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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4 (64/82)



〈 64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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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에서 나온 공녀는 잠시 마도공학소를 돌아다녔다.
도중에 연구원들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며 공학소의 중심부로 나아간 공녀는 중앙에 있는 거대한 나무에 다다랐다.

3년 전 공녀와 클레어가 만든 인공 세계수 배양기를 엘프들에게 선물하고 받은 미니 세계수였었다.
주변 지역의 마력을 안정시키기도 했고 나뭇가지나 이파리는 훌륭한 소재가 되기 때문에 식물을 키우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거대하게 키워냈다.

족히 20미터는 되어보였지만 아직  자란 게 아니고, 최대 50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덕분에 마도공학소 중앙광장의 천장은 유난히 높았고 매년 유리로 된 지붕의 높이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세계수의 반경 5미터 정도는 조그마한 정원이 조성되어있어 연구원들의 쉼터로 쓰이곤 했다.
잠시 세계수를 보던 공녀는 땅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웠다.
곱게 갈아서 마석의 보조 재료로  수도 있었지만 수량이 한정적이라 다소 아까운 느낌이 있었다.

공녀는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 시간의 마력을 세심하게 나뭇잎에 쏟아 부었다.
빛 속성의 마력에서 파생된 시간의 마력은 그 사용자들이 희귀하고 배우기도 어려웠다.

마력각성자인 공녀조차 마탑의 여러 시간마법사들을 찾아다니며 몇 년을 배워왔지만 아직 다른 속성의 마력처럼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했다.
반대로말하면 시간의 마력을 다루는 것은 마력에 대한 공녀의 매너리즘을 해소할  있는 길이기도 했다.

아예 벤치에 자리 잡고 나뭇잎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몇몇 연구원들이 아는 체를 하려다가 말고 잠시 공녀를 지켜보다가 지나갔다. 공녀가 연구실이 아닌 곳에서 저렇게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공녀의 손에 들려있던 나뭇잎은 어느새 싱그러운 초록색을 벗어던지고 단풍의 색깔을 띠었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절묘하게 섞여있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부스러지지 않도록 품에서 꺼낸 땅의 마석을 살짝 갈아 표면에 가루를 묻힌 뒤 마력으로 코팅했다.

“완성했다.”

세계수의 나뭇잎으로 책갈피를 만들어낸 공녀는 나뭇잎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손수건으로 감싼 뒤 마력보호막을 걸어두었다. 이제 오러가 깃든 무기가 아니면 책갈피가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공녀는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잠시 쬐고는 나른한 몸을 움직였다. 초여름에 가까운 늦봄의 식곤증은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머리의 마력을 회전시키며 정신을 맑게 한 공녀는 마석연구소로 찾아갔다. 클레어는  사이 출장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석연구원님! 잠시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무슨 마석인데요?”

연구원들과 한참동안 마석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던 공녀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즈음 연구소를 나왔다.
다시 기사단 양성소를 찾은 공녀의 주위로 생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교관님! 오러 유지하는 비법 알려주세요.”

“발현이 우선이죠? 전 아직 오러 발현이 어려운데…….”

이번에는 생도들에게 오러에 대한 요령을 알려주던 공녀는 일과시간이 끝나자 칼같이 교육을 끝냈다.

“자, 오늘 배운 것은 잊지 않도록 하시고. 해산합시다.”

공녀의 말에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몸짓으로 검을 내려놓은 생도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식당으로 향했다. 공녀 역시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렸다.

“아리에! 와 있었어?”

교실동에서 나온 아펠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 옆에 있던 세냐르와 카르나타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공녀는 아펠과 팔짱을 끼고 양성소 밖으로 나섰다.

공녀가 플라잉 보드를 타자 아펠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보드에 몸을 실었다. 원래 1인승이었던 보드를 2인승으로 개조한  공녀는 종종 아펠을 태우고 다니곤 했다.

“오랜만에 만주크 레스토랑 어때?”

“글쎄. 거긴 너무 기름져서. 아, 아펠은 땀 많이 흘렸을 테니 그쪽이 나으려나.”

공녀의 말에 아펠이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자신의 몸의 냄새를 맡았다.
클린 마법으로 완벽히 몸을 씻은 아펠의 몸에서 냄새가 날 리가 없었었고, 그 모습을 본 공녀는 살짝 웃었다.

“만주크로 간다?”

“응.”

황녀와 공녀를 태운 보드가 제도의 거리를 질주했다.

“아, 배불러.”

“간만에 잔뜩 먹었네.”

공녀야 마력각성자로 체내의 에너지원을 마력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분열에게 전수받아서 음식을 많이 먹어댔지만 아펠은 순수하게 신진대사만으로 음식을 소화해냈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펠이 공녀보다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았다. 근골 자체가 공녀보다 우월하기도 했고, 평소 반쯤은 마력에 신체를 의존하는 공녀에 비해 순수하게 육체의 힘을 즐겨 쓰는 아펠이 더 근육을 많이 쓰는 것은 당연했다.

새삼스레 아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공녀는 그녀가 파멸과의 싸움에서 활약을 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대 용사이자 황녀이며 곧 기사단의 일원이 될 아펠은 그만한 상징성과 능력이 있었다.

“돌아갈까?”

공녀의 제안에 아펠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응?”

“다음 주 특별훈련 때 입을 옷은 구해놨어?”

“옷이라니?”

공녀가 가지고 있는 옷은 많았다. 예전에는 자신의 방에 딸려있는 드레스 룸을 썼지만 지금은  하나를 통째로 공녀의 드레스 룸으로 쓰고 있었다.

평소에는 편한 바지와 가죽옷을 주로 입고 다녔지만 공녀 정도 되면 여기저기 참여해야하는 행사가 많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마지못해 억지로 입었던 드레스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새삼스레 옷을 또 살 필요가 있을까. 아펠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공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수영복 말이야.”

“수영복? 그걸 굳이 살 필요가 있어?”

공녀의 말에 아펠은 잠시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아, 이 어린 양을 어찌할까. 오라버니도 참 불쌍하지.”

“황자전하가 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공녀의 어깨를 부여잡은 아펠은 그녀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보드를 천천히 몰며 그녀들이 도착한 곳은 해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대형 백화점이었다.

공녀는 이런 곳에 오는 일이 드물어서 아펠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어느  그녀들 주위에 여성으로 이루어진 호위들이 나타나더니 자연스럽게 경호를 시작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멀찍이 호위하던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솔직히 나랑 아펠 정도면 누가 해코지할 일도 없겠지만.’

한동안 아펠에게 끌려 다니며 자잘한 옷들을 사던 공녀는 마침내 수영복 전문점에 들어왔다.
테르한의 감각으로는 고개를 들기도 힘든 옷들의 향연이 펼쳐졌지만 지금 공녀는 다분히 아리에에 가까웠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옷들 때문이 아니라 저 옷을 입을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자, 아리에. 빨리 골라봐. 음. 아리에는 머리색이 밝으니까 저런 하얀 옷이 어울리겠네.”

아펠이 추천한 옷은 다소 엄한, 좁은 표면적을 가진 수영복이었다. 아리에는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러자 아펠은 물론 호위들마저 나서서 공녀의 수영복을 고르기 시작했다.

“공녀님께선 이 옷이 제일…….”

“아니, 여기서는 반대로 이런 종류로 의외의 매력을…….”

“공녀님은  입어도 귀여울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당연한 거고.”

호위들이 쑥덕대는 것이 전부 들려왔지만 공녀는 모른 체했다. 마음을 비우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제일 중요한건 아리에의 생각이지. 아리에. 이 중에서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아펠과 호위들이 각자 골라온 수영복을 공녀에게 내밀었다. 최대한 노출이 적은 옷을 고르려던 아리에의 눈에 제법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다.

호위 중  사람이 들고 있던 원피스형태에 긴 파레오 스커트가 달려있는 수영복을 집어든 공녀는 곧장 탈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공녀에게 갈채가 쏟아졌다.

아펠과 호위들은 물론 직원들까지 공녀의 모습에 감탄하고있으려니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공녀를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기겁한 공녀는 잽싸게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밖으로 나온 공녀는 방금 입었던 옷을 구입했다.

오늘의 일을 잊어주길 바라며 호위들에게 원하는 옷을 하나씩 선물하기로  공녀에게 찬사가 쏟아졌음은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공녀가 수영복 쇼핑을 했으며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더라는 소문이 조금씩 돌 거란 것은 상상도 못한 공녀는 그  제법 괜찮은 물건들-주로 마도공학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사서 기분 좋게 귀빈관으로 돌아왔다.

“여어. 리에. 늦었네.”

응접실에 있는 황자를 보자마자 텐션이 떨어진 공녀는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펠은 눈치를 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황자가 무어라 하기 전에 짐을 방에 두고 곧장 나온 공녀는 황자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요즘 심심하세요?”

“아니. 엄청 바빠. 다음 주에 리에랑 놀러가는 데 준비할  많거든.”

“여름 특훈하러 가는 건데요.”

황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싫은 표정이었다.
마치 장난감 선물을 받을 줄 알고 포장을 뜯었는데 열어보니 교과서를 받은 어린애와 같은 표정이어서 공녀는 내심 통쾌했다.

“하아. 그래.  항상 그래왔지.”

황자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깊은 한숨과 초연하면서도 메마른 눈으로 공녀를 보던 황자를 보며 공녀는 그가 많이 지쳐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는  없지.’

공녀는 다시 방으로 가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내왔다. 그 안에 들어있던 옷을 살짝 꺼내 보인 공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황자전하. 아니, ‘리안.’”

공녀가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자 황자는 잠시 말을 잊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에?”

“처음 만났던  말했죠? 리안 오빠라고 부르라고. 차마 그렇게까지 부르지는 못하겠어요. 그냥 ‘리안’까지만.”

공녀의 말과 그녀가 꺼내든 옷을 보며 황자는 혼란해진 머리를 애써 정리했다. 목석같던 공녀가 보여준 갑작스런 태도에 황자의 심장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추억을 많이 만들자고.”

공녀가 들고 있는 옷은 그녀가 그다지 입지 않는 타입의 새하얀 원피스였다. 주로 여름에 어디론가 놀러갈 때 입는 옷이었기에 황자는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래. 추억 말이지.”

황자는 침착하게 말을 내뱉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는 간만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맡겨만 줘.”

“기대할게요. 자,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얌전한 축객령에 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귀빈관 밖으로 나왔다.
아리에와 아펠을 놀래주려는 생각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오히려 자신이 아리에에게 홀려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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