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제 12 장. 전초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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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버트 마을은 거의 도시나 다름없을 정도로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성벽이라기 보단 담벼락이라고 불러야 할 수준의 벽이 마을의 외곽에 늘어서 있었지만, 작년 초에 새로 탄생한 도플갱어들의 수장 레이아의 수완으로 왕국과 제국 등지로부터 물자를 제공받아 마을은 점점 발전해갔다.
그리고 마을의 발전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젊은 다크엘프들의 대표가 분열의 집으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시트리아.”
시트리아는 마을에 온지 1년 반 만에 제국어도, 인간-도플갱어의 마을에 사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녀는 세계수를 모시는 무녀 출신답게 신성에 살짝 발을 담그고 있는 분열을 정성스레 모셨다. 왕의 기운을 가진 그녀에게 거의 본능에 가까운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식량 많이 확보, 했습니다.”
시트리아는 다소 어설픈 제국어로 일들의 진척에 대해 이야기했다.
분열은 다크엘프의 말을 알고 있었지만 시트리아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은 인간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하여 일부러 제국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창 보고를 하던 시트리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며칠 전부터 마을 밖에서 종종 보이던, 짙은 암녹색의 기운을 띤 다크엘프 무리 때문일 것이다.
“밖에 남겨진 부족 사람들. 다른 부족도, 있었습니다.”
“다크엘프 마을에 남았던 그대의 부족과 다른 부족이 같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인가?”
“네.”
시트리아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녀를 따르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크엘프 마을에 남은 이들은 약 400명 안팎이라고 한다.
그 인원이 전부 사냥꾼이나 전사는 아니었기에 마을의 경비대를 동원하거나 왕국군의 손을 조금만 빌리면 무난히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시트리아에게는 동족을 상대해야하는 일이기에 괴로운 기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다크엘프들이라고 부족 간의 전투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프들이랑 다르게 호전적이고 사냥을 주로 하는 다크엘프들은 동족간의 전투가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인간들처럼.
물론 지금까지 한 마을에서 살아왔던, 어쩌면 가족들도 있을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심적으로 부담이 안 갈 수가 없으리라.
무엇보다 족장인 시트리아의 오빠가 적들의 리더일 가능성이 큰 만큼 그를 상대해야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었다.
하지만 시트리아는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방금처럼 풀이 죽어있다가도 막상 적들을 막아야 할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시위를 당길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다른 다크엘프들과 연합을 했을 것이라는 건데…….’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기존에 ‘숲의 마족’이라 불리던 영락한 다크엘프들이 시트리아의 고향에 있는 다크엘프들을 자기의 무리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그 증거로 시트리아를 비롯한 지버트의 다크엘프들은 녹색의 기운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마을 외곽에서 어슬렁거리는 놈들은 이쪽의 견제에 녹색의 기운을 끌어내 맞대응하고 있었다. 마의 기운을 이끌어내는 데 익숙한 녀석들이었다.
다크엘프들의 산발적인 습격에 벌써 경비병 몇 명이 활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래도 좋은 제국산 방어구를 보급해서 그런지 사망자는 없었고, 방어무기도 아리에가 몇 개 보내주어서 마을 외곽에 설치를 완료하였다.
어젯밤에는 계속되는 도발에 참다못한 경비대장이 기관총을 발포를 하자 숲의 마족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도 했다.
얼마 전 키워낸 도플갱어들이 마왕이었던 분열의 이야기로 굉장한 성장세를 보인다는 점도 긍정적인 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여차하면 에팔레니아 산맥의 레인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제국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숲의 마족에 대항하는 것은 이미 이야기가 된 일이었다.
분열은 최선을 다해서 지버트 마을을 지키기 위한 수단들을 동원했고, 그 성과도 제법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에는 적들의 세력이 약소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크엘프들이 이곳만 습격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군세를 이곳으로 집중한다면 모를까, 게릴라처럼 소수로 이곳저곳 찌르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무서울 이유는 없었다.
허나 어째서인지, 분열의 마음 속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레이아 님?”
시트리아는 고민에 빠진 분열에게 의문을 표했다. 분열은 바로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군.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 저기.”
시트리아는무언가 할 말이 있었지만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듯 머리에 손을 올리고 혀에 말을 담았다가 내려놓았다. 한숨을 쉰 그녀는 다크엘프의 언어로 분열에게 말했다.
[레이아 님. 저희들 때문에 마을이 공격 받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분열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듯 잠시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시트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다. 그대들은 우리 마을의 일원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거라.]
시트리아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어느새 자기보다 커진 분열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시트리아보다 한 뼘은 작아보였는데 1년 반 만에 그녀보다 반 뼘 정도 커버린 분열을 보며 시트리아는 종족과 성장의 차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크엘프는 성장이 너무 느렸다.
얼마 후 초대 마왕이 강림하는 날,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먹을 꾹 쥔 시트리아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레이아 님. 점술 할게요.”
세계수를 모시는 무녀인 시트리아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점을 칠 수 있었다.
비록 분열과 공녀가 받은 것처럼 신의 강림에 필적하는 뚜렷한 신탁과는 차원이 다르게 소소한 것이었지만, 그 영험함은 진짜였다.
“오, 그래. 오랜만에 그대의 점술을 볼 수 있겠군.”
민속신앙이나 지방의 축제 같은 것을 좋아하는 분열은 시트리아의 춤추는 것 같은 점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직 어리고 제대로 배우지 않아 동작이 다소 어설펐지만 그래도 꽤 볼만했었다.
그날 저녁 분열은 지버트 소속 다크엘프 무녀 시트리아에게 마을의 안위에 대한 점술을 명했고, 시트리아는 그 명을 받들었다.
켄스웰 왕국의 수도 카로느플은 패션과 유행의 도시였다.
제국의 수도 체노스트라에 버금가는 수의 유명한 의상숍들이 거리에 줄지어있었고, 제국산 미용품들이 동시 발매되는 등 제국이 아닌 곳 중에서는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이기도 했다.
그 카로느플에 두 번째로 방문한 공녀는 그녀를 꾸며줄 수많은 옷가게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제국 정보부 켄스웰 지부를 방문했다.
같이 다니던 여기사들과 여생도들이 주위를 흘끔거렸지만 무심한 공녀는 그저 목적지로 향할 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맥도우와 키레아가 공녀를 맞이했다. 공녀는 분열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그들을 상당히 좋게 보고 있었기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두 분.”
공녀는 맥도우, 키레아와 악수를 한 뒤 자신의 뒤에 서있던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국기사단의 카르나타 블란테 경, 세냐르 루이넬 경, 양성소의 시레온 칼린츠 생도, 그리고…….”
같이 온 기사와 생도 십여 명을 소개하던 공녀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일행의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차례임을 알아채고는 앞으로 나왔다.
공녀는 뒤를 돌아보며 그 누군가를 소개하듯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아페르오네 체노스트라 경.”
아펠은 쓰고 있던 로브를 내리며 신검을 허리에 차고 얼굴을 굳힌 채 근엄하게 서있었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지은 공녀는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아펠을 본 맥도우와 키레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 황녀님!”
맥도우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자 키레아도 그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정보부에 있단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부복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일어나자 아펠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황녀가 아니라 신입 기사로서 온 거니까.”
“허나 어찌…….”
고개를 저어 맥도우의 말을 끊은 아펠은 자신의 검을 가리켰다.
“기사로서. 왔습니다.”
맥도우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황제의 친자식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황실의 일원에다가 전직 용사였던 아펠의 등장에 정보부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은 자칫 잘못하면 인명 피해가 나올 수도 있는 반전시 상황이었기에 정보부에서는 신입과 생도들의 투입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제즈릭 공녀에 아펠 황녀까지 오는 바람에 그들이 준비해야할 것이 더욱 늘어났다.
“공녀님. 황녀님. 이번 일은 견학이나 시험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켄스웰 지부는 남부 전선에서의 제 활약은 못 들으셨나 봐요.”
공녀의 말에 맥도우는 할 말이 없어졌다.
마력각성자에다가 무시무시한 오러와 각종 마도병기들을 소유한, 명실공히 제국 최강자 반열에 들어가는 공녀와 그녀가 이끄는 기사들이 남부 전쟁을 끝내버렸다는 것은 촌구석의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데 정보부인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희가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네. 잘 부탁드려요.”
공녀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고 맥도우는 낭패한 기분으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숲의 마족들의 세력권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레인저 에팔레니아 지부, 켄스웰 지부, 산맥 너머의 황야 지부 등에서 정찰한 결과 그들의 활동범위는 대략 이 정도.”
맥도우가 에팔레니아 산맥과 켄스웰 왕국을 그려낸 커다란 지도를 탁자 위에 깔고 말들을 옮겼다. 검은 체스 말들로 숲의 마족의 세력권을 나타낸 그는 주요 지점을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곳 카로느폴은 산맥에서 멀고 사방에 강을 끼고 있어 마족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산맥에 가까운 피체르 시, 이어렌 마을, 그리고 산맥 안쪽에 있는 지버트 마을, 에르손 마을에서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약 3주 전부터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맥도우는 병졸의 체스 말을 이름이 나왔던 도시와 마을에 하나씩 옮겨놓았다.
그 중에 지버트 마을에 올려진 체스 말을 본 공녀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현재는 아무래도 지버트 마을이 그들의 세력권에 제일 가깝기도 하고, 다크엘프들이 정착해서 그런지 거의 매일 소규모로 이루어진 부대의 습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저희 지부에서 지버트 마을에 무기와 방어구 등을 최대한 지원해서 아직까지 큰 피해는 없다고 하더군요.”
공녀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에게 레이아가 지버트 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들은 아펠도 이야기를 경청하고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에팔레니아 레인저 지부에서 무언가를 관측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지요?”
공녀의 의문에 맥도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룡(飛龍)으로 이루어진 숲의 마족의 군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버트 마을에서는 간소한 축제 비슷한 의식이 펼쳐졌다.
오랜만에 호화로운 무녀복으로 갈아입은 시트리아는 빙글빙글 돌며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흩뿌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밟아 그 흐트러진 모습을 통해 마을의 앞날을 점치고 있었다.
분열은 오랜만에 나풀거리는 시트리아의 춤사위를 구경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점술의 결과를 기다리며 술잔이 오가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즈음, 시트리아가 동작을 멈추었다.
“아…….”
시트라이가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보았다.
“하늘. 공포. 가까운 미래.”
시트리아는 점괘를 읽으며 단어들을 내뱉었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분열에게 달려갔다.
[레이아 님! 가까운 시일 내에 하늘에서부터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겁에 질린 시트리아의 모습에 분열은 뜯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날개달린 늪지의 마족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던 분열은 숲의 마족들에게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파멸의 강림까지 이어질 두 번째 전쟁의 전조가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