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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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일 저녁.
저녁을 먹으면서 분열을 소개받은 아펠은 궁금증을 한 아름 지닌 채 식사를 마쳤고, 곧장 공녀와 분열을 소집했다.
그리하여 현재 황궁의 제3귀빈관에 머물고 있는 소녀들이 공녀의 방에 모이게 되었다.
“아리에. 그리고 레이아? 설명을 해주실까?”
아펠은 그녀답지 않게 조금 냉정한 눈길로 분열과 공녀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그녀들은 아펠의 눈초리에 살짝 기가 죽었다.
- 어디까지 설명해야하지?
- 그냥 다 털어놓는 게 어떨까?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아펠이 상대했던 마왕이고 내가 테르한이라고 하면 아펠이 뭐라고 할 거 같아?
- 그럼 내가 네 도플갱어라는 것까지만.
- 그래. 그렇게 말을 맞추자.
아펠의 눈에는 둘이서 서로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아펠이 한 소리 하기 직전 공녀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올해 초에 마석을 찾으러 켄스웰 왕국에 갔잖니.”
“그랬지.”
“켄스웰에 지버트 마을이라고 마석이 유명한 마을이 있거든? 그곳은 도플갱어의 영역이야.”
“도플갱어? 인간의 모습을흉내낸다는?”
아펠이 흥미로운 눈으로 분열을 쳐다보았다.
“응. 도플갱어랑 인간들이랑 같이 사는 마을인데, 마침 내가 갔던 때가 마을의 수장이 될 도플갱어가 탄생하는 날이었어. 마을 사람들은 내가 마력각성자인것을 알고 나의 모습을 본뜨고 싶다고 했고.”
분열이 외부에 노출되었을 때를 대비한 설정이었다.
대상과 서순이 조금 바뀐 부분이 있었지만큰 흐름으로 보자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었다.
“그래서 허락해준 거야?”
“응.”
공녀의 설명에 아펠은 간신히 납득을 하였다.
왜 이렇게 아리에와 닮았나 했는데 아리에의 도플갱어였을 줄은.
“그래서 레이아하고 네가 오늘 아침에 벌인 일이 정확하게 어떤 일이야?”
“그건…….”
공녀가 말을 흐리자 분열이 대신 대답하였다.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했더니 검과 갑옷을 주셨어요.”
자세히 설명하려면 분열과 공녀의 영혼이 ‘결백의 소녀’라는 것까지 설명해야했고, 이에 대한 것은 어지간하면 발설하지 않도록 미리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흐음.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라고? 또 다른 성검인가?”
전대 용사답게 아펠은 검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공녀와 분열 역시 그 검의 정체는 몰랐으므로 둘은 침묵했다.
“어쨌든 너무 모습을 드러내지 마, 레이아. 나는 아리에가 쓸데없는 의심을 받는 건 싫어.”
아펠의 경고에 분열은 잠깐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시밀레가 분열에게 별도의 객실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녀는 분열과 자신의 방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분열과 공녀가 결백의 소녀라는 동일한 영혼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분열의 주장에 의해 조금이라도 붙어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공녀의 영혼과 테르한의 영혼을 분리하기 위해서 분열이 착안한 방법이었다.
동일한 두 영혼이 가까워지면 자연스레 섞여있던 불순물, 즉 테르한의 영혼을 밀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기존에는 분열이 다른 두 사람과 영혼이 섞이지 않기 위해 숨어있었지만, 이제 완전히 별도의 육체를 가지게 되어 분열과 아리에의 영혼이 가까워져도 둘의 영혼 중 어느 한쪽에 흡수될 위험성은 없었다.
공녀와 분열은 한 침대에서 착 달라붙어서 잠들었다.
사건 다음날.
자신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싼 채 잠들어 있는 분열을 떼어낸 뒤 공녀는 방을 나섰다.
간단하게 씻고 아침을 대충 때운 뒤 곧장 신전으로 향한 공녀는 여전히 많은 인파를 헤치며 기도실로 향했다.
밤샘조사로 인해 얼굴에 다크써클을 드리운 조사관들은 공녀를 보며 마치 여신이라도 본 것 마냥 그녀에게 매달렸다.
마력각성자에 이 무구들을 소환한 본인 중 한 사람인 공녀라면 무어라도 해줄 것 같았다.
조사관들의 설명에 의하면 중장비급 장치를 동원해도, 온갖 마법을 이용해도 검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공녀도 답이 안 나오긴 마찬가지라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검과 갑옷 앞으로 다가갔다.
“흐음…….”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검은 마치 뽑아보라는 듯 신들의 조각상 앞의 바닥에 꽂혀있었다.
슬쩍 검을 쥔 공녀는 몇 번 그것을 뽑아보려 했지만 검은 바닥에 박혀 꿈쩍하지 않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공녀는 혹시 몰라 옷 안에 받쳐 입고 온 덧갑옷의 마석들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는 온몸에 땅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름드리나무마저 뿌리째 뽑아들 수 있을만한 힘이 공녀의 몸에 깃들었다.
“흐읍!”
공녀가 볼썽사납게 얼굴을 찡그려가며 검을 뽑아들으려 했지만 검은 요지부동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공녀는 갑옷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쪽에서 조사관들의 한숨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이 갑옷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지요?”
공녀의 질문에 조사관이 서류뭉치를 들고 왔다. 그것을 훑어보던 공녀는 자신이 원하던 자료를 확보했다.
‘키가 대략 2.2미터 이상은 되어야 착용 가능이라.’
마치 테르한에게 맞춰서 만든것 같은 사이즈였다. 하지만 어째서?
‘테르한의 몸을 끌고 와봐야 검도 뽑을 수 있을까?’
공녀는 고민하며 갑옷을 한 번 쓸어내렸다. 강철과는 다른 느낌에 신성력이라 불리는, 마력과는 상반된 기운이 느껴졌다.
만일 공녀 자신이 이 갑옷을 입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큰 효과는 없으리라.
마력각성자에게 신성력은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일 뿐이었다.
체내의 마력이 아닌 외부의 마력을 자신의 것처럼 쓰는 마력각성자는 신성력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고 몸에 신성력을 둘러봤자 마력의 통행에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마력각성자의 몇 안 되는 약점이었고, 지난번 남부 전장의 마지막 대결에서 공녀가 기만의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잠깐……. 신성력과 마력이 서로 반발한다면 파멸이 띤 마의 기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마의 기운과 신성력을 연결시킬 이유가 없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신의 신성력은 대부분 기만이 가져갔다고 했으니 더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이따가 마탑에 들러서 실험을 좀 해야겠네.’
카트미르가 들으면 기겁할 내용을 가볍게 떠올리며 공녀는 갑옷에서 손을 뗐다.
공녀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자 조사관들은 상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은 며칠 더 고생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실험하는 날이 아닌데도 마탑에 들른 공녀 때문에 카트미르가 비명을 내지르는 사소한 일이 있었다.
사건 나흘째.
공녀는 황자에게 분열과 함께 신전에 가겠노라고 말했다.
“리안도 빨리 끝내는 편이 좋지 않아요? 분열하고 말도 안 섞은 것 같던데.”
“너무 쉽게 풀리면 재미없잖아.”
나른하게 말하는 황자의 표정은 전혀 재미있는 것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피곤에 절어있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그러시면 폐하께 말씀드릴 거예요.”
“리에가? 아버님께?”
황자가 과장스럽게 놀랐다는 투로 말하자 공녀는 혀를 찼다. 황자는 공녀가 은연중에 황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공녀는 마음대로 하라며 자기 할일을 하러 갔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황자는 몰래 속앓이를 했다.
어째선지 레이아라는 꼬맹이의 힘을 빌리기는 싫었다.
검을 소환한 주체와 사용하는 자가 동일하리라는 법은 없지않은가.
‘어쩌면 성검과 비슷할지도 모르지.’
자신의 왼쪽 허리춤에 달려있는 성검을 살짝 짚은 황자는 쌍검술을 익혀야하나 따위의 망상을 하며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별 소득 없이 며칠이 흘러 마침내 일주일째.
황자가 마침내 분열을 호출했다.
“부를 거면 빨리 불러주시지.”
분열과 함께 황궁 입구에 도착한 공녀가 툴툴대자 황자가 분열을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그 전에 하는데 까지는 시도는 해봐야지. 덕분에 데이터도 꽤 쌓였고.”
“언제나 여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분열이 비꼬듯이 말하자 황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둘 사이에 마치 번개의 마력이라도 흐르는 것 같아 공녀가 둘의 시야로 끼어들어 제지를 했다.
“자, 시간도 없으니까 빨리 가죠.”
공녀가 분열의 손을 잡고 황궁을 나서자 황자와 수행원들이 그 뒤를 쫓았다.
걸어서 딱 세 블럭 거리인 신전 앞에는 이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거의 성직자들만 오가던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인파였다.
신전안에 들어서자 안색이 파리한 평사제들이반색을 하며 분열을 맞아들었다.
콘실로대사제는 아예 저 멀리서 뛰어오기도 했다.
기부금 등의 수익이 늘어났는지 평사제들과 달리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아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콘실로 대사제님.”
“이쪽으로 드시지요.”
콘실로가 분열과 공녀, 황자를기도실로 안내했다.
며칠 사이에 기도실은 마치 전시관이라도 된 양 호화로우면서도 경건한 장식들이 다수 추가되어있었다.
분열은 사제라는 인간들의 행동에 다소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분열과 공녀가 손을 잡고 검의앞으로 다가갔다.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던 둘은 동시에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검에 둘은 동시에 손을 갖다 대었다.
우웅
검이 진동하며 울렸다.
분열과 공녀는 검의 손잡이와 검신 사이에 가로로 길게 놓여있는 크로스가드 양 쪽에 손을 하나씩 올렸다.
두 사람이 힘을주어 검을 들어 올리자……
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 야, 너, 어?”
공녀가 손잡이를 쥐고 마구 흔들었지만 혼자 뽑으려고 할 때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분열은 무언가 생각한 것이 있는지 공녀를 끌고 조각상의 옆으로 갔다.
“그냥 신들께 물어보자.”
“그게 낫겠네.”
둘이 구석에서 쑥덕대고 있자 팔짱을 끼고 있던 황자가 앞으로 나와 검을 건드려보았다.
며칠 전처럼 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기대 섞인 눈으로 공녀와 분열을 보던 사제들과 조사관들이 실망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난 일주일동안 온갖 고역에 시달리던 그들은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검을 뽑기만을 바랐다.
덤으로 갑옷도 좀 가져가줬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결백의 소녀여. 생각보다 늦었구나.]]
머릿속에 천둥이 울렸다. 분열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질문했다.
“신님. 검은 어떠한 이가 쓸 수 있는 것입니까?”
[[저 검은 죄가 없는 너희는 쓸 수 없다. 종족의 죄를 갚아내었던 자가 그 자격을 가질 것이다.]]
“종족의 죄라 하면…….”
분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각 종족에는 죄를 대신 갚는, 각 종족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리자드맨들은 공녀가 이끄는 기사들과 최후에 싸웠던 5인의 용인들이 그 대표라 할 수 있었다.
리자드맨은 진화처럼 보이는 고대로의 회귀와 죄업의 농축을 통해 그 대표를 선출해내었다.
그리고 인간을 대표하여 죄를 갚아내는 자는,
흔히 ‘용사’라고 불린다.
[[멀지 않은 곳에 이 검을쓸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하면 이 갑옷은……?”
분열의 질문에 물 흐르는 소리가 대답했다.
[[그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구나. 그렇지 않은가, 결백의 소녀여.]]
공녀와 분열은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대답했다.
“네!”
소녀들의 대답에 신들이 작게 미소를 지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공녀와 분열은 다시 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족히 수백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엎드려있는 모습이 기도실과 그 뒤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보였다.
심지어 그 황자조차 무릎을 꿇은 모습에 소녀들은 기겁하며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 무슨 일이야, 이게?
- 나도 모르겠어.
공녀와 분열이 잠시 허둥대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콘실로 대사제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저기, 대사제님? 죄송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오, 공녀님, 레이아 님. 신들께서 두 분을 위해 강림하셨습니다.”
콘실로의 말에 공녀가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신탁이 아니었나요?”
“신탁은 갑작스런 깨달음과도 같은 것. 방금처럼 신들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며 지상의 언어로 이야기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녀와 분열이 침묵하고 있자 황자가 다가와서 말을걸었다.
“그래서 무슨 수확이 있었어?”
공녀와 분열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황자의 양 팔에 한 명씩 팔짱을 끼었다.
황자는 마치 어리고 큰 공녀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잠시 당황했으나 분열이 입모양만으로 이죽거리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두 소녀에게 붙들려 검 앞으로 간 황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파악하고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허나 검은 흔들림 없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황자가 ‘제대로 들은 것 맞아?’라고 눈으로 물어보았다.
공녀와 분열은 황자의 팔을 놓고 역시나 하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펠!”
공녀와 분열이 신전을 뛰쳐나갔다.
소녀들은 양성소에서 한창 땀을 흘리고 있을 룸메이트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