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제 12 장. 전초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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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스웰 왕국군의 게터 장군은 용사를 도와 지난번 마왕군의 공세를 막아낸 전력이 있는 노장군이었다. 그는 몇 년 만에 만난 아펠을 보며 반가워하면서도 부담스러워했다.
“용사님.
한참을 고민한 끝에 ‘황녀’라는 호칭 대신 예전에 그녀를 부를 때 썼던 ‘용사’라는 호칭을 선택한 게터 장군에게 아펠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린 시절 1년여 동안 전쟁터에서 보냈던 일은 아펠에겐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게터 장군 같은 어른들이 용사 아펠의 뒤를 받쳐주었기에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펠은 어린 자신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었던 장군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터 장군님. 6년 만에 뵙네요.”
게터 장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낯가림이 심했던 어린 용사를 황녀의 신분인 제국 기사단의 일원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제국의 지원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펠을 후방에서 안전하게 지키면서도 활약시킬 방도를 고민하느라 게터 장군과 왕국군 참모진들이 진땀을 빼는 사이, 공녀는 지버트 마을에 갈 인원을 고르고 있었다.
“일단 아펠은 안 돼.”
공녀의 말에 아펠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이 산속의 마을로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자기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었다.
아펠은 왕국군과 같이 큰 도시를 습격하는 마족을 막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있었고 군대가 진입하기 힘든 산속 마을들에는 정예 기사 몇 명이 파견될 예정이었다.
특히 지버트에는 마을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공녀가 제국의 기사단을 직접 이끌고 가기로 했다.
“일단 그 지버트라는 마을에 적들이 많이 온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그럼 저도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렁찬 성량을 자랑했던 카르나타는 이제 근육질의 기사가 되어있었다.
아직 성인이 되려면 한두 해는 더 있어야 했지만 육체적 능력은 이미 마테스에 필적할 정도였다.
카르나타의 적극적인 참가 희망에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세냐르에게 시선을 향했다.
“도련님이 가시면 저도 가야죠, 뭐.”
블란테 변경백의 가신 가문 출신인 세냐르와 변경백의 손자 카르나타의 관계는 벨로나와 공녀의 관계와 비슷했다.
카르나타가 있는 곳에는 세냐르가 항상 있었다.
공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벨로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크게 두 조로 나눕시다. 아페르오네 경을 중심으로 한 도시 방위군 지원조와 저를 중심으로 한 유격조로.”
“네!”
기사와 생도들이 힘차게 대답했고, 공녀는 이미 가는 곳이 정해진 카르나타와 세냐르를 제외한 인원들을 나누었다.
생도들은 최대한 도시 방위군 쪽으로 돌리고 신입 기사 위주로 유격조를 뽑으니 공녀, 카르나타, 세냐르, 그리고 제레인이라는 신입기사와 시레온이라는 생도가 공녀와 함께 지버트 마을로 가게 되었다.
유격조의 유일한 생도인 시레온은 독특한 무기를 사용했기에 지버트에 가는 조로 뽑힐 수 있었다.
그의 활과 총을 본 사람들은 어김없이 시레온을 레인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화살을 피해 달려들던 대련상대가 오러를 두른 활대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 누구도 그가 기사단 생도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지버트 마을에는활을 잘 다루는 다크엘프들이 있으니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활솜씨를 높일 수도 있었고, 내친김에 다크엘프들에게 총술을 가르쳐줄 요량으로 공녀는 시레온을 유격조로 편입하였다.
조가 나뉘자 각 조의 조장인 공녀와 아펠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아펠 쪽에는 그들을 인솔할 교관이 따라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도들의 활약에 따른 시험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 왔을 뿐이었다.
신입기사들에게는 활약의 기회를, 생도들에게는 임관 시험의 벽을 단숨에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될 터였다.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남부 전장에서도 수많은 병사들과 일부 기사들이 죽어나갔으니.
하지만 그 정도까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생도들은 빠질 예정이었기에 공녀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파멸의 강림 때에는 바로 당해버릴 거야.’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과 생도들이 사실상 파멸과의 전투에서 핵심멤버로 활약할 수 있는 끝 세대였다.
바로 아래 후배들 중 뛰어난 아이들도 더러 참여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들은 경험도 실력도 육체적으로도 완성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공녀는 이 기회에 이 멤버들에게 전쟁의 경험을 잔뜩 시켜주기로 했다.
공녀의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나타를 비롯한 유격조는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공녀는 그들 곁에서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네!”
지버트 마을로 가는 길목인 피체르까지 열차를 타고 온 일행은 어느새 합류한 벨로나가 가져온 마석차에 탑승했다.
기차에 차량을 싣고 왔다는데, 그녀의 의외의 준비성에 공녀는 놀라야할지 운전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벨로나를 걱정해야할지 고민했다.
마석차는 넓은 평원을 질주했다. 최신형 차량이라 속도가 제법 나왔다.
커다란 바퀴 덕분에 조금 울퉁불퉁한 길에도 마석차는 막히는 일 없이 잘 나갔다.
작년 초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해보니 길의 포장이나 관리가 훨씬 잘 되어있었다.
분열의 말대로 길을 제대로 닦아놓은 모양이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차량 내부를 얼음의 마력으로 식히던 공녀는 냉방 기능을 아예 마석차에 넣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얼음의 마석은 구하기 힘들었지만 소량의 얼음의 마석과 바람의 마석을 잘 조합하면 냉풍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프리미엄을 붙여서 팔면 잘 팔릴 것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구상하던 공녀의 눈에 벌써 산 아래의 이어렌 마을이 들어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어서 빠르게 움직이면 오늘 안으로 지버트 마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 근처에 도착한 공녀 일행은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왜애애앵
마을 외곽의 집들이 불타고 있었다. 경고의 종소리와 사이렌소리가 요란했다.
공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흐릿한 암녹색의 마의 기운이 마을을 전체적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공녀와 기사들은 차량의 뒤쪽에 실려 있던 자신의 덧갑옷을 찾아 입었다. 그 사이 벨로나는 맨몸으로 검만 들고 나와서 차량 곁을 지켰다.
휙-
어디선가 날카로운 화살 몇 발이 날아왔다.
벨로나는 여유 있게 그것들을 쳐냈고, 그 사이 무장을 갖춘공녀와 유격조가 밖으로 나왔다.
“카르나타 경, 제레인 경은 나를 따라오고, 벨로나와 세냐르 경, 시레온은 여길 지키고 있어요!”
공녀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바람의 마력을 이끌어내어 주변에 둘렀다.
날아오던 화살들이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말려 올라갔다.
카르나타와 제레인이 따라붙자 공녀는 곧장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뒤쪽으로 공중에 떠있던 화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벨로나는 세냐르와 시레온에게 잠시 견제를 맡긴 다음 자신의 무장을 챙겼다.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가죽과 비슷한 재질이지만 강철만큼이나 베거나 찌르는 공격에 강한 옷이었다.
그리고 덧갑옷의 기능을 자체에 내장한 옷으로,공녀는 이를 ‘배틀슈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아직 본격적으로 보급되지 않았고, 개개인별로 크기와 마석 배합 등을 달리해야 했기 때문에 공녀와 벨로나가 우선 지급받아 시범으로 사용하기로 되어있는 물건이었다.
공녀는 중간에 키가 조금 크는 바람에 세부 조정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 아직 이 옷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배틀슈트를 쓰는 이는 벨로나가 유일했다.
덧갑옷을 위에 입지 않고 해당 기능을 내장했기에 거슬리게 덜그럭거릴 일도 없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처럼 무겁거나 운신이 힘들지도 않았다.
곳곳에 보호의 마석 기능을 내장한 특수한 금속으로 된 얇은 판막이 붙어있어 직접적인 충격에도 강했다.
그리고 등에 달린 납작한 금속 상자에는 숨겨진 기능이 있었다.
아가씨에게는 아직 숨겨두라고 들었기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세냐르가 단검 수십 개를 바람의 마력으로 공중에 띄운 채 날아오는 화살들을 맞춰서 떨어트리고 있었다.
언제 봐도 신기한 기술이었다. 벨로나가 생각하기에 저건 오러나 마력술이라기 보단 마술의 경지에 가까웠다.
세냐르보다 한 살이 어린 시레온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길가의 숲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활을 들어 올리자 나무 위의 인영이 흩어졌다. 입맛을 다신 시레온은 이번에는 손을 한껏 낮추고 몰래 총을 들었다.
다시 자리를 잡은 숲의 마족들의 기운을 추적한 그는 마족이 활을 쏘려는 순간 총을 들어올렸다.
타앙
특수탄환이 담겨있는 한 발의 사격으로 불꽃회오리가 일어나며 나무를 불태웠다. 마족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숲에 불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겁을 먹은 것인지 숲의 마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잘 했어, 시레온.”
벨로나가 시레온의 어깨를 툭 치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세냐르가 머리 위의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벨로나에게 말했다.
“적들은 물러났어요, 선배님.”
수십 자루의 단검이 순식간에 망토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던 벨로나는 잠시 제자리에서 경계를 했고, 세냐르의 말처럼 더 이상의 적습이 없자 차를 몰아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