선배 기사들에 비해 달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공녀와 딱 붙어서 지내는 벨로나 선배만 해도 17살이 되기 전에 임관했다.
그것을 딱 1년만 앞당겨주면 될 텐데,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사실 능력만 되면 나이는 상관없지. 하지만 임관시험은 녹록치 않아.”
황자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령, 수 년 전 아펠, 네 스승님한테 일어난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다고.”
“스승님…….”
황자의 말에 아펠은 먼 곳을 보는 눈이 되었고, 공녀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황자가 갑자기 테르한의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분열이 내 원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지.’
공녀는 걱정하는 아펠을 향해 과장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시 찻잔을 집어든 공녀의 머릿속에는 당장 마도공학소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황자전하. 그래서 언제 놀러갈 예정인가요?”
“리에 마음대로 해. 생일이 가까우니까 생일을 가족과 보내고 그 다음에 갈 수도 있고, 아예 생일을 휴양지에서 보낼 수도 있지.”
공녀는 잠시 고민했다.
11살의 생일부터 매년 생일은 가족과 보냈었지만, 작년에 어머니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뒤 가족에 대한 아리에의 미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가끔은, 딱 1년 정도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인류의 용사인 황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하던 차에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펠이 투정부리듯 말했다.
“나도 가고 싶다.”
“아펠도 같이 갈래?”
공녀의 제안에 아펠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름에는 기사단 양성소 특훈이 있어서…….”
“특훈? 아, 극기훈련 아직도 하나보네.”
공녀가 반가워하며 말하자 아펠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아리에는 교관으로 갔던 적 있어?”
“아, 아니? 그냥 난 제도에 있었지.”
혹시 자기도 모르게 너무 알은체를 한 게 아닐까 뜨끔했던 공녀는 아펠의 반응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도 기사단 양성소를 드나들다보니 가끔은 테르한의 기억과 아리에의 기억이 혼동되기도 했다.
“하아. 가기 싫다, 특훈. 가고 싶다, 아리에랑 바캉스.”
테이블에 축 늘어진 아펠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공녀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올해 양성소 특훈 장소를 바꾸죠. 황자전하가 저와 놀러가려고 했던 곳으로.”
“……진심이야?”
황자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공녀는 환하게 웃었다.
“네!”
“조용한 곳으로 간다면서.”
“훈련하는 소리는 배경음악 같은 거죠.”
“맛있는 거 많이 먹기로 했잖아? 기사단 생도 애들이 얼마나 많이 먹는데. 너 먹을 것까지 걔네가 다 먹을걸?”
“그 중에 제일 많이 먹는 게 저예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공녀를 보며 한숨을 내쉰 황자는 어느새 기운을 차린 아펠이 공녀와 황자를 번갈아 보며 눈을 빛내는 것을 보았다.
“훈련을 마치고 아리에랑 놀 수 있다면 차~암 좋을 텐데.”
황가는 딸이 귀하니 아펠의 말을 어지간하면 들어주라는 아버지, 황제의 당부가 떠오른 황자는 어쩔 수 없이 공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