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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3 (71/82)



〈 71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3

71 -

체노스트라 제국의 황궁 바로 앞에 위치한 신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일주일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사건 당일 오후, 공녀와 함께 신전에서 목격된 분열은 그대로 황궁으로 끌려가 반쯤 강제로 황제와 접견을 해야 했다.

“켄스웰 왕국의 지버트 마을 출신인 레이아라 하옵니다.”

분열은 공녀의 안쪽에 있을 때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예법을 갖춰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의 알현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베일을 뒤집어 쓴 어린 소녀를 보며 대신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분열의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온 공녀가보다 못해 한 마디 하려 했을 때, 황제가 대신들을 물리고 황자를 불러들였다.

대신들이 나가자 분열은 베일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미리 언질을 들은 것인지 황제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분열의 옆에 있는 공녀와 분열을 번갈아 쳐다보며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황자는 분열을 보고는 공녀를 본 뒤 다시 분열을 보았다. 똑같이 생긴 붉은  쌍의 눈이 황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한 황자는 성검에 손을 얹고 잠시 침묵하더니 미소를 띠며 분열에게 인사했다.

“고귀하신 레이디. 황궁에  오셨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황자전하.”

황자와 분열이겉치레 인사를 나눈 뒤 황제가 분열에게 말했다.

“레이아 님. 마침 제즈릭 공녀와 각별한 사이 같으니, 제도에 체류하는 중에는 우리 아펠과 제즈릭 공녀가 같이 살고 있는 제3귀빈관에서 머무시겠소?”

언뜻 들으면 황제가 분열을 배려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황궁에서 구금시키려는 의도가 뻔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분열은 황제의 명을 받아들였고,  사이 호텔에 있던 분열의 짐은 이미 귀빈관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레이아 님은 신전에서의 일을 황자에게 말해주시는 것이 좋겠소. 소상하게 말이지.”

“예. 알겠사옵니다.”

고분고분한 분열의 태도에 황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황제와의 대담을 마친 분열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뒤를 공녀와 황자가 따라붙었다.

분열이 공녀의 안에 들어있던 ‘조언자’였다는 것을 성검을 통해 들은 황자는 그녀의 출신이 지버트 마을이라는 말에 공녀가 올해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동시에 분열의 정체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리에. 나에게 뭐   없어?”

웃는 낯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황자를 살짝 밀쳐낸 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 제가 모든 것을 공유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그래도 이건 꽤나 중요한 사안 같은데. 파멸을 막기 위한.”

황자는 진지한 얼굴로 앞서가는 분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성검의 말에 의하면 공녀와 똑같이 생긴  꼬맹이가 파멸을 막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었다.

“레이아의 존재는 될 수 있으면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아서요. 지금도 입단속을 시켜야할 것 같은데.”

공녀의 말에 황자는 턱을 손에 올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겠지.”

용마연 내부에 일원이 있을 정도로 ‘조직’은 제국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있었다.
레이아에 관한 이야기를 공녀가 전에 했더라면 그들이 레이아를 노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얼마 전 자신과 공녀를 노렸던 것처럼.

“성직자들은 방금 일어난 일은 보고 레이아 님을 아예 성녀처럼 모시려는 기세던데.”

“그건 좀 자제해달라고 부탁해주세요. 원래는 이번 일만 마치고 곧장 돌아가려고 했어요. 지금은 바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됐지만.”

신전에서 벌어진 일이 수습될 때까지 분열이 제도를 벗어나기는 힘들어보였다.
일단 신전에서 옴짝달싹 않고 있는 검과 갑옷의 행선지가 정해져야 잠잠해질 것이었다.

“그래. 그런데 레이아 님.”

분열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황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제즈릭 공녀가 닮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분열은 베일을 살짝 걷어내고 황자를 향해 눈을 흘겼다.
마치 어린 공녀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분열이 애증-황자 개인적인 생각이다-섞인시선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을 본 황자는 조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그대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분열은 황자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성검, 기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검은 미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만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모르는 분열은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황자는 분열의 말에 얼굴에 가득했던 진지함을 털어내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외모를 따라서 의태를 할 정도면 정말 우리 리에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황자의 말에 공녀는 화들짝 놀라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에요, 리안.”

“그렇잖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따라하지는 않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공녀가 화를 낼 지경이 되자 황자는 실실 웃으며 사과하려했지만 분열의 말이 그 흐름을 끊었다.

“물론. 나는아리에를 정말 좋아합니다.”

분열의 말에 황자는 화색을 띠었고, 공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황자가 분열에게 동질감을 느끼려던 찰나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아리에의 이해자이자 영혼의 동반자이죠.”

황자가 표정을 굳혔다.
분열이 한 말의 뜻과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한동안 그녀와 눈싸움을 했다.

“지나친 자신감이군. 리에는 앞으로 살아갈 기간이   텐데, ‘고작 5년’으로 그녀를 전부 이해했다고  수 있겠소?”

황자의 말투가 딱딱하게 바뀌었다. 그의 말에 분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만 자식, 내가 공녀의 안쪽에 있던  까지  불었구나.’

“고작 5년인 것은 그대도 딱히 달라보이지는 않는데. 게다가 나와 아리에는 떼려야 뗄  없는 관계지.”

분열이 공녀에게 다가가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공녀는 자연스레 분열을 받아주면서도 두 사람을 말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글쎄. 그건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지. 나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데.”

황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동안 학습한  있어서 공녀에게 함부로 다가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럼없는 분열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

“동의하는 바야. 앞으로도 나와 아리에는 영혼의 자매이자 동반자로 지내겠지. 영원히.”

분열은 황자를 향해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봐야 귀여운 꼬마 악동의 표정이었지만 황자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공녀를 둘러싼  사람의 신경전에 마침내 공녀가 폭발하고 말았다.

“둘 다 그만.”

화난 것이 분명한 공녀의 태도에 황자와 분열은 헛기침을 하며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어느새 본궁의 출구에 다다랐고, 밖에서 대기하던 벨로나와 황자의 호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아. 베일 써.”

“응.”

분열이 베일을 쓰자 벨로나가 재빨리 접근해 그녀에게 예의 격자무늬 로브를 씌워주었다.
이국적인 차림새를 한 분열은 공녀에게서 떨어져 벨로나와 손을 잡았다.

“벨로나. 레이아 님을 귀빈관으로 모셔다드려.”

분열은 별도의 호출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아마 검과 갑옷에 대해서 조사하다가막히는 일이 있으면 부를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벨로나가 경례를 하며 분열을 데려갔고, 공녀는 황자를 돌아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황자전하.”

“미안해, 리에.”

공녀가 화가 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황자는 재빨리 사과했다.
아무리 공녀의 도플갱어라지만 자신을 견제하는 느낌이 들어서, 황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 대치하고 말았다.
성검마저 한심하다는 듯 황자를 타이를 정도였다.

[방금은 너답지 않았다. 아니, 너무 너다워서 문제였다. 조금은 자중해라.]

‘알고 있어.’

황자가 쓴 입맛을 다시는 사이 공녀는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제 자신의 것이에요. 황자전하나 레이아의 것이 아니라.”

“알았어. 미안해, 리에.”

황자가 거듭 사과하자 공녀는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신전에 가보려고 해. 리에가 협조를 해준다면 레이아……님이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가실 건가요?”

“글쎄. 지금 신전 쪽은 복잡해서. 미리 가있는 조사관들이 오늘 간단한 조사를 하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조사단이 만들어지는데, 리에가 그쪽에 참가를 해주었으면 해.”

“조사단까지 꾸릴 정도인가요?”

“응. 신이 내린 검과 갑옷이잖아?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런 쪽으로는 묵묵부답이었던 신들께서 성물(聖物)을 두 개나 내려주셨는데 그냥 아무나 가져다 쓸 수는 없잖아?”

황자는 말을이어가려다가 주위의 호위기사들을 보고 몸을 낮춰 공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지금 듣기로는 아무도 그 검과 갑옷을 옮길 수 없다고 해.”

신전 기도실의 조각상 앞에 꽂혀있는 검과 그 옆에 놓여있는 거대한 갑옷은 그 어떤 이들이 건드려도, 심지어 장비까지 동원했는데도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신전 측에서는 기도하는 장소를 옮겨야했지만 불평은커녕 오히려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 기회에 신도들을 잔뜩 늘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결백의 소녀인 분열이나내가 들어야 하는 건가?’

검이야 자신의 주무기인 바스타드소드랑 비슷한 크기였으니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을 테지만, 갑옷은 지나치게 컸다. 저걸 입으려면 숲의 거대 마족이나 골렘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것이다.
신들이 인간의 크기를 잘못 알고 있나 하는 다소 불경한 생각을 하던 공녀는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골렘?’

인간 중에 저 갑옷을 입을만한 이가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긴 애매했지만, 자기 자신을 틀림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잠들어있었다.
마도공학소 지하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액체 속에서 5년 동안이나 말이다.

- 분열. 들려?

- 응.  그래?

- 그 갑옷 말인데…….

- 아, 그거. 인간이 너무 입긴 크잖아?

- ……딱 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 마침 나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둘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동시에 단어를 떠올렸다.

- 테르한 -

공녀의 안쪽에서 테르한의 영혼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자세한 것은 크기를 재어보아야 할 테지만 보통 체형에 따라 맞춰 입는  플레이트 갑옷이 만일 테르한의 몸체에 맞춘 것이라면.

- 신들이 테르한, 그대에게 어떤 역할을 준 모양이군.

- 음.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아리에의 영혼과 분리가 되어야 할 텐데.

- 방법은 찾고 있어.

- 서둘러줘, 분열.

알겠어. 아, 이제 귀빈관에 도착했어. 잠시 신경 쓰기 힘드니까 나중에 얘기해.

- 응.

한동안 공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걷기만 하자 황자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공녀는 곧바로 아무  없는 것처럼 살짝 미소를 띠며 마차에 올라탔다.

“전 마도공학소로 가볼게요.”

“그래. 내일 보자.”

황자의 배웅을 받으며 공녀는 황궁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황궁을 나서자 근처의 길가에 있는 신전 앞이 소란스러웠다.
치안대가 시민들에게 질서를 유지하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신물을 구경하러 온 수백 명의 시민들을 통솔하기에는  수가 너무 적었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녀는 로브를 눌러쓰고 보드를 천천히 몰아 샛길로 빠져나갔다.
오후 내내 마도공학소에서 연구를 하며 연구원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낸 공녀에게 클레어가 질문했다.

“아리에. 이젠 성녀님 자리까지 노리는 거?”

“아니야!”

이미 제도 내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일 신문에  다시 자신의 얼굴이 찍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공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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