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제 11 장. 결백의 소녀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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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을 강림시켰던 소녀들이 사라지자 신전은 혼란에 빠졌다.
신전을 나서자마자 인파에 휩쓸릴 뻔한 그녀들의 곁으로 벨로나를 비롯한 호위 몇 명이 따라붙었다.
여기사들로 구성된 호위진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했고, 벨로나가 공녀에게 목적지를 물었다.
“양성소로 가서 아펠을 데려와야 해.”
“그러면 저희가 황녀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거리가 복잡하니 아가씨와 작은 아가씨…… 레이아 님은 신전에서 기다려주세요.”
듣고 보니 그러는 편이 나아보였다. 괜히 자신들이 움직였다가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 우려가 있었다.
방금은 예기치 못한 깨달음에 신전에서 뛰쳐나왔지만 공녀와 분열은 곧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신전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황자가 그녀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리에는 가끔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단 말이지.아, 그것 보다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공녀는 잠시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잠깐 생각해보더니 씨익 웃었다.
“둘 다네요.”
“그래, 어련하시겠어.”
공녀의 능청스런 말에 황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말이야. 아펠은 불러온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기도 뭐하지 않아?”
황자의 말에 공녀와 분열은 뒤를 돌아보았다. 기도실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녀들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시민들을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로 한 공녀와 분열은 용의주도한 콘실로 대사제가 준비해놓은 사제복으로 갈아입은뒤 모습을 드러냈다.
기도실로 들어선 공녀는 엘레나가 기도를 드릴 때를 흉내 내어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열 역시 한 박자 늦게 공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 중 일부는 무릎을 꿇고 다른 이들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일순간 신전이 고요를 되찾았다.
사람이 없어서 그러했던 전과 달리 사람들이 꽉 들어차있었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이들만이 존재했다.
- 언제까지 이래야하지?
- 일단 눈치 좀 봐서.
공녀와 분열은 머릿속에서 대화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열과 성을 다하여 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녀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신들이 강림하기도 하였으니 공녀와 분열은 사실상 성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무릎 꿇고 눈을 감은 채 분열과 잡담을 나누던 공녀는 다리가 저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아펠이 신전으로 들어왔다.
마치 잘 짜인 연극 같은 행태에 사람들이 흥미어린 시선을 아펠 황녀에게 보냈다. 아펠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내며 성큼성큼 전진했다.
기도실에 들어선 아펠을 공녀와 분열이 맞이했다.
“어서와, 아펠.”
“아리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도실 바닥에 꽂힌 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그녀는 공녀와 분열을 한 번씩 본 뒤 그 옆에 있던 황자를 돌아보았다.
황자는 마치 양보하듯 팔을 들어 검 쪽을 가리켰다.
아펠은 마른침을 삼킨 뒤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늘을 가르는 우렛소리. 땅이 노래하며 울리는 소리.
물이 흐르고, 불이 타오른다. 바람이 불며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아펠의 의식은 하늘 너머 우주로 향했다. 그곳에 새겨진 마법적인 문양을 본 아펠은 기침을 하며 검에서 손을 떼었다.
아펠의 손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소스라쳐 자신에게 다가오던 공녀를 제지하며 아펠은 소매로 입가와 손을 슥 닦고 다시 한 번 검을 쥐었다.
다시 한 번 마법의 문양이 보였다.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별빛 가득한 우주에 홀로 외로이 떠있는 그 문양이 뜻하는 바를 아펠은 어째서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너 또한 죄가 없노라.”
아펠이 말하는 동시에 검이 뽑혀져 나왔다.
천천히 검을 들어 가슴 앞으로 가져간 아펠은 검신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안에는 인간의 죄가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나 황자가 주변에 뿌리고 다니는‘성검의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훨씬 더 정갈하고 고차원의 신성한 기운이 그녀의 안에 충만하였다.
아펠은 머리 위로 검을 들어올렸다. 입가에 핏자국이 선명했지만 그녀의 비장함을 강조해줄 뿐이었다.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가 신전을 넘어 제도의 거리까지 이어졌다.
제국력 879년도 7월.
용사였던 소녀는 다시 한 번 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펠이 뽑아낸 검은 기존의 성검과 구분하기 위하여 ‘신검(神劍)’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와 세트라고 여겨졌던 ‘신갑(神鉀)’은 공녀의 부탁에 의해 신전에 그대로 모셔두기로 했다.
나중에 공학소에서 테르한의 현재 몸 상태를 측정한 뒤 지난 일주일간 알아낸 갑옷의 크기와 비교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테르한이 아니면 골렘에게라도 입혀야 할 정도로 커다랗기에 당장 누구를 줄 수도 없었고,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신전에 맡겨두면 누가 가져가거나 할 위험도 없었다.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오길 바라며 공녀와 분열은 신갑을 뒤로하고 아펠과 함께 신전을 나섰다.
아펠은 신검을 고급스러운 검집에 꽂고 허리에 메었다.
과거 용사로서 활동할 때는검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일 다시 한 번 용사로 활동할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그녀가 스승을 구하지 못했던 그때의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와는 별개로 황녀이자 기사의 길을 걷고 있는 아펠에게 좋은 검이란 언제나 바라마지 않는 물건이었기에 그녀는 마차를 타고 기분 좋게 양성소로 향했다.
“아펠. 아까 각혈을 하던데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아마도 내가 지니던 인간으로서의 죄를 한 번에 떨쳐내느라 그랬던 것같아.”
아펠은 신검을 들고 나서 지상의 죄업 같은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껏 인간과 용사는 정의의 편, 마족과 마왕은 나쁜 놈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는 진정한 용사가 되어 이 세계가 드러내지 않던 진실에 접근하게 되었다.
“너 또한 죄가 없노라.”
아펠이 중얼거린 말에 성검이 반응했다.
아펠은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너 또한’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대로, 이미 죄가 없는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바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자매와 같은 아리에와 그 옆자리의 레이아였다.
레이아는 도플갱어였으니 일단 제외한다고 치면, 아펠과 공녀는 인간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검을 쥔 손은무겁기만 했다.
기사로서는 검을 휘두를 생각이 가득했지만 용사로서 다시 활동하는 것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이미 리베리안 황자라는 용사가 있는 현재 아펠의 재등장은 혼란을 줄 수도 있었다.
다음번 마왕을 막고 지상의 죄업을 전부 갚아낼 때까지 인류를 비롯한 모든 종족들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펠은 허리춤의 검을 꾹 쥐었다.
“이건 어쩌면 앞으로 벌어질 일의 조짐일지도 몰라.”
공녀의 말에 분열과 아펠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녀는 그녀들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과거에는 마족들이 한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동시에 등장했다고 해. 그래서 마왕이등장할 때마다 지상의 여러 종족들이 멸망하기도 했고.”
“그렇지.”
분열은 공녀의 몸에 있었을 때 기밀문서들을잔뜩 보았기에 그에 관련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아펠은 계속 해보라는 듯 몸을 공녀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용사가 사실…… 그래, 아펠도 이 기회에 알아야겠지. 성검은 사실 마왕이야.”
“……뭐라고?”
갑작스런 공녀의 말에 아펠이 깜짝 놀랐다. 지금껏 어떤의심도 해본 적 없었기에 제법 충격이 컸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 용사 시절을 함께 하던 검이었으니.
“뭐 녀석이 인간들을 속여먹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역할은 하고 있으니 일단은 놔두고 있었어. 그런데 신들께서 네게 검을내려주신 것을 보면…….”
아펠은 공녀가 생략한 뒷말을 알아차렸다.
때가 되면 자신은 이 검으로 마왕을 처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검이었던 성검이라도.
“그래서 내 추측은, 마왕이 둔갑한 가짜 성검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려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야. 하지만 대비는 해놓아야겠지.”
아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탄 마차가 양성소에 도착했다. 아펠은 공녀에레이아에게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건넨 뒤 마차에서 내렸다.
다시 둘만 남은 공녀와 분열은 잠시 숨을 돌렸다.
잠시 쉬던 분열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공녀에게 질문했다.
“아펠한테 성검에 대한 것을 다 말해도 괜찮은 거야?”
“아펠이 파멸과의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만과의 전투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아펠은 기만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니 진실을 말해주어야지.”
“그건 그러네.”
현재 인간들 중 기만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펠과 공녀뿐이었다.
공녀는 황궁으로 돌아가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성검과 신검. 테르한과 신갑. 파멸과 기만과 분열.
지상의 죄업과 결백의 소녀.
모든 것이 결정지어질 파멸의 강림이 머지않았다.
그때까지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기량을 갈고 닦는 것 의외에 이제 공녀가 할 일은 별로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공녀는 피곤한 눈을 조용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