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2부 닫고 3부 여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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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웅
일련의 사건이 종료되고, 생각보다 제도에서 오래 머물렀던 분열은 지버트 마을로 바로돌아가기로 했다.
기차역 플랫폼에는 ‘외국에서 온 성녀님’을 배웅하기 위해 수많은 인원들이 나와 있었다.
베일을 푹 눌러쓴 분열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열차에 올라탔다.
아리에도 올 법 했지만 오늘은 빠질 수 없는 일이 있다고하며 아침에 나올 때 황궁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표현은 안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에 분열은 조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미리 앉아있던 공녀를 보고는 당황해버렸다.
“너 바쁘다면서?”
“응. 레이아를 지버트까지 호위해줘야지. 어린애 혼자여행 보낼 수는 없잖아?”
공녀가 윙크하며 말하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벨로나가 좌석 위로 고개를 내밀며 분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공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치며 분열을 보았고, 분열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머물 생각이야?”
“음. 레이아가 제도에서 열흘정도 머물렀으니까 나도…….”
“아가씨!”
고개만 빼꼼 내민 벨로나가 무서운 눈초리로 공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긁적인 공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래 머물기는 힘들 거 같아. 데려다주고 바로 가야 할지도 몰라.”
“그래? 조금 아쉽네.”
분열은 공녀에게 보여줄 것이 많았다. 지버트 마을은 요즘 제국의 후원을 받아서 무서운 기세로 기반시설을 닦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까지의 길이 크게 확장되어 이제 눈이 많이 오거나 해도 큰 무리 없이 오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을 둘러싼 벽을 높고 두껍게 보강하기도 했고, 식량의 수급도 마을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경작지도 크게 늘렸다.
이제 지버트 마을은 하나의 요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하루나 이틀은 너무 짧았다.
분열이아쉬운 눈으로 공녀와 벨로나를 쳐다보자 공녀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눈을 벨로나에게로 향했다.
벨로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딱 사흘이에요. 이 이상은 공녀님 스케줄에 무리가 가요.”
“알았어. 고마워, 벨로나.”
공녀와 분열이 활짝 미소를 지었고, 벨로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들키지 않기위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차는 결백의 소녀들을 싣고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켄스웰 왕국으로 향했다.
2. 신년행사
제국력 880년의 새해가 밝았다.
제도에서는 간만에 성대한 신년행사가 열렸다.
지난 5번의 신년은 국소전이긴 했지만 전시상황이기도 했고, 리베리안 1황자가 전장에 드나들었는지라 황후의 명으로 최소한의 형식만 갖추었던 행사만 진행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건국 880주년과 종전 후 첫번째 신년행사라는 점에서 여느 때보다 성대한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모처럼만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정재계 요인들 및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황후는 파티 홀에 들어서는 자신의 첫째 아들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아리에 제즈릭 공녀와 아페르오네 황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리베리안이 공녀와 황녀 중 누구를 에스코트할까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아리에가 스윽 내민 팔을 아펠이 붙잡고 둘이서 장난을 치며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에 황후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잔뜩 기대를 하던 사람들 역시 흥이 식은 얼굴로 자신들이 하던 일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심 다른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과거 황자와 공녀의 춤이 큰 화제가 되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번 신년행사 때 황자와 공녀가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낼지 지켜보기로 했다.
6년 동안 황자와 공녀 사이에는 제법 묘한 소문들이 돌았다.
20살과 16살 사이에 도는 소문이 14살과 10살 때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다.
호사가가 아닌 사람들조차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모두의 기대를 품은 채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홀의 중앙이 자연스레 비워졌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황태자가 자신의 약혼녀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법 근사한 솜씨에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냈고 영상을 찍는 마도구가 바쁘게 돌아갔다.
황태자의 순서가 끝나자 사람들이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나머지의 대부분은 1황자와 공녀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황자는 오랜만에 조우한 친우들과 이야기하기 바빴고, 공녀는 기사단 출신들과 의기투합하여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회장의 음식을 쓸어 담고 있다가 주변의시선이 쏟아지자 살짝 민망해진 공녀는 포크를 슬쩍 내려놓았고, 그런 그녀의 곁으로 황태자가 다가왔다.
“바쁘신 제즈릭 공녀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연회 음식 좀 먹으러 왔지.”
지난 6년 간 공녀와 황태자는 그럭저럭 친구처럼 지내왔다.
아펠이 낀 덕분에 어쩌면 남매에 더 가까운 관계였지만, 황태자가 생각하기에 공녀와 자신은 몇 년 뒤면 다른 관계-아마 자신의 형님과 관련된-가 될 가능성이 컸기에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뒤에 서있던 그의 약혼자, 피스텔 후작가의 아세린 영애가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제즈릭 공녀님.”
“네? 무슨 일이시죠, 피스텔 영애.”
황태자에게 너무 친근하게 굴었나 싶어 걱정하던 공녀에게 피스텔 후작영애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 사인 부탁 드려도 될까요?”
평소 어린 나이에도 품위 있고 우아하기로 유명하던 후작영애는 어디 갔는지 한 명의 소녀팬만이 남아있었다.
아세린은 어릴 때부터 또래인 공녀의 활약을 들으며 자라왔고, 그녀가 만든 마석물품을 썼고, 그녀가 광고하는 화장품을 애용했으며, 그녀가 기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끝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자존심이 상하거나 시기심이 들기보다는 경외감을 품게 되는 법이었다.
“네. 물론이죠.”
공녀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 끝자락에서 실을 한 올 뽑아냈다.
그 모습에 아세린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말리려 했지만 공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정신을 집중해 실에 마력을 불어넣은 뒤 손수건에 자신의 사인을 박아 넣었다.
푸른색의 실로 만들어진 사인이 박혀있는 하얀색 손수건을 받아든 아세린은 공녀가 자신의 부탁 때문에 드레스를 뜯을 줄은 몰랐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공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적당히 사과를 받아주었다.
이윽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빠른 왈츠의 리듬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로 박자를 맞추던 공녀를 향해 다시 한 번 시선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이유를 몰라 난감해하던 공녀에게 그이유를 가르쳐줄 사람이 다가왔다.
마치 6년 전 그날처럼.
“한 곡 추시겠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황자가 내민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공녀는 곤란한 미소를 띠었다.
“또 그 대사에요?”
“진부하면서도 정석적인 대사지.”
어깨를 으쓱하는 황자의 손을 잡으며 공녀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이번까지 만이에요?”
“그래. 다음번도 또 부탁할게.”
공녀와 황자가 홀의 중앙으로 나서자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텅 비어버린 무대에 올라온 둘을 보자 악사들이 더욱 격정적으로 음악을 연주했다.
손을 맞잡은 채 마주선 두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신문에는 ‘춤꾼 공녀님’이춤꾼의 이름을 내려놓았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기재되었다.
그 신문을 본 공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못 췄나?
그 동안 춤 연습을 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지만 뛰어난 신체능력과 타고난 균형감각으로 나름 신나게 추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는 냉정했다.
‘하긴 내가 언제 이런 거 신경 썼다고.’
공녀는 신문을 휙 던져두고는 이 일에 대해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래서 얼마 후 제도의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춤의 시초가 자신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3. 임관시험
제국력 880년 4월.
기사단 양성소에는 오늘따라 긴장한 생도들이 많았다.
동기와 후배, 가끔은 선배의 응원을 들으며 한 무리의 생도들이 양성소를 나섰다.
그 중에는 아펠과 카르나타, 세냐르 등 일명 ‘863년생 라인’의 멤버들이 다소 섞여있었다.
기사단 양성소 창설 이래 평균 임관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요즘이었지만16세인 그들을 정식기사로 임명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 벨로나가 그 나이에 임관한 적은 있었지만 그녀는 당시 임시교관이었던 제즈릭 공녀의 요청과 압도적인 무위 등 다소 특수한 경우였던 것을 감안하면 아펠을 비롯한 863년생 라인의 임관은 원래 내년이나 올해 말 정도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페르오네 황녀는 자신의 신검을 은근슬쩍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고, 그녀의 열변에 감동한 것인지높은 지위에 겁먹은 것인지 기사단과 양성소에서는 16세가 된 후보생의 정식기사 임관 시험을 정식으로 허가해주었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아펠은 동기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고, 한 동안 제대로황녀님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임관시험의 때가 다가오자 어린 그들은 덜컥 겁이 난모양이었다.
“요즘 시험이 꽤 어려워졌다던데…….”
“선배들이 졸업하고 바로 전쟁에도 투입되기도 했으니까.”
“전쟁이 또 나려나?”
“글쎄. 몇 년 동안 괜찮다는 말도 들리기도 하고 언제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기도 하고…….”
동기들과 잡담을 나누며 아펠은 기차역에 도착했다.
제국 서부의 황무지로 출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으며 아펠은 그 동안 배워왔던 검의 기술과 오러 사용법, 마력의 운용법 등을 떠올렸다.
할 수 있다.
아펠은 신검의 폼멜을 꾹 쥐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며칠 뒤에 아리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리라 마음먹으며 그녀는 선배들에게 들었던 임관시험의 ‘족보’를 친구들과 연구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제3귀빈관으로 돌아온 아펠은 마침 그곳에서 쉬고 있던 아리에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으며 외쳤다.
“아리에! 나도 이제 정식 기사야!”
그 말을 들은 공녀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늘게 휘어 미소를 지으며 아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하해, 아펠. 그 동안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네.”
“응!”
그렇게 아펠은 한동안 자기보다 작은 공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4. ????
그는 눈을 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늦은 것일까.
눈을 뜨면 그녀가 있기를 바랐건만.
아쉬움에 한없이 가까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그 느낌을 뜻하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내 상념을 떨쳐내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말아 쥐었다. 자신의 안쪽에 ‘2명’이 느껴졌다.
실패인가.
생각보다 적었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오로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분열.
그녀 또한 지상으로 내려가고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름도 없는 그 녀석이 저지른 일이렷다.
그는 분노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자신이 신으로 돌아가면 녀석의 의식은 소멸시켜버리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남은 시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