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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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공녀 일행은 대합실에서 잠시대기했다.
이미 대부분의 생도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을 인솔할교관들과 황궁에서 파견 나온 인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자는 그들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면서 자리를 비웠다.
아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공녀를 바라보았다.
아펠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낀 공녀가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싸움을 시작했다.
깜빡
방금 막 졸다가 일어나서 눈이 뻑뻑했던 공녀가 먼저 눈을 깜빡였다.
아펠이 씨익 웃으며 공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열차가 슬슬 올 때가 됐네. 나는 미리 가있을게.”
“응. 있다가 봐.”
공녀는 원래 인솔자의 자격으로 온 거라 교관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여야했지만, 사실 신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공녀에게다른 교관들과 같은 일을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신 이번 특훈의 큰 틀을 잡거나 신입 생도들의 인솔을 보조해주기로 한 공녀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10살 내외의 신입 생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공녀가 다가오자 감겨오던 눈을 힘겹게 뜨고는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공녀는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모두들 잠은 잘 잤나요?”
“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보기 좋고 훈훈한 광경이라 할 수 있었지만, 주위에 있던 나이가 조금 찬 생도들은 무언가 벌어질 거라는 확신에 차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쪽을 주시하였다.
간혹 세냐르 같은, 신입의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 생도들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자, 인사도 다 나눴으니.”
공녀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살짝 굽혔던 무릎을 폈다.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지우고 표정을 없앤 공녀는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하였다.
어느새 호루라기까지 입에 문 공녀는 그것을 한 번 세게 불었다.
삐익-
날카로운 소리에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공녀에게로 향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공녀의행동에 신입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여름 특별훈련 기간입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제국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잘 따라오십시오.”
갑작스레 변한 공녀의 태도에 몇몇 생도들은 겁을 먹었다. 하지만 제국 기사단 양성소에 들어올 정도로 무언가를 갖춘 생도들이 대부분이라 그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올해 애들은 빠릿빠릿하니 괜찮네. 작년은 최악이었지.”
“제가 교관님께 듣기로는 76년 기수가 최악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선배.”
“뭐 인마?”
기사단 양성소 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공녀의 ‘신입 기강잡기’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는 3개월마다 들어오는 신입들을 대상으로 기사의 마음가짐과 개인용 맞춤 훈련을 부여하는 일이었는데, 올해는 공녀가 바쁜 관계로 지금에야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쯤은 놀러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대부분의 신입 생도들은 ‘예쁘고 친절한 유명인 누나/언니’ 정도로 인식하던 공녀의 진면목을 목격하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세냐르에게 넌지시 언질을 들었던 쌍둥이자매 리프레, 키리에는 신입생들의 최전열에 서서 동기들을 다독이며 줄을 세웠다.
80여명이 넘는 신입 생도들이 플랫폼 한쪽에 정렬했다. 다들 숨소리조차 죽이고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테르한 시절에 2년 동안 양성소 대표 생도로 지내왔고, 5년 동안 명예교관으로 일하면서 신입들을 보는 안목이 제법 길러졌다.
이번 기수애들은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캐스덤 교관님? 신입들은 5~6량에 태우면 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아리에 교관님.”
공녀와 함께 신입 생도들의 인솔을 맡은 캐스덤이 일정표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신입들은 현재 입소한지 3개월이 지난 이들과 며칠 되지 않은 이들이 섞여있었다.
과연 이들에게 어떤 훈련을 시킬 것인가.
공녀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열차가 도착했다.
“자, 천천히 들어가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세요.”
“네!”
공녀는 일정표를 빠르게 넘기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훑어보았다. 그 사이 생도들이 자리에 앉았고, 캐스덤은 자신이 이곳에 남겠다며 공녀를 앞 칸으로 보냈다.
앞쪽에 교관들이 모여 있나보다 하고 생각한 공녀는 4량으로 이동했다.
아주 익숙한 공녀 또래의 생도들이 모여 있는 곳. 곳곳에서 아는 얼굴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는 와중에 인사를 건네 왔다.
“아리에!”
아펠이 자신을 부르자 공녀는 그쪽으로 이동했다.
아펠의 옆자리에 앉을 생각을 갔으나, 이미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교관님. 안녕하세요.”
세냐르가 고양이귀를 쫑긋거리며 공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녀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일정표를 확인하였다.
“교관들은…… 3량하고 10량?”
공녀의 중얼거림에 아펠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공녀에게 말했다.
“아리에는 2량에 자리가 있을 거야.”
“응? 내 자리를 왜 네가 알아?”
“가보면 알아.”
아펠이 공녀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곧 열차가 출발할 테니 그 전에 자리에 앉아야했다.
3량에서 교관들과 인사를 나누며 2량으로 접어든 공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특별한 개조를 했는지 좌석이 빼곡했던 다른 칸보다 훨씬넓어 보이는 곳이었다.
아마 식당칸을 그대로 가져와서 내부를 바꾼 모양이었다.
몇 개 없는 좌석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서와, 리에.”
황자가 능청스럽게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공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황자의 맞은편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멀찍이 떨어져있는 좌석에는 평소에 자주 보던 황자의 호위나 비서 등이 앉아있었고, 그들은 공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공녀는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리에. 피곤한 모양이네.”
“네. 도착할 때 즈음깨워주세요.”
“10시간 넘게 자려고?”
“음. 식사 때만 깨워주세요.”
“그래.”
황자는 순순히 알겠노라 대답했고, 공녀는 좌석을 뒤로 젖히고 편하게잠들었다.
황자는 잠든 공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저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은 보통 화장을 하곤 했지만 공녀의 얼굴에서는 화장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심심치 않게 다크서클이 드리우기도 하는 저 얼굴이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수수께끼였다.
부하들에게 ‘콩깍지 씌워지셨네요’ 소리까지 들었지만 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귀여웠으니 예쁘게 자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재미있는 연구대상이었고, 그 이후에는 유능한 인재였다.호기심이 관심으로 변할 무렵 공녀는 더 이상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롯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녀는 다방면에 관여했고, 모든 이들이 찬사를 보낼 성과를 보였다. 마력각성자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큰 자취를 남기곤 한다던데, 공녀를 보면 그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고른 숨을 내뱉는 공녀의 긴 속눈썹 속에 가려진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를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황자 역시 눈을 감았다.
꿈을 꾸지 못하는 황자의 잠은 암전(暗轉)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 어느 순간 일어난다.
출발할 때에 막 뜨고 있던 해가 하늘의 중천에 걸렸다. 커튼이 쳐진 창밖이 제법 밝아황자는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공녀가 눈을 뜨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아펠이 공녀의 팔짱을 끼고 어깨를 기댄 채 잠들어있는 것도 보였다.
“아펠은 또 언제 왔대.”
“눈 뜨니까 있었어요.”
“팔짱까지 끼고 있는데 몰랐어? 리에는 그렇게 감각이 뛰어나면서 예전부터 잘 때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네.”
공녀가 반쯤 뜬 눈을 황자에게로 향하며 미소를 지었다.
“잘 자는 것은 미덕이니까요.”
“응. 그렇지.”
황자와 공녀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승무원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 시간은 8시를 훌쩍 넘긴 상태였고 배가 고팠던 그들에게 만찬에 가까운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도들은 식당 칸에서 먹던가? 인원이 많아서 나중에 먹게 되면 배고플 텐데.”
공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자 잠에서 깬 아펠이 고개를 저었다.
“각자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게 되어있어. 식당 칸은 교관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서 먹고 있고.”
“아펠. 너 혹시 도시락 먹기 싫어서 여기 온 거야?”
“글쎄? 아, 이거 맛있겠다.”
아펠이 반찬을 날름 집어먹자 공녀는 질세라 포크를 들었다.
공녀와 아펠의 전투식사가 이어지는 와중에 황자는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열차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중간에 두 개의 도시를 지나면서 점심을 밖에서 먹기도 하고 생도들이 집합시간을 조금 어겨 혼나거나 하면서 마침내 필케아에 도착하였다.
미리 마련된 대형 마석차가 몇 십대 정도 대기하고 있었다. 연료로 마석을 사용해야했지만 크기도 크고 말을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점점 마차의 대체품으로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그곳에 몸을 실은 생도들이 출발하고 황자와 공녀, 아펠은 개중에 제일 고급스러운 마석차에 올라탔다.
“아직까지는 말이 더 빠르고 연료로 쓰이는 마석이 약간 비싸지만 조만간 이 마석차가 이동수단의 대표주자로 떠오를 거예요.”
마석차 개발의 핵심인원인 공녀는 뿌듯한 마음으로 차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공녀가 담당했던 부분은 연료로 사용되는 마석과 그것을 사용하는 엔진이었는데,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효율 높은 연료와 성능 좋은 엔진을 만들어 시제품의 정식 제품화에 제법 공헌을 했다.
“그리고, 마왕과의 전쟁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거고요.”
공녀의 말에 황자가 새삼스레 차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람 수십 명은 거뜬하게 운반할 수 있으며 생물인 말과 달리 관리도 제법 수월할 것이다.
전장에서 두고 간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되찾아 쓸 수도 있고, 적들에게 노획되어도 이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연료를 생산하고 통제하는 곳은 이쪽이었기에.
“남부 전장에서 보셨죠? 클레어가 소개한 군용모델. 앞으로는 그쪽의 개발에 주력할 예정이에요. 마왕군을 상대하는 것은 기사보다는 군대니까요.”
남부 전장을 기사 몇 명만 이끌고 끝내버린 공녀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황자 역시 군대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기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마족이 수백, 수천씩 몰려오면 당해낼 수 없었다.
그 강인한 마테스조차 날아다니는 마족들이 습격한 날 10명 정도를 연달아 상대한 뒤 부상을 입지 않았던가.
“리에는 역시 마왕을 상대하는 데에 관심이 많구나.”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공녀는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파멸을 물리칠 때까지 공녀의 관심은 오로지 마왕의 것이었다. 황자는 그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는 마석차가 대량으로 다니기에는 길이 넓지 않았고 마차나 보행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기사단 양성소 일원들은 기차역에서 시의 외곽에 위치한 큰 리조트형 호텔까지 직접 이동했다.
각자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해변에 모인 생도들은 푸른 바다를 보며 당장이라도 훈련복을 벗어던지고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그 마음을 이해한 공녀는 신입들을 인솔하여 파도가 발목을 간질이는 곳까지 내려왔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싱긋 웃으며 선글라스를 꺼내들었다. 아이들의 눈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저기 보이는 깃발까지 선착순 10명. 시작.”
생도들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캐스덤 교관이 깃발 옆에 서있었다. 생도들은 앞 다퉈 깃발을 향해 뛰어갔다.
바닷물에 절어 푹푹 빠지는 곳을 벗어나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오니 맨발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모래가 그들을 반겼다. 물에 젖을까봐 신발을 벗고 온 아이들이 울상을 지었다.
공녀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체력을 다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시기였다.
선착순을 몇 번 시킨 뒤 마력의 운용법과 속성의 부여를 가르쳐주기로 한 공녀는 주변의 2년차 이상의 생도들이 자신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여름 특별훈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