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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1 (69/82)



〈 69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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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순.

공녀는 제도 체노스트라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너무 얇은 옷을 입는 것은 거리낌이 있어 적당한 셔츠와 바지를 입은 그녀는 바람과 얼음의 마력을 동원하여 대합실을 냉방시키고 있었다.

공녀의 주위가 시원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민들이 눈치를 보며 조금씩 그녀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대여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대뜸 “언니는 얼음의 정령님이야?” 라고 물어보자 공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냉기가 흘러나오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공녀를 알아본 아이의 부모는 깜짝 놀랐지만 공녀는 아이몰래 그들에게 윙크를 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던 사람이 탄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었다.
공녀는 아이에게 인사를 하며 대합실을 나왔다.

공녀는 미리 들었던 대로 3량 앞에 멈춰 섰다. 열차가 서서히 멈추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열차를 내리고 타는 사람들로 플랫폼이 가득 찼다.
그 사이로 흰색과 붉은색이 격자무늬를 이루는 긴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레이아! 이쪽이야!”

공녀가 소리치자 레이아, 분열은 큰 가방을 메고 양손에 보따리를 든 채 공녀에게로 달려왔다.
분열 역시 공녀와 마찬가지로 얼음의 마력을 두르고 있었다.

“레이아. 많이 컸네.”

“물론이지. 내년쯤이면 아리에를 따라잡을 거야.”

분열은 못 본지 겨우 몇 달 만에 열  정도의 소녀가 되어있었다. 이제 공녀와 나란히 서있으면 머리 색깔만 다른 친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누가 따라오지는 않았어?”

“응. 안전한 기차 여행인데다가 지버트 마을은 지금 한창 바쁠 때라서. 말로만 수장인 나는 빠져도  문제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정체를 알고 있잖아. 큰 걱정은 안하지.”

분열이 키워낸 어린 도플갱어들은 무사히 의태하여 마을에 적응 중이었고, 혹시 모를 일에대비해 마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방벽을 전체적으로 보수중이라고 한다.

“다크엘프들의 일부가 마을에 있잖아. 위쪽 산맥에 남은 다크엘프들이 파멸의 군세를 형성하면 마을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미리대비하는 거야.”

“음. 혹시 제국의 도움은 필요할까?”

“이미 조금씩 도움을 받는 중이야.”

그녀들이 대화하는 사이 주위에서 공녀를 알아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공녀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레이아에게 씌웠다.

“오. 그리운 물건이구만.”

분열은 공녀의 안에서 그녀가 기사단 생도들을 마구 굴리던 것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공녀는 분열이 가져온 짐을 양손에 들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분열은 공녀의 뒤를 졸졸 쫓아왔고, 기차역을 나온 그들은 곧장 시내의 큰 호텔로 향했다.

공녀와 쏙 빼닮은 분열을 황궁에 들일 수는 없었기에 황궁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미리 잡아놓은 것이었다. 분열은 자신의 볼일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고 하여 공녀는 넉넉하게 한  치를 결제해놓았다.

머나먼 켄스웰 왕국에서 제도까지 오는 데 기차로만 꼬박 사흘이 걸렸기 때문에 무더운 날씨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분열은 바로 욕실로 향했다.

“혼자 씻을  있어?”

“나를 진짜 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쩐지 분열만 보면 이것저것 챙겨야할  같은 느낌에 공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곧 바람의 마력까지 동원해 뽀송뽀송해진 분열이 욕실에서 나왔다. 공녀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는 머리를 빗겨주었다.

“아펠의 머리를 항상 만지작거리더니, 직접 받아보니까 꽤 능숙하네.”

“그런가?”

공녀는 분열의 머리를 빗어주다가 내친김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녀의 옆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를 땋아주는 공녀를 보며 분열이 말을 툭 내뱉었다.

“여성스러워졌구먼, 그대.”

공녀의 손이 멎었다.
분열의 말투는 과거 공녀의 안쪽에 들어있을 때의 말투였고, 분열이 ‘그대’라고 지칭하는 것은 테르한뿐이었다. 분열은 테르한 쪽에게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녀의 안에 있던 테르한이 분열의 말을 전력으로 부정했다.

“우, 웃기지 마시지? 이건 그냥 머리스타일을 다르게 해서 너랑 내가 최대한 안 닮아 보이게 하려고……!”

“그래, 그래. 미안해, 아리에.”

분열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공녀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마저 땋아주었다.

몸단장이 끝나자 배낭에서 큼지막한 안경을 꺼내 착용한 분열은 공녀가 준비해준 정갈한 사제복 비슷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위에 입고 왔던 긴 로브를 착용한 분열은 시계를 보고는 공녀에게 질문했다.

“전에 물어봤던 장소는 수배해놨어?”

“응. 내일 아침 10시 경, 아침 기도가 끝난 직후부터 1시간이야.”

분열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열은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의 기도실을 혼자 몰래   있도록 부탁했다.

공녀가 신전에 기부라는 이름의 성의를 보이며 부탁하자 금세 예약이 되었지만, 분열의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공녀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왕이 신전에 들어간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일이었구나. 그럼 옷은 내일 입어도 되겠네.”

분열은 로브와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는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공녀 역시 침대에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뒤로 누웠다.

방에서는 한동안 소녀들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몇 분  시계의 알람이 울렸고, 공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오늘은 오전에 공학소 가는 날이라서. 갔다 올게. 점심은 이따가 나가서 먹자.”

“응. 다녀와.”

분열의 잠에 취한 목소리를 들으며 공녀는 밖에서 문을 잠근 뒤 호텔을 나섰다.

클레어와 열띤 토론 끝에 마석차의 엔진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다음 목표로 잡은 공녀는 점심시간이 되자 곧장 마도공학소를 나왔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호텔로 다시 찾아간 공녀는 분열을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을 찾았다.

 안경과 땋은 머리, 독특한 복장 때문인지 분열은 언뜻 보기에는 공녀와 쌍둥이마냥 닮아보이지는 않았다.
공녀도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작은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벨로나가 레이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공녀가 호위 없이 다니는 것은 눈치가 보였기에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벨로나를 당분간 공녀 자신의 호위기사로 직접 지명한 것이었다.

“응. 오랜만이야.”

벨로나는 몇 개월 사이에 부쩍 자란 레이아를 보며 신기해했다. 애초에 처음 봤을 때와 헤어질 때의 며칠 사이에도 순식간에 쑥쑥 자라나서 놀랐던 적이 있었다.
도플갱어의 성장은 그만큼 빠른 모양이었다.

공녀는 벨로나를 포함한 세 명의 식사를 시켰다. 그 주문량이 거의 7~8인분은 되었지만 여기 있는 아가씨들은 전부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다.

공녀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기사라서 기초 대사량이 엄청난 벨로나나 마력각성자에 도플갱어이자 마왕인 분열까지 모두 식사량이 외견을 따라가지 않았다.

잠시 후 풀코스 요리가 나오자 세 사람은아무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귀족적인 태도가 몸에  아리에와 벨로나, 태생이 고귀한 레이아까지 모두들 우아한 자세와 예의로 식사를 시작했지만 도중부터 식탁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소가 되었다.

벨로나의 날아다니는 것 같은 쾌검을 닮은 나이프질과 레이아의 마력에 의해 그녀의 앞에 자동으로 대령되는 고기반찬,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날카로운 포크질로 주요 음식들의 가장 맛있는 부위를 골라먹는 아리에까지.

결국 10인분을 채운 그들은 부른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식당을 나왔다.
무척이나 비싼 레스토랑이었지만 공녀에게는 그다지 큰돈이 아니었다.

분열을 호텔에 다시 데려다준 공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궁 내에서는 호위가 필요 없으므로 벨로나에게 분열의 호위를 부탁한 공녀는 내일의 준비를 했다.
분열에게 준 것과 똑같이 생긴 사제복비슷한 옷을 가까운 옷걸이에 건 뒤 뒤탈이없도록 신전에 바칠 기부금을 챙긴 공녀는 옷을 갈아입고는 연구소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즈릭 공녀님.”

용마연의 분위기는 전에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내부에 마왕의 끄나풀로 추정되는 이름 모를 조직의 첩자가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감사를 받은 상황이었다.

“황자전하는 계신가요?”

“오늘은 본궁에 일이 있어서 그쪽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딱히 황자를 만날 필요는 없었기에 공녀는 그대로 기밀 열람실로 향했다.
내일 분열이 신전에서 무슨 일을 할지는 아직 들은 바가 없었기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록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공녀가 아는 한 이곳에서 신들이 용사나 마왕, 성검 등에 대한 신탁을 내렸다는 기록은 1600여 년 전의 최초이자 최후의 신탁인 ‘20명의 마왕’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간혹 신탁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전부 허위였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신들이 아예 신탁을 내리지 않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저 용사, 마왕, 성검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지만 아예 관계없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곧잘 신탁을 내리곤 하였던 것이다.

공녀는 저녁이 될 때까지 기밀들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기록도 찾을  없었다.
한숨을 쉬며 연구소를 나온 공녀는 귀빈관으로돌아왔다.

“나 왔어.”

얼마  돌아온 아펠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공녀는 아펠과 가볍게 대련을 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세신을 했다. 신을 만나기 전에는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예의였다.
한참을 씻고 나온 공녀는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이 모습으로 살아온 것은 16년이었지만, 5년이기도 했다. 어쩌면 11년과 5년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이미 ‘아리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테르한이 없어진 것은아니었다.
이럴 때면 분열이 자신의 안에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녀라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확답을 내려줄텐데.

분열이 혹시나 내일 일어날 어떤  때문에 영혼의 성장을 이룬다면 아리에와 테르한의 분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공녀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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