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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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양성소의 하루는 빠르다.
아침 6시에 생도들은 이미 훈련복을 착용하고 연병장에 집합해있었다.
분열을 지버트 마을로 데려다주고, 남부전선에 이어 제즈릭 공녀로써 전후처리까지 관여했던지라 수개월동안 제도를 비웠던 공녀는 간만에 양성소를 찾았다.
마도공학소에 먼저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기사단에서 정식 교관의 자리를 주었으므로 곧장 찾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마탑에서도 1종 자격증을 발급받았지만 정식교관 임명만큼 직위가 상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중에 마탑에 따로 찾아가보긴 할 예정이었다.
공녀의 직함은 정식 교관으로 바뀌었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비추고 조언을 해주는 선에서 벗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여러 분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공녀를 한자리에만 붙들어놓는 것은 제국 차원의 손해였기에 기사단, 마도공학소, 마탑 모두 한 걸음씩 양보하기로 합의한지 오래되었다.
시계가 6시 5분을 가리키자 연병장과 양성소 건물 사이의 연단에 장년의 기사가 들어섰다.
양성소 책임자인 길단 경은 연단 옆에 서있는 공녀와 생도들 사이에 있는 아펠을 한 번씩 본 뒤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공녀가 미리 언질해둔대로 여름특별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올해도 여름이 다가온다. 제군들. 여름하면 뭐가 떠오르지?”
생도들은 각자 떠오르는 것들을 외쳤다. 다들 더위와 휴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특정 단어는 피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길단 경은 생도들의 의도를 무시하고 곧장 그 단어를 언급했다.
“그래. 제일 중요한 여름특별훈련이 있지.”
생도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국 각지에서 모인 신입생들은 절망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길단 경이 옆에 서있던 소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보고 금세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정식 교관이 된 아리에 제즈릭입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처음 보는 거죠? 반갑습니다.”
신입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공녀가 만들어낸 마석이나 제품들은 이미 그들에겐 익숙했고, 전쟁에서는 믿기 힘들 정도의 활약상을 보인 기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다.
신입생들의 선망의 눈길로 공녀를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족들과의 전쟁이 시작될 무렵부터 기사단 양성소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의 지원을 받았고, 신입생들 중 3할 이상이 인간족이 아니었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신입생들을 보며 공녀는 커리큘럼에 변화를 주기로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양성소의 명예교관이 된 뒤 5년 동안 4번의 여름을 보냈었는데요. 사실 여름특별훈련은 참가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어디로 가고 어떤 훈련을 받는지는 다 알고 있었어요.”
공녀의 말에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가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언제나 바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 끝난 전쟁에서 기사 전력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었죠. 그리고 저도 올해는 정식교관도 되었고 해서, 여름특별훈련에 참가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훈련과는 조금 다른 커리큘럼을 짜고 있어요.”
생도들은 공녀가 훈련에참가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 공녀는 양성소에 들르는 간극이 길어서 그런지 한 번에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다량의 숙제를 내는 타입이었다.
한마디로 공녀의 가르침은 강도가 셌다.
“올해 여름특별훈련의 장소는 ‘필케아 만’입니다.”
제국 수도 체노스트라는 대륙 북부의 에팔레니아 산맥에서 내려온 큰 강을 끼고 있었고, 그 강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대륙의 동쪽의 펠트라 대양(大洋)이었다.
펠트라 대양에 있는 제국 남동부의 항구도시인 필케아가 위치한 곳이 필케아 만이었다.
기사단 양성소의 생도들은 500명 전후였고, 이정도 인원을 수용하면서도 훈련에 알맞은 곳은 제도 근처에서 찾기 힘들었다.
때문에보통 제국 서부의 케할렌 황무지나 북부 에팔레니아 산맥 인근의 중소도시 등지를 훈련장소로 삼곤 한다.
2주 동안 체력이 왕성한 청소년들이 먹어치우는 식량은 같은 수의 군인들보다 많았으며, 교관 및 생도들을 지원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족히 700명이 넘어가는 인원이었기에 보급 또한 중요했다.
필케아는 제국의 주요 항구도시였으며 항상 물자와 인력이 넘쳐난다. 따라서 물자 보급에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필케아 정도의 항구도시에는 양성소 인원들이 한 번에 머물 수 있을 정도로 큰 호텔도 몇 곳 있었다.
이번에는 공녀의 제안으로 호텔에서 2주 동안 머물며 근처의 바다나 산지에서 훈련을 하게 되었다.
매년 썩 시설이 좋지 않은 숙소나, 심지어 황무지에서 텐트만 쳐놓고 여름특별훈련을 해왔던 생도들은 공녀의 말을 듣고 환호했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좋아하니 뭣도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인 6월 10일부터 21일까지 2주 동안 여름특별훈련을 갈 예정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자세한 일정표를 나눠드릴게요. 혹시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불참하거나 도중에 빠져야하는 인원은 이번 주 금요일까지 사유서를 제출해주세요.”
원래라면 양성소의 운영을 담당하는 교관이 발표해야하는 내용이었지만 이번 특훈 장소 섭외 등은 공녀가 물색했으므로 그녀가 직접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녀가 이번 특훈의 인솔 등을 맡게 되었다.
그만큼 공녀가 양성소 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라서 기사단에서도 그 결정을 환영했다.
물론 공녀가 자잘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표면적인 인솔자이자 후원자였기에 대부분의 일은 평소처럼 다른 교관들과 직원들이 하는 것이었다.
공녀의 일정 발표에 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공녀가 연단에서 내려오고 길단이 다시 연단에 서서 아침 조회를 종료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생도들은 각각 무리를 이루어 여름특훈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듣는 수업에 맞춰 교실로 이동하거나 연병장에서 몸을 풀었다.
신입생들은 1년 동안 총 4번에 걸쳐 양성소에 들어온다. 3월에 들어온 아이들은 벌써 무리를 지어 수업을 받으러 돌아다녔지만, 엊그제 입소한 아이들은 한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0살 내외의 귀여운 신입생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며 미소 짓던 공녀에게 한 무리의 신입생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공녀는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맞이했다. 다른 교관들보다 월등히 어려서 누나뻘인 공녀에게 아이들은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리프레. 교관님이라고 해야지.”
공녀에게 말을 걸었던 수인족-아마도 고양잇과-소녀를 향해 그녀와 똑같이 생긴 다른 소녀가 타이르듯 말했다. 쌍둥이 자매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리프레 양이라고 했죠? 궁금한 게 있나요?”
공녀의 부드러운 태도에 수인족 자매는 안심하며 공녀에게 조그마한 은색 단검을 각자 내밀었다. 성격이 조금 더 어른스러운 소녀가 공녀에게 말했다.
“저희는 세냐르 언니의 동생입니다. 이쪽은 리프레 루이넬, 저는 키리에 루이넬이라고합니다.”
소녀의 말에 공녀는 조금 놀랐다. 세냐르는 블란테 백작가의 가신 가문인 루이넬 자작가의 여식으로 카르나타와 항상 붙어 다니는 수인족 생도였는데, 공녀와 또래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녀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은 언뜻 들은 적이 있었지만 둘 다 양성소 입소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과연 무인가문인 블란테 백작가의 가신 가문 사람이라 할만 했다.
“세냐르 양의 동생인가요? 언니 분하고는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공녀의 말에 자매의 얼굴이 밝아졌다.
평소 언니가 주장하던 공녀와의 친분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그녀들은 내밀었던 단검에 공녀의 사인을 부탁했다.
물의 마력을 압축해 수압커터처럼 사용하여 정교하게 사인을 새긴 공녀는 그것을 자매에게 돌려주었다. 공녀의 마력 다루는 솜씨에 감탄한 자매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마력을 다루는 일은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가르쳐줄 거예요. 여름특훈이 끝난 다음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마탑에서 이루어지니까 자세한 것은 그때 배우도록 하죠.”
공녀는 몇 가지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어느새 공녀 주위로 몰려든 신입생들과 아직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어린 나이의 생도들이그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마력의 발현 및 이동, 무기에 마력을 싣는 법, 무기에 담긴 마력을 오러로 화(化)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 공녀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어느새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 번 가르친다고 전부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면 아무나 다 오러를 쓰고 다닐 것이다.
아직 몸이 성장하지 못하여 마력의 발현이 불안정한 어린 생도들은 쉽게 오러를 발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러는 마력뿐만 아니라 무기를 제 몸처럼 생각하며 다루어야한다. 지금 공녀에게 가르침을 받는 생도들 중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공녀는 연병장에서 체력 단련을 하고 있던 아펠과 합류했고, 자연스럽게 아펠의 무리와 공녀를 따라오던 쌍둥이자매가 마주치게 되었다.
“교관님! 오랜만이에요. 앗, 너희들…….”
공녀 또래의 소녀가 공녀와 쌍둥이를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머리 위에 노란색의 탐스러운 고양잇과의 귀를 달고 있는 세냐르 루이넬이었다.
공녀를 비롯한 아펠, 카르나타와 함께 ‘863년생 라인’을 형성하고 있어 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앗! 교관님! 오늘도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그 근처에 있던 카르나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공녀를 제외하면 또래에서 제일 강한 그는 이제 소년이라고 부르기 힘든 근육질의 청소년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제법 귀염성이 있었지만 블란테변경백의 피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인지 덩치가 제법 컸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까 황자나 황태자도 블란테 변경백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둘 다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카르나타가 근육단련을 열심히 한 결과라 볼 수 있었다.
세냐르는 쌍둥이 자매가 혹시 공녀에게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정작 세냐르가 예전에 파티홀에서 공녀를 마력각성자라고 다소 뜬금없는 추측들을 내세웠던 일도 있었는데, 자신이 저질렀던 일은 까맣게잊은 모양이었다.
“아리에. 오늘은 여기서 계속 있을 거야?”
성검과 비슷한 크기의 가검을 든 아펠이 공녀에게 묻자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후에 공학소에 가봐야 해.”
“간만에 검을 겨루고 싶었는데.”
아펠의 아쉬운 목소리에 공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거 없지. 점심 먹기 전에 잠깐 겨뤄볼까?”
아펠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곧장 자신의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한 아펠은 공녀가 카르나타에게 양손검 모양의 가검을 빌릴 때까지 기다렸다.
“오! 교관님의 검술 시범은 흔히 볼 수 없는데 말입니다.”
공녀와 아펠의 대련은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슬슬 점심 식사시간이 다가왔지만 이 장소를 떠나는 이들은 없었다.
공녀는 그 사이에 어떻게 하면 검술 교육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펠이 바람의 마력을 머금고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마석의 도움 없이도 헤이스트에 크게 뒤지지 않는 속도를 내는 아펠을 맞아 공녀 역시 마력을 끌어냈다.
까앙-
가검의 무딘 검날이 맞부딪히며 낮은 울림을 자아냈다. 신입생들의 눈으로는 공녀와 아펠의 공방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공녀와 아펠은 한동안 이기려는 검술이 아닌 대련을 위한 검술을 펼쳤다. 주로 아펠이 정석적인 공격을 하면 그 공격루트에 걸맞은 방어법과 그에 이어지는 반격을 공녀가 선보였다.
신입생들의 눈이 어지러워질 때 즈음 공녀는 크게 마력을 일으켜 팔에 땅의 마력을 휘감았다.
캉-
검들이 세게 부딪혔고, 아펠의 검이 날아갔다. 재빨리 뒤로 도약한 아펠은 바람의 마력을 조종해서 날아가던 검을 끌어당겼다.
미리 바람의 마력을 손잡이에 머무르게 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하지만 아펠의 검이 다시 손으로 회수되는 사이에 공녀의 검이 아펠의 목을 겨누었다.
아펠은 약간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항복을 선언했고, 공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짧은 대련이 끝났다.
공녀와 아펠의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 특히 신입생들은 눈을 빛내며 박수를 쳤다.
주위를 향해 가볍게 인사한 공녀는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자, 다들 식사하러 갑시다!”
그렇게 양성소의 오전 수업이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