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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2 (70/82)



〈 70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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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난 공녀는 벨로나를 호출한 뒤 서둘러 황궁 밖으로 나갔다.

형식상이라지만 외출 시 모든 일정을 보고하도록 되어있는 공녀는 자신의 외출일지에 ‘신전’이라고 적어두었다.
신전에도 미리 말을 해두었고, 공녀가 신전에서 만날 이들이 있었기에 거짓을 적어서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레이아. 잘 잤어?”

“응. 아리에 왔어?”

분열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자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공녀가 땋아주었던 머리가 반쯤 풀려있어 그냥 원래대로 풀어놓은  머리를 정돈해준 공녀는 호텔의 룸서비스를 시켜 일행의 아침을 해결하였다.

분열과 공녀는 사제복 비슷한 옷을 입고  위에 로브를 걸쳤다.
분열이 입고 온 격자무늬 로브는 너무 눈에 띄어서 평범한 회색 로브를 건네준 공녀는 벨로나의 호위를 받으며 분열을 신전으로 데리고 갔다.

입구부터 귀빈대우를 받으며 신전의 깊숙한 곳까지 안내를 받은 공녀는 기도실 앞에 도달했다. 만일에 대비해서 분열은 머리부터 눈까지 살짝 가려주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

“콘실로 대사제님. 신들께서 축복을 내려주시길. 지난밤은 평안하셨나요?”

“신들께서 축복을 내려주시길. 허허.제즈릭 공녀님도 평안하셨는지요. 그런데 이분이 바로?”

공녀는 스스럼없이 분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가슴에 다른 손을 얹은 뒤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예. 어제 말씀 드렸던 외국의 귀인으로, 신을 모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레이아 님입니다.”

분열은 마왕으로써 마신을 모시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분열은 왕과 같은 고귀한 영혼을 지니고 있으므로 대사제마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오오. 그렇군요. 안녕하십니까, 레이아 님. 콘실로라고 합니다.”

제국 내에서 종교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인류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는 마왕과 마족에 대하여 신들은 아무런 신탁을 내려주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지지나 반응도 시큰둥한 편이었다.

그나마 각종 술법과 진을 개발하여 실용적인 마족 퇴치에 나서는 것으로 작게나마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유명인 제즈릭 공녀가 대량의 돈을 기부하면서 신실한외국의 지인을 소개시켜준 것이었다.
대사제는 이 기회에 공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로 했다.

“레이아 님께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콘실로의 말에 분열은 수줍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콘실로 님. 어서 빨리 신들께 기도를 올리고 싶군요.”

마치 성녀라도  것 같은 말에 공녀와 벨로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곧장 표정을 푼 공녀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분열을 기도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벨로나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어줘.”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벨로나가 기도실 밖을 지키고 서있자 문을 닫은 공녀는 분열이 앉을만한 방석을 찾아내어 거대한 신들의 조각상 앞에 깔아주었다.

“방법은 알고 있어?”

공녀는 과거 엘레나가 기도를 드리던것을 떠올려보았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린 다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하는 식으로 꽤나 복잡했다는 것이 기억난다.

“그냥 눈 감고 말 걸어보면 되지 않을까?”

“으응. 일단 마음대로 해봐. 시간도 넉넉한 편이니까.”

원래는 1시간만 빌릴 생각이었지만 이곳은 아침과 저녁 기도만 드리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분열은 공녀가 깔아준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튼  눈을 감았다.
분열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고 조각상 뒤편의 창문에서 경건한 빛이 내리쬐었다.
한참이나  자세로 앉아있던 분열은 몸을 조금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탁 받았어?”

“아니. 다리가 저려서.”

“…….”

다리를 쭉 뻗고 편한 자세를  분열은 신들의 조각상을 구경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주신을 필두로 좌, 우에 각각 세 명의 신들이 정렬해 있었다. 총 일곱 명의 신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조각상에는 조그마한 비밀이 숨어있었다.

분열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각상의 뒤쪽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다른 신들과 달리 혼자서 웅크리고 있는 신이 바닥의 받침대와 융화된  마냥 조각되어있었다.
다른 신들의 발치에서 그들과는 반대편 방향을 보고 있는 ‘마법의 신’. 훗날 지상의 죄업을 등에 지고 마신이  신이었다.

분열은 조그마한 손을 들어 마신의 조각을 쓰다듬었다.
단지 조각상일 뿐인데,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분열의 뒤쪽에  공녀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순간

[[마침내  날이 왔노라.]]

분열과 공녀의 머릿속에 우레와 같은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히 분열은 공녀의 머릿속에 남겨둔 영혼조각 때문인지  소리가 두 배로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대는 우리의 형제이자 세상의 죄를 짊어진 자, 마법을 관장하는 신 ■■■■■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

공녀는 분열에게 내려지는 신탁을 훔쳐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뒤로 물러나려고 하였다.
그녀는 살그머니분열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신탁이 멈췄다.
정확히는 공녀가 분열에게서 손을  순간 신들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리에. 다시 손 얹어봐.”

“어, 왜?”

“빨리!”

분열의 재촉에 공녀는 다시 분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는데? 아, 크흠. 큼.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리하여 그대, ‘결백의 소녀’에게 이 세상의 운명을 맡기노라.]]

중간에 들렸던, 신탁이라고 보기 어려운 말들은 못들은 척 하며 공녀와 분열은 신탁을 곱씹어보았다.

“신님. ‘결백의 소녀’라 하심은?”

[[결백의 소녀여.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거라.]]

“분열 네가 ‘결백의 소녀’인가본데.”

“음. 이건 용마연 기밀 서류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공녀와 분열이 새로운 호칭인 결백의 소녀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또 다른 신탁이 내려왔다.
천둥번개가 치는듯했던 아까와는 달리 대지가 노래하는  같은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결백의 소녀란 그대와 그대. 지금은 나뉘게   사람의 영적인 과거. 지상의 모든 이들이 죄를 지었을 때 유일하게 무죄이며 결백한 한 사람.]]

노래하던 대지가 슬픈 음절을 자아냈다.

[[마법의 신이 사랑한 소녀.]]

순간 분열과 공녀는 아득한 과거의 편린을 엿보았다.
그것은 천육백여  전의 미신과 광기의 시대를 살아가던 한 소녀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

분열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마법의 신의 조각상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젖먹이가 어미의 품을 찾듯 서툰 손놀림으로 조각상을 더듬던 분열은 끝내 무릎을 꿇었다.

오열조차 나오지 않는 이유모를 거대한 슬픔에 잠겨 분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뚝뚝 흘러서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공녀 역시 묘한 슬픔에 사로잡혔지만 분열만큼은 아니었기에 그녀를 다독여줄 정도의 여유는있었다.
공녀는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분열을방석에 앉힌 뒤, 그녀의 심신이 안정될 때까지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공녀의 심박을 들으며 분열은 정신을 차렸다.
마신의 조각이자 진정한 최초의 마왕. 동시에 마신이 사랑했던 소녀의 영혼을 지닌 분열은 또 다른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분열을 제외한, ‘결백의 소녀’의 나머지 영혼의 환생체인 공녀.
지금까지  번의 윤회를 거쳐 공녀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또 다른 자신은 아리에 제즈릭이었다.
공녀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분열은 방금전의 신탁으로 자신과 공녀가 얽히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내었다.
세트라무스의 말마따나 분열과 테르한의 영혼은 차기마왕의 육체로 전이해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둘로 나뉘었던 ‘결백의 소녀’의 영혼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뭉치는 과정에 테르한의 영혼이 휘말려 들어간 셈이었다.

덕분에 영혼의 용량이 커져서 분열과 아리에가 완전히 섞이지 않고 다시 ‘분열’하게 된 것이 조금 우스웠다. 기운을 차린 분열은 공녀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제 완전히 진정하게 된 분열은 다시 신들의 조각상 앞에 섰다.

그녀는 공녀의 손을 잡았다.
몰랐던 전과는 확연히 다른 영혼의 공명이 느껴졌다.
공녀는 분열만큼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분열의 행동으로 짐작할 뿐이었지만 어렴풋이 분열과 공명하는 아리에의 영혼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여야지만 진정한 ‘결백의 소녀’였기에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접촉하고 있어야했다.

“‘결백의 소녀’가 신들께 청원합니다.”

분열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공녀를 보았다. 공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분열은 마침내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 기대되는 말을 꺼냈다.

“지상의 죄업을 희생 없이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신들은 침묵했다. 이 또한 마왕과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까. 분열이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물이 흐르는 느낌의 신탁이 내려왔다.

[[‘결백의 소녀’여. 그대는 지상의 죄를 사하려 하는가?]]

“네.”

분열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마왕으로써 지상에 나올 때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린다 하여도 자신이 죄를 모두 갚은 뒤 파멸이 세상을 파괴시키는 것을 막는다.

비록 분열이 용사 일행에게 일찍 당해서 파멸이 강림하는 시기가 앞당겨지는 바람에 파멸의 강림 자체를 막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컸지만,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희생 없는 평화로운 죄업 갚기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분열이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다시 신탁이 들려왔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대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한 이들의 후예들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겠는가?]]

“……네.”

분열은 과거 자신들의 영혼을 지녔던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신들의 말과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과거, 그리고 그 동안 쌓아왔던 지식을 동원해보면 대략적인 추론은 가능했다.

신들이 사랑하던 소녀가 미신과 광기의 시대에 희생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그 동안의 업보를 물어 신들이 ‘지상 정화’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마법의 신이 그들을 막았다.

누구보다 소녀를 사랑했던 그는 아마 소녀가 살아가던 세계를 파괴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으리라. 혹여나 공녀처럼 환생한 소녀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마법의 신에서 마신으로 전락했고, 신들은 소녀의 영혼의 일부를 마신의 조각과 합쳐서 ‘분열’을 만들어냈다.
마신이 기껏 자신을 희생하면서 지켜낸 지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마신의 힘을 나누고 제어할 고삐 역할을 그녀에게  것이었다.

“제 생각이 맞나요?”

[[놀랍군.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정도로 추론을 하다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공녀뿐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공녀의 손을 꽉  채 분열이 다시   이야기했다.

“그렇다하여도 저는 다시 한 번 청원 드립니다. 저와 아리에가 지상의 모든 이들을 용서한다면, ‘누군가 희생하지 않는 죄업 갚기’는 가능할는지요.”

신들은 길게 침묵하였다. 신들은 여차하면 지상을 초토화시킬 생각을 할 정도로 생각보다 괴팍했다.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신들은 서로간의 회의를 마쳤는지 다시 신탁을 내렸다.

[[희생 없는 죄업 갚기는 불가능하다.]]

천둥 같은 말소리에 분열이 놀란 눈을 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

분열이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기도실의 땅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대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용서’를 선택한 그대들에게 몇 가지 선물을.]]

기도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그것은 금속 재질의 거대한 갑옷이었다.
테르한에게조차 생소한 풀 플레이트 메일. 누가 보아도 신성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문제는 너무 커다란 크기였다.
공녀는  갑옷의 몸통 부분을 어깨에 걸치면 아마 무릎까지 내려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하나는 여기에.]]

갑자기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졌다. 밖이 소란스러워질 무렵 어두운 창 밖에서 갑작스레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공녀와 분열이 놀라서 허둥지둥하고 있자니 창문이 열리고 그 빛이 기도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빛이 내려앉은 곳에는 성검과 비슷한 크기의 검이 놓여있었다.

쿵. 쿵.

“공녀님! 괜찮으신 겁니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공녀가 깜짝 놀라 문을 잠그려 했으나 콘실로 대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벨로나는 뒤쪽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해도 신전 내에서 성직자들이 몰려오는 것을 무력으로 막기는 힘들었다.

성직자들은 공녀와 똑같이 생긴 분열을 보고는 깜짝 놀란  그녀의 뒤쪽에 놓인 검과 갑옷을 보고는 아예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고, 공녀님. 레이아 님. 이것은 대체?”

구름도 끼지 않았고 해도 멀쩡하게 떠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기도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언가 있어 보이는, 신성력을 풀풀 풍기고 있는 검과 갑옷.

공녀와 분열은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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