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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8 (68/82)



〈 68화 〉제 10 장. 짧은 휴식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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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는 잔뜩 낮추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중년의 보좌관 정도는 맨손으로도 제압이 가능했으나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일단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평화로운 종말이라고?”

에버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공녀님. 어차피 초대마왕 ‘파멸’이 강림하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니 구태여 발버둥 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공녀가 에버트의 말을 부정하려던 찰나 뒤쪽에서 예고 없는 공격이 날아왔다.
마력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던 공녀는 몸을 살짝 기울여 날아오는 얼음덩어리를 피했다.

초급 마법인 아이스볼트였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맞았다가는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공녀는 에버트 쪽으로 마력의 방벽을 전개한 뒤 뒤쪽을 돌아보았다.
에버트와 똑같은 로브를 걸치고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정신을 잃은 황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신이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제대로 된 무장 없이  정도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싸우기는 힘들 겁니다.”

에버트는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원피스 차림의 공녀를 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마력을 다루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너무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는군요. 황자를 유혹이라도 셈이었나보죠? 뭐, 별로  필요도 없는 노력을 하는 게 취미신가보네요.”

자신을 욕보이는 에버트의말에 공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공녀 혼자였다면 이 정도 인원의 상대는 어렵지 않았겠으나 에버트의 발치에 있는 기사 두 명과 마법사들 사이의 황자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기사단 양성소의 생도나 교관이 이 사태를 눈치 채기엔 이곳은 숙소에서 제법 먼 곳이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고 알만한 이들은 모두 이곳에 있거나 눈치를 보고 빠진 아펠 정도밖에 없었다.

공녀는 간신히 벗어났지만 호위 기사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을 보면 정신계통의 마법에 능통할 것이었다.
누군가 여기로 접근하다가 인질만 늘어나느니 차라리 아무도 오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원하는  뭐지?”

공녀가 한발 물러나 저자세로 나오자 에버트는 기분이 좋아진 듯 낮게 웃었다.

“제즈릭 공녀. 당신은 참으로 골칫거리란 말이야.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정말로 파멸마저 막아낼  같거든.”

“그렇다면 너희도 마음을 돌려서 나를 응원해주는 편이 좋지 않아?”

공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하자 에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의  행동은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게  뿐이다. 저 무능한 용사와 함께 조용히 살다가 가라.”

에버트가 고갯짓을 하자 뒤쪽에 있던 세 명 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던졌다.
마력의 발현을 억제하는 팔찌였다.

“양 손목에 그것을 차고서 누워라. 다리 하나로 봐주지.”

에버트는 쓰러져있던 기사의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 모습을 본 공녀는 침착하게 팔찌를 착용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에버트가 직접 이곳으로 온다면 황자 주위의 녀석들을 치우고 바로 에버트까지 쓰러트리면 된다.
그 정도는 마력을 쓰지 않고도 가능했다. 공녀는 에버트의 접근을 기다렸다.

하지만 공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에버트는 헛웃음을 짓고는 뒤쪽에 있던 사람에게 검을 던졌다. 검을 받아든 큰 덩치의 가면을 쓴 남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공녀에게 접근했다.

“그 유명하신 제즈릭 공녀는 어떤 목소리로 울까?”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킬킬대며 웃었다. 공녀는 포기한 듯 눈을 감고 기다렸다.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공녀는 슬며시 눈을 뜨더니 자신의 원피스 앞섶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고, 그래서 검을 들어 올린 채 잠깐 멈칫했다.

그것이 그의 패인이었다.



마석으로 되어있던 단추가 조그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검을 든 남자의 오른손을 파괴시켰다.
그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공녀는 옆으로 반 바퀴 구르며 에버트 쪽으로 달려갔다.
공녀는 강한 의지를 담아 분열의 영혼조각을 통해 누군가에게 외쳤다.

[기만!!!]

[오냐.]

황자의 허리춤에 있던 성검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발광했다.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을 본 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렸고, 이쪽을 향하고 있던 에버트 역시 팔을 눈까지 들어올렸다.
황자 쪽을 등지고 있던 공녀는 번쩍이는 성검에게서 자유로웠고, 바람의 마력을 타고 가볍게 날아올라 에버트를 걷어찼다.

“어, 어떻게 마력을……?”

공녀는 족히 수 미터는 날아간 에버트를 멀리서 바람의 마력으로 패대기쳐 기절시켰다.
혹시 몰라서 바닥에 쓰러져있던 기사들을 한 손에 한 명씩 번쩍 들어 언덕 아래의 해변으로 던져버린 공녀는 황자에게 달려갔다.

중간에 자신의 다리를 베려고 한 남자의 낭심을 땅의 마력이 가득한 돌덩이 같은 샌들로 걷어찬 공녀는 황자를 향해 단검을 내지르고 있는 놈과 자신을 향해 마법을 날리려고 준비 중인 놈에게 물과 땅이 섞인 마력탄 두 개를 동시에 날렸다.

퍼억 

물과 땅의 속성을 부여한 진흙탄은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를 제압하는 용도로는 제격이었고, 땅의 속성의 비중을 늘리면 거의 돌덩이 같은 강도를 지니게 된다.

돌덩이에머리를 얻어맞은 두 명은 그대로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력억제용 팔찌는 공녀에게 아무런 제약을 주지 못한다. 마력각성자를 단순히 마력을 좀 더 잘 사용하는 사람으로 착각한 놈들의 실수였다.

애초에 마력각성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공녀는  세간에 알려진 정도로만 마력각성자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그녀 나름대로 숨겨둔 패였다.

팔찌는 스스로 벗을 수 없었기에 공녀는 일단 황자를 깨웠다.
기만에 의해 정신마법을 해주하는  성공한 황자가 놀라며 일어났고, 흐트러진 차림의 공녀를 보고는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분개했다.

황자는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조직의 로브를 쓰고 있는 세 명의 발꿈치와 어깨의 힘줄을 잘라버린 뒤 기절한 에버트의 목을 치려고 하자 공녀는 황자를 말렸다.

“리안. 그럴 가치도 없는 놈들이에요.”

“리에…….”

“일단  팔찌를 채워놓아요.”

공녀가 양 팔을 황자에게 내밀었다. 황자는 에버트의 몸을 뒤져 찾아낸 열쇠를 들고 조심스레 팔찌를 벗겨내었다.
황자는 그 팔찌를 에버트에게 채운  열쇠를 모래바닥에 묻어버렸다.

“미안해, 리에.”

“쉿. 그런 이야기는 일이  끝나고서.”

어른스러운 아리에의 태도에 황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이 잠깐 점멸하자 황자는 성검을 천으로 닦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공녀를 잠시 살펴보다가 얼굴을 붉힌 그는 선베드에 걸쳐두었던 자신의 겉옷을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공녀는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이 심하게 흐트러졌음을 알아차렸다.
마석단추를 뗄 때 한 개가  뜯어지는 바람에 명치까지 앞섶이 벌어져있었다.
공녀는 황자의 겉옷을 입고 옷깃을여몄다.

차림을 정돈한 공녀와 황자는 모래언덕 아래에서 자고 있던 기사들을 깨웠다.
공녀가 그들의 머리에 마력을 주입하고 강제로 회전시키자 신음소리를 흘리며 깨어난 그들은 이미 마무리된 현장을 보고는 바닥에 엎드려 사죄했다.

공녀는 나이 지긋한 선배들의 그런 모습에 괜찮다고 하려했으나 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들도 자신들이 바로 용서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황자는 그들의 가슴에 붙어있던 근위기사의 배지를 손수 회수했다.
영광스러운 황실의 근위기사에서 평기사로 돌아오게 된 그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뒷수습을 했다.

“저들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일단 제도로 돌아가서 심문을 해야겠지.”

“내일 가실건가요?”

공녀의 질문에 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방해꾼도 없겠다, 내일부터는 진짜 리에랑 실컷 놀 거야.”

“그러면 에버트랑 세 사람은…….”

“그 놈들은 필케아의 감옥에 수감시켰다가 나중에 제도로 보내야지.”

“그게 좋겠네요.”

필케아는 커다란 항구도시이며 치안도 좋았다. 그곳의 감옥에 수감시킨다면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공녀는 생각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쉴래?”

“음. 아니요.”

공녀는 나란히 놓인 선베드를 가리켰다.
주변의 핏자국 등은 이미 치워놓았기에 아까 막 도착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날도 더운데 여기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죠.”

공녀의 말에 황자가 씨익 웃었다.
이러한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공녀에게 경외심을 가지게 될  같았다.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느새 그들의 뒤로 교대해 들어온 기사 두 명이 도착해있었다.
공녀는 그들과 악수를 한 번씩 하면서 머리 쪽에 회전하는 마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생소한 감각에 당황한 기사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준 공녀는 선베드에 누워 과자를 집어먹으며 이튿날의 밤을 보냈다.

여전히 밤하늘과 바다에는 별이가득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뒤로는 별다른  없이 흘러 생도들도 교관들도 지친 2주차 수요일.
금요일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같이 이곳을 벗어나야 했으므로사실상 오늘과 내일이 여름특훈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어제부로 기사단 생도들은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여름 특별훈련일정을 마쳤다.

그 말은 즉 오늘과 내일은 자유시간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공녀는 대낮부터 아펠과 함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해도 새하얗던 공녀의 피부는 전체적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선크림을 열심히 발랐는데도 타버린 피부를 보며 공녀는 울상을 지었다.
피부미용 때문이 아니라 그냥 따가워서 그런 것이었다.

아펠은 지난 아흐레간의 훈련에 지칠 대로 지쳤는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공녀와 같은 방을 쓰는 그녀는 사건이 있던 이튿날 밤 돌아온 공녀의 옷차림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자매나 다름없는 그녀가 황자와 만난 뒤 단추가 뜯겨 돌아온 것을 보고 오해를 한 것이었다.

 직후 공녀가 사정을 설명하자 심각한 표정이  아펠은 제도에 전령을 보내 양아버지인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황제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조만간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질 것이라고 한다.

공녀는 아펠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제자였던 어리고 순수하던 그 소녀가 황제를 제 뜻대로 움직이게 될 줄이야.
새삼스레 대견한 눈으로 자고 있는 아펠을 돌아본 공녀는 자신 역시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 며칠 동안 황자와 필케아 곳곳을 누비고 다니느라 피로가 누적된 모양이었다.

‘이제 추억은 많이 쌓았으려나.’

스르륵 내려앉는 눈꺼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한 공녀 역시 아펠을 따라 조용히 잠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자의 명에 의해 그 근처에는 한동안 아무도 접근을 하지 않았고, 고요함만이 잠든 소녀들의 곁을 지켰다.

여름 특훈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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