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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제 12 장. 전초전 - 1 (75/82)



〈 75화 〉제 12 장. 전초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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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력 880년 여름.
얼마 전 생일이 지나서 17살이 된 공녀는 뒤늦은 성장기가 왔는지 키가 조금 자랐다.

키나 몸이 성장한 귀족 영애들은 대부분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것으로 성장의 척도를 재보곤 하였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공녀는 갑옷과 전투복을 맞추며 자신의 성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상태는 어때?”

공녀의 질문에 보안경을 쓰고 용접을 하던 클레어가잠시 용접기를 내려놓았다.
번개와 불의 마석을 섞어 초고온의 불꽃을 간편하게 만들어내는용접기는 장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최신 마도구였다.
그 마도구를 만들어낸 마도공학소 역시 용접기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마지막 조정. 완벽.”

클레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  마도공학소 산하 마도구 생산 공방에서는 작년 남부 전장에서 딱히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거대 아이언 골렘의 업그레이드가 한창이었다.

“좋아. 앞으로 활약할 날만 남았네.”

“응. 지난번엔 아리에가  했지.”

“아니, 마지막 전투 때는 아니었잖아.”

“그런가?”

공녀와 클레어는 한동안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클레어가 쉬러  사이 공녀는 아이언 골렘이 있던 공방의 바로 옆 공바으로 찾아갔다.

“갈리온 장인님. 배틀슈트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요?”

휘황찬란한 갑옷을 망치로 두드리고 있던 드워프 장인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거 좀만 참으쇼. 공녀님이 요새 키가 커버리는 바람에 세부조정도 못하고 있지 않소.”

갈리온의 말에 공녀는 머쓱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원해서 키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공녀 자신이 재촉하는 모양새는  보기 좋지는 않았다.

공녀는 장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재빨리 준비한 선물을 꺼내들었다.
공녀가 노란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살짝 흔들자 그것을 본 갈리온의 눈이 순간 커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녀는 별다른 말없이 선물을 내려놓고 그곳을 떠났다.
공녀가 가는 모습을 몰래 보던 갈리온은 그녀가 두고 간 술병을 들고는 피식 웃었다.
꽤 비싼 물건이었지만 공녀가 자기와 같은 장인들 덕에 돈을 벌고 있었기에 심적인 부담은 없었다.
단지 이 술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을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갈리온의 공방을 나온 공녀는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클레어와 작별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작열하는 햇볕을 받고 있는 초원의 풀과 나무들은 싱그럽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의 녹음(綠陰)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율형골렘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공방 근처에 자라난 풀들을 베고 있었다. 길가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풀 더미에서 나는 진한  냄새를 맡으며 공녀는 마석차에 올라탔다.

“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

벨로나는 작년 말에 운전면허를 따고부터 공녀의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시외를 돌아다닐 때면 어김없이 공녀의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그런 벨로나를 무척이나 기특해했던 공녀였지만, 벨로나의 운전솜씨가 형편없던 시절부터 일취월장한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옆자리를 지켜왔던 공녀의 고생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마석차가 마차 정도의 속도에 도시의 외곽만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나중에 기술이 발전해서 말보다 빠른 속도로 시내를 달리는 차가 나오기라도 하면 각종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한 점을 잘 알고있던 공녀는 벨로나의 운전을 관찰했고, 덕분에 운전면허의 발급심사를 엄격하게 만들고 마석차량의 문제점-주로 안전 쪽-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아직 초기단계인 마석차의 가능성을 높게  공녀는 이러한 일에 꽤 적극적이었다.

새로운 기술은 여러 일들을 겪으며 자리 잡는 법이었다.
그로 인한 문제를 최소화하고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것은 그 방면에 일찍 발을 들인 선구자들과 그것을 만들고 개선해나갈 기술자들의 몫이었다.

“기사단 양성소로 가자.”

“네. 북서대문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석차는 시내에 진입이 어려웠기에제도의 외곽에 만들어져있는 주차장에 세워둔다.
현재 제국에서는 교통과 운송을 크게 정비하고 있었다. 특히 제도의 시내는 마석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확충하고 각종 안전 시설물들을 설치하고 있었다.

최초의 마왕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에 병력과 기사들의 빠른 이동이 필수적이었다.
열차는 빠르고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지만 철로가 끊기거나 탈선을 하게 되면 복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공녀는 마석차의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플라잉 보드도 괜찮긴 했는데…….’

어렸을 때에는 플라잉 보드를 기사들에게 지급하여  대신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보드를 타고 시외로 나선 순간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플라잉 보드는 부유 높이가 낮았기에 평탄한 지형이 아니라면 지면의 요철이나 돌부리 등에 쉽게 걸려 넘어졌다.
제도 밖으로 나선 순간 돌멩이에 부딪혀 구른 공녀는 아직도 겨울이 되면 그때 다쳤던 무릎이 시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잡다한 생각을 하다 보니 북서대문에 도착했다. 공녀와 벨로나는 차에서 내려 양성소로 향했다.
걸어서 5분 정도 만에 양성소에 도착한 공녀는 벨로나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수고해.”

“네, 아가씨.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 마치시면 모셔다드릴게요.”

“어, 괜찮은데. 너는 따로 하는 일 없어?”

벨로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와 황자전하가 습격당한 이후로 저는 아가씨 전담 호위가 되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벨로나도 자기 사생활이 있고 기사단 소속으로서의 일도 있을 것이었다.
나이도 마냥 어린 것은 아니었으니 마음에 둔 남자와 데이트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럴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양성소로 들어갔다.
얼른 마왕을 잡고 일이 마무리되어야 자신도 벨로나도 여유를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양성소의 분위기는 다소 산만했다. 잠시 주변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취합하던 공녀는 한 가지 신경쓰이는 단어가 계속 들려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켄스웰 왕국.

제국의 제후국이자 에팔레니아 산맥의 남동쪽에 길게 늘어서있는, 그리고 현재 분열이 머물고 있는 왕국의 이름이 자꾸 들려왔다.

어쩐 일인지 작년에 정식기사로 임관했던 세냐르와 카르나타가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그들을 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오랜만이네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공녀를 본 세냐르와 카르나타가 반색하며 그녀를 연병장으로 데리고 갔다.
영문을 모른  그들에게 끌려간 공녀는 양성소의 책임자인 길단 경이 단상 위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재빨리 단상 뒤쪽의 교관들 자리로 간 공녀는 다른 교관들과 눈인사를나누며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길단 경이 공녀를 살짝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공녀 역시 그에게 목례를 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한 길단 경이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켄스웰 왕국에서 마족의 움직임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아직은 활동범위가 넓지는 않다고 하나 놈들이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길단 경의 말에 양성소 생도들과 작년에 임관시험을 통과한 신입 기사들이 긴장했다.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인가.

“켄스웰 왕국은 지난번 마왕과의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곳이었기에 마을과 요새들이 점령당하기도 한 적이 있었지. 때문에 마족들을 막아낼 군사력이 다소 모자라다. 그래서 왕국에서 우리 제국 기사단에 정식으로 파견을 요청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길단 경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제국에도 언제 어디서 마족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지. 기사단에서는 최소한의 인원만 파견하기로 했다.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길단 경은 단상을  번 내리치고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다. 작년에 임관했지만 아직 근무지 배정을 받지 못한 신입들과 임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17세 이상의 생도들중 지원자를 받는다.”

길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생도들과 신입 기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나이가 어린 생도들 중 극히 일부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나머지 대다수는 다소 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선 선배들을 보았다.

신입 기사들 사이에서 아펠과 세냐르, 카르나타를 발견한 공녀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 분열을 불렀다.

분열.

- 응, 아리에. 무슨 일이야?

- 혹시 너희 마을은 괜찮아? 켄스웰 쪽에서 마족들이 활동한다던데.

아, 그거? 아무래도 우리 마을 이야기 같은데.

- 뭐?

공녀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옆에 앉아있던 교관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들을 신경 쓸 새도 없이 공녀는 분열을 다그치기 바빴다.

- 마족들이 마을을 습격하기라도 한 거야?

- 음.   그랬지.

- 왜 말을  했어!

- 너무 걱정 마. 아직은 여유가 있어. 다크엘프 마족들이라서 그런지 아주 파괴력 있는 공격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저번에 증축한 성벽을 뚫지도 못했고.

- 마족들이 성벽을 뚫을 작정으로 공격을 해왔다는 소리야?

- 아니, 그게 아니라…….

공녀는 분열과 대화하면서 연병장으로 뛰어내렸다. 아펠 옆에 선 공녀는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 곧 갈 테니까.

- 오다니? 여기로?

- 그래. 혹시나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고 문을 걸어잠그고 버티고 있어. 저번에 보낸 총은 잘 받았지? 놈들이 접근하면 그거 몇 방 쏴버려.

- 으응.

기껏해야 정찰병 몇 명이 오갔을 뿐인데 공녀까지 직접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산 아래 마을과 근처의 도시인 피체르 시를 오가던 사람들이 마족들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했던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났다.
마족의 활동하는 곳이 지버트 마을 근처뿐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분열은 슬슬 전쟁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참.  전에 아리에를 좀 달래주기도 해야겠지.’

분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커다란 마석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아마 공녀가 보면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한 분열은 그녀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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