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7 (67/82)



〈 67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7


- 67 -

“푸하!”

“으으으…….”

사방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 열이 오른 몸을 식히는 사람부터 바닥에 누워버린 사람들까지.
공녀가 시작부터 신입들을 빡세게 훈련시키자 자극을 받은 다른 교관들도 생도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켜댔다.

가뜩이나 운신이 어려운 모래사장에서 마력의 사용을 제한한 채 수 킬로미터를 달린 생도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달리던 연병장이 얼마나 평탄하고 잘 닦여진 곳이었는지 체감했다.
이대로 모래사장에 쓰러져 잠들고 싶은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수년간의 훈련으로 다져진 기초체력은 생도들을 쉽게 쓰러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너희의 적들은 이보다 더 험한 곳에서 더  거리를 추격하여 너희들을 노릴 것이다!”

교관들이 주위에 배치되어있던 무기 상자에서 무기를 꺼내 생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생도들은 무기를   비척거리며 일어나 자신의 파트너들을 찾아갔다.
이곳에 오지 못한 이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보통 파트너는 4~5명 정도를 두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조가 완성되었다.

“대련 시작!”

사방에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방금까지 다 죽어가던 이들은 다 어디 갔는지 무기를 든 그들은 흉흉한 기세로 무시무시한 공방을 이어갔다.

생도들에게 간단한 마력 조작법을 가르쳐주던 공녀는 저도 모르게 대련중인 고학년 생도들을 지켜보았다.
현재 공녀는 양성소에서 오러와 마력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으므로 개중에 뛰어난 마력 운용법을 보이는 이들을 특히나 눈여겨보았다.

지금 공녀의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은 ‘후대’이다. 사실상 파멸과 그 군세와는 직접 싸울 일이 없는 아이들.
상황이 정말 심각해지거나 전쟁이 길어지면 이 아이들마저 전장으로 끌려가야할지도 모르겠지만 공녀는 그런 일이 오지 않도록  생각이었다.

이 아이들은 파멸을 물리친 후 제국을 이끌어갈 기사단의 일원이 될 것이며, ‘얼마 남지 않을지도 모르는’ 선배들의 빈자리를 메꾸어야 할 인원들이었다.

그래서 공녀는 초반 분위기를 잡는 용도로만 신입들을 적당히 굴렸다.
실질적으로 훈련이 필요한 것은 현재 공녀의 또래나 바로 아래인 14살까지가 한계였다.
앞으로 4~5년 안에 파멸이 등장할 것이므로 그때까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는 나이대의 아이들은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한창 뛰어다니고 살벌하게 무기를 휘두를 때 13살 이하의 생도들은 커다란 천막 안에서 공녀의 강의를 들었다.
250여명의 생도들이 공녀의 설명을 들으며몸속의 마력을 이리저리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마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기에 성공한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미 5년 전부터 마법의 교육이 시들해졌으므로 마법을 익힌 아이들은 많지 않아서 마력에 익숙한 이들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었다.
하지만마법을 사용해보거나  효과를 느껴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기에 공녀는 옆에 서있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부탁드려요.”

공녀는 대외적으로 마법을 쓸  없었다.
공녀가 미리 협조를 구해놓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생도들에게 마법의 효과를 체험시켜주었다.

마탑과 기사단의 라이벌 관계는 초대마왕을 물리칠 때까지 잠시 접어두기로 했던 터라 마탑에서도 기꺼이 마법사들을 파견해주었다.

미리 계획되어있는 대로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헤이스트, 스트렝스 등의 신체강화 마법을 걸고 성능을 체감해보기도 했고, 인위적으로 몸속에 있는 마력을 외부에서 조작하여 마력을 움직이는 느낌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공녀는 마른 목을 축이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긴 여름의 태양마저 바다의 반대편인 평야 너머로 지고 있었고, 바다에는 점차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한동안 어두워진 바다와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을 바라보며 공녀는 야트막한 모래언덕에 앉았다.
그녀의 발 아래쪽 해변에서는 수백 명의 생도들이 저녁식사를 빙자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첫날부터 힘든 훈련을 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황자가 직접 쉐프들을 초빙해 고급스러운 음식과 바비큐를 대접한 것이었다.

“맛있겠네.”

공녀는 무릎을 세운  양 팔과 턱을  위에 얹고 소란스러운 식사를 지켜보았다.
아직 벌어지지도않은 파멸과의 전투에서 후배들의 희생을 상정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어쩐지 무서워져서, 아리에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리에?”

익숙한 목소리에 공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자가 한 손에 꼬치를 들고 공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공녀는 힘없이 손을 살짝 들었다가 내리고는 다시 고개를 팔에 파묻었다.
호위기사인 케일튼 경만 대동한 황자가 공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먹을래?”

황자가 내민 꼬치를 물끄러미 보던 공녀는 그것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이 와중에 배가 고파지는 것은 그녀가 아마 마력각성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녀는 꼬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요.”

황자는 우울해보이는 공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전까지만 해도 신입들을 험하게 굴리던 소녀가 갑자기 기분이 쳐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니 자신이 할 일은 하나, 공녀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여긴 별이 잘 보이네.”

“그러게요. 제도는 밤에도 밝아서 그런지 별이  안보이던데.”

밤에도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제도에서는 어지간히 밝은 별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외곽에 있는 마도공학소의, 유리로 된 천장이 있는 중앙광장이나 쓸데없이 높은 마탑 꼭대기정도까지 간다면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볼 수 있었지만 평상시에 별무리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바다가 있는 필케아 만. 괜히 관광명소가 아닌지 하늘에 빼곡한 별들이 바다에 비쳐 잔잔하게 일렁이며 신비로운 경관을 자아냈다.

공녀와 황자는 아무 말 없이 그 경관을 지켜보았다.

해변에 가득했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이튿날.

기사단 양성소의 아침은 빠르다. 그곳이 설령 특훈 장소일지라도.
아침 6시에 이미 생도들은 해변에 정렬해있었다. 훈련복은 개인당 여러 벌을 갖고 왔을 테지만, 몇몇 생도들은 소금물에 절은 훈련복을 그대로 입고 나오기도 했다.

어차피 오늘은 시작부터 바다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공녀는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어제는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져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는 바람에 배가 아주 많이 고팠다.
아침식사는 7시 이후에 제공될 예정이었지만 그때까지 참을 수 없었던 공녀는 새벽같이 시내에 나가 군것질거리들을 사왔다.

교관들이 몇 가지 지시를 하자 생도들이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곧 열을 갖추어 바다로 들어갔다.
필케아만은 저 멀리 지어져있는 제방까지는 수심이 깊지 않았으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수영을 못하는 생도들도 안전하게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여름이었지만 새벽의 공기는 제법 차다. 게다가 바닷물도 따뜻하지는 않아서 생도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습을 본 공녀는 바다에  발 들어갔다.

“불의 마력을 체내에 순환시켜볼까요?”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생도들은 체내의 마력에 불의 속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곧 안정을 되찾고 바다 속에서 움직이며 특훈을 시작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생도들이 많고 대부분 속성을 부여할 줄 안다는 것은 현재 양성소 생도들이 기사단 선배들보다 뛰어난  중에 하나였다.
이는 공녀가 도입한 마력 관련 커리큘럼의 시간이 점점 늘어난 결과였다.

물론 그만큼 강화마법에 대한 것은 완전히 배제해버렸고, 기초체력 단련 등의 시간이 줄어드는 리스크는 있었다.
하지만 리스크 없는 성과가 어디 있으랴.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공녀가 목표로 하는 것은 최대한 파멸과 그 군세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 수가 많을수록 파멸을 막을  있는 확률과 그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하여 공녀는 기사들의 보조마법을 대체할 수 있는 덧갑옷과 마석을 개발했고, 그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쓸 체력을 온존시키기 위해 마석차를 서둘러 상용화시켰다.

그리고 기사단 생도들에게는 오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사실상 기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였으니까.

공녀는 계속해서 각종 마력을 다루는 연습을 시켰다.
제도에서는 물속에서 훈련하기가 힘들었기에 이번 기회에 수중전을 상정한 모의전까지 준비해놓았다.
오늘은 정신없이 바쁘리라고 생각하며 공녀는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이튿날 밤.

오늘은 든든하게 저녁을 먹은 공녀는 아펠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다.
기사단 임관 시험을 볼 수 있는 나이가 아직 1년 반 넘게 남은 아펠은 불만을 성토하고 있었고, 공녀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진짜 능력이 있으면 아리에처럼. 응? 막 교관도 시켜주고 그래야하는데 말이야.”

공녀는 아펠이 기사단에서 지내더니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테르한이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숨겨진 성격을 알 수 있었기에 재미있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그래서…… 아.”

아펠이 무언가를 보고 멈칫하자 공녀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황자가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다.

“리에. 아펠.”

“오라버니.”

아펠은 어쩐지 둘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갑자기 내일 훈련의 준비를 해야 된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공녀는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황자를 보고는 여기로 오기 전에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어제는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아서 딱히 추억이랄 게 없었다.
오늘에야말로 벌충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말이 안 나오리라.

“리안.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황자는 공녀의 제안에 잠시 턱을 짚고 생각에 빠졌다.
어제는 환상적인 풍경도 감상하고 감상적인 리에도 볼  있어서 제법 만족스러웠는데 오늘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돌아왔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 시즌이 아니라서 그런지 관광명소인 이곳도 딱히 둘러볼만한 데가 없었다.
시내까지 나가면 무언가 있을까 싶어서 부하들을 시켜 조사를 보냈었지만 어린 리에가 밤중에 놀러 다닐만한 곳은 거의 없었다.

황자는 결국 자신이 마련한 곳으로 리에를 안내했다.
어제 공녀와 황자가 있던 야트막한 모래언덕에서 조금 뒤쪽에 선베드가 두 개 놓여있었다.
공녀가 눈으로 묻자 황자는 한쪽을 가리켰다.

군것질거리와 음료가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본 공녀는 행복한 기분으로 그것들을 집어 들고 선베드에 누웠다.
황자 역시 옆에 놓여있던 선베드에 누웠다.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과 호위 기사들이 물러났다.

둘은 오늘도 말없이 하늘과 바다를 보았다. 쏟아질  같은 수많은 별들이 마력의 우주를 건너 보내온 빛이 해수면에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왔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공녀의 심신을 안정시켰다.

 거대한 우주적 흐름에 비하면  대륙의 존망정도는 큰 일이 아니지 않을까.
그래. 차라리 모든 것을 놓고 이대로…….

공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에서 항상 돌리고 있던 마력이 절반 정도 오염되어 끈적끈적한 느낌으로 멈춰가고 있었다.
재빨리 머릿속의 마력을 갈음한 공녀는 선베드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경계하며 사라져가는 불온한 마력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공녀는 빛의 구체를 띄워 그쪽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깊은 수면에 빠져있는 호위 기사들이 널브러져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에버트 보좌관.”

어둠속에서 드러난 그는 황자의 보좌관 중 한 사람.
용마연 소속이기도 한 그는 잠시 놀란 눈으로 공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 원. 공녀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셨기에…….”

에버트가 허리춤에 묶여있던 무언가를 풀더니 뒤집어썼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마름모 모양에 눈동자가 박혀있는 문양의 로브.

“평화로운 종말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마침내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