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제 12 장. 전초전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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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대낮부터 쳐들어온 마족들에 의해 나무로 만든 마을 외곽의 집들에 불이 붙었고, 불을 끄러 가는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치고 있었다.
복부에 화살을 맞아 죽어가던 청년에게 달려간 공녀는 그의 몸에 물의 마력을 둘러주고 치유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청년의 숨소리가 안정되는 것을 들은 공녀는 화살을 뽑아낸 뒤 재차 치유의 마력으로 그를 치료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교관님!”
공녀의 뒤를 따라온 카르나타가 공녀를 엄호했고, 제레인은 안전한 곳으로 피난 가던 마을사람들의 행렬을 지켰다.
중간에 화살이 날아왔지만 총을 뽑아든 공녀의 반격에 더 이상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불길이 더욱 번지기 전에 물과 흙의 마력을 일으켜 화재를 진압한 기사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을사람들을 피신시키던 경비병이 달려오자, 공녀는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마을의 책임자는 어디 있죠?”
“아, 제국 기사단!”
늙은 경비병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공녀를 모셔갔다. 부상자들이 길게 늘어선 큰 건물 안쪽에 죽어가는 노인이 있었다.
“촌장님이십니다.”
“…….”
촌장의 가슴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촌장의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를 간호하던 소녀의 손을 붉게 적셨다.
촌장의 손녀로 보이는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 치유의 마력으로도 살려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공녀는 이를 꽉 깨물고 뒤로 돌아섰다.
게릴라로 치고 빠지는 마족들을 상대하기에는 인원이 턱없이 모자랐다.
왕국군이 얼마나 빨리 이곳으로 지원을 올지는 모르겠지만,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할 것이다.
그 사이 지버트 마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변에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이 있는지 순찰하고 오겠습니다!”
열혈 기질이 있는 카르나타는 마을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에 분개한 모양이었다.
긴 검을 꼬나든 채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는 그를 보며 공녀는 제레인에게 눈짓을 했다.
“교관님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공녀의 실력을 알기에 제레인도 더 이상의 군말은 하지 않았다.
카르나타를 따라 밖으로 나온 그는 밖에 남겨진 시민들을 찾아다니는 한편 마족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공녀는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족의 습격을 피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족히 200명은 되어보였다.
이곳은 제법 튼튼한 창고 건물이었지만 마을의한 구석에 있어 숲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공녀는 도망이라도 칠 수 있도록 다리를 다친 사람들 위주로 치료를 하며 지시를 내렸다.
“다들 입구 쪽 근처로 모여주세요.”
입구에는 공녀가 보호막의 마석을 펼쳐두었기에 강한 공격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고 여차하면 도망치기가 용이했다.
만일 마족들이 뒤쪽의 숲 쪽에서 벽을 깨고 들어오면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공녀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입구 근처로 모여들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무기를 꺼내든 공녀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쿠웅
방금까지 사람들이 있던 창고 뒤쪽의 숲에 가까운 방향이었다.
공녀는 오러를 끌어올렸다.
콰앙
창고의 한쪽 벽이 무너져내리며 큰 덩치의 거인이 난입했다.
‘숲의 거대 마족!’
“크아악!”
과거에는 오우거라 불렸던 마족이 괴성을 지르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왔다.
손에 든 거대한 몽둥이는 공녀조차 들기 힘들 정도의 크기였는데, 심지어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대로 맞으면 공녀라도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바로 뒤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있었기에 공격을 흘리거나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공녀는 피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마력을 온몸에 두른 채 덧갑옷의 모든 마석을 발동시켰다.
모든 부위에 4대 속성 마력과 빛의 마력의 반발력을 줄이는 마석을 하나씩 달고 있는 덧갑옷은 공녀가 쓰는 마력의 힘에 대한 제약을 푸는 도구였다.
예컨대 어렸을 때 바람의 마력을 무식하게 쏘아 보내고 어깨가 빠졌던 일 중에서 어깨가 빠지는 일만 막아주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공녀는 있는 힘껏 마력을 일으켜 거대 마족의 공격을 막아냈다.
기둥만한 강철 몽둥이가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공녀의 검에 가로막혔다.
‘큭.’
어깨가 빠질 것 같았지만 땅의 마력을 더욱 끌어내어 몸의 중심을 잡았다.
조그마한 인간이 자신과의 힘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자 마족은 몽둥이를 재차 휘두르려고 팔을 크게 뒤로 뺐고, 그 순간 파고든 공녀는 마족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컥!”
빠르고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뒤로 벌러덩 넘어가는 마족을 보며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낸 공녀의 시야에 뚫려있는 벽 너머에 늘어서있는 마족들이 보였다.
“흠.”
과연 카르나타와 제레인이 올 때까지 피해 없이 버틸 수 있을까.
그때 마을사람들 중 청년과 중장년들이 앞으로 나와 창고에 흩어져있던 판자 등을 들고 벽을 형성했다.
공녀는 이때다 싶어 가지고 있던 보호막의 마석을 전부 꺼내 그들에게 뿌리듯 나누어주었다.
“중요할 때 ‘보호막’을 강하게 떠올리면 공격을 막아줄 거예요.”
공녀의 말에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판자 뒤로 몸을 숨겼다.
공녀를 안내했던 늙은 경비병을 비롯한 몇 명의 경비병들이 창과 방패를 든 채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젊은이 같은 힘은 없었지만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공녀는 사람들을 믿고 앞으로 내달렸다.
마족들이 창고에 들어와서 흩어지면 막기가 힘들다.
마족들이 진입하기 전에 좁은 입구를 틀어막을 요량으로 달려간 공녀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바람의 마력으로 날려버리고 선두에 선 거대한 마족에게 오러가 가득 담긴 일검을 내질렀다.
카가각
금속이 통째로 깎이는 소리가 나면서 철몽둥이의 삼분의 일이 떨어져나갔다.
마족이 남아있는 몽둥이의 아랫부분을 쳐올려 공녀를 가격하려 했지만 몸을 한 바퀴 돌려 피해낸 공녀는 그대로 뛰어올라 2.5m미터가 넘는 높이에 있는 마족의 목을 쳤다.
공중에 잠깐 뜬 공녀를 향해 여러 발의 화살이 쏘아졌다.
바람의 마력을 일으킬 새도 없어 검과 망토를 휘둘러 화살을 쳐낸 공녀는 두 명의 숲의 거대 마족이 동시에 공격해오자 뒤로 살짝 물러났다.
이번에는 몽둥이가 아니라 거대한 검과 방패, 심지어 갑옷까지 입은 녀석들이었다.
저렇게 커다란 녀석들이 사용할만한 무구를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잠깐생각에 빠진 틈에 놈들이 공격을 해왔다.
앞선 두 녀석보다 무장도 제대로 갖추었고, 뒤쪽의 숲의 마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격으로 훼방을 놓았다.
공녀 혼자였으면 별 힘 들이지 않고 금방 해치울 수 있었겠지만, 조금만 몸을 옆으로 비켜도 마을사람들을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공녀의 행동반경은 극히 좁아져서 공격하기도 방어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싸우던 찰나 숲의 마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숲의 거대 마족들과싸우며 그것을 알아차린 공녀는 마력이 흐름이 바뀐 것을 느꼈다.
매우 강력한, 파멸의 마의 기운이었다.
콰앙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비룡이 공녀의 위로 떨어졌다.
비룡의 날카로운 발톱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린 공녀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비룡의 발목을 베어내려 했다.
캉
오러를 두른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공녀의 검이 튕겨져 나왔다.
혀를 찬 공녀는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마을 사람들이 등 바로 뒤에 있었다.
쿵 쿵
심지어 문 밖에서 명백히 적대적인 노크가 이어지고 있었다.
살짝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사내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 즉사했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문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공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배어나온 피를 핥으며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룡의 앞발과 부리가 뒤쪽에 닿지 않도록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너무 안일했어.’
카르나타와 제레인이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을 유인하는 조가 따로 있었을 것이었다. 하다못해 통신기라도 갖고 있었으면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차라리 지룡들과 싸울 때가 쉬웠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좁은 곳에서 싸우기에는 공녀가 자주 사용하는 기술들은 범위와 파괴력이 지나치게 컸다.
이런 곳에서 역속성 구체를 뿌려도 그 특성상 비룡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잘못 겨냥해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면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될 것이었다.
속성의 마력을 크게 일으켜 공격을 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피해도 간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
‘딱 한 명만 더 있었으면…….’
공녀가 이를 악물고 비룡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으려니 밖에서 들려오던 문 두드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으악!”
곧이어 뚫린 벽 뒤쪽에서 대기하던 숲의 마족들이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에 급소를 당해 픽픽 쓰러졌다.
공녀는 저 단검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세냐르!”
타앙
또 어디선가 쏘아진 마그마 탄에 숲의 거대 마족 한 명의 몸통이 갑옷 째 뚫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한 놈은 도망치다가 사방에서 날아온 단검 수십 개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키익!”
공녀를 공격하던 비룡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장 날아올랐다. 그 뒤로 탄환과 단검들이 날아들었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꼬리를 살짝 다치게 했을 뿐이었다.
“하아.”
공녀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뚫린 벽을 향해 들어온 세냐르는 마족들의 몸통에 꽂혀있던 단검을 회수하며 공녀에게 다가갔다.
“교관님! 괜찮으세요?”
세냐르의 망토에 빨려 들어가는 단검을 멍하니 보던 공녀는 자신의 뺨을 양 손으로 찰싹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세냐르 경.”
“아니에요. 벨로나 선배가 교관님이 이쪽에 있다고 해서 온 거니까 선배 덕분이죠.”
그 사이에 합류한 시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벨로나는?”
“선배는 입구 쪽 놈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시레온의 말에 공녀는 창고 정면에 있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족의 시체 몇 구가 나뒹굴고 있었고 벨로나가 자신의 세검을 닦으며 주위를 경계하다가 공녀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공녀 역시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기사님들.”
마을사람들의 감사인사에 공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 일행이 한 시간만 늦었어도 이어렌 마을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상황에서 겸손을 떨 필요는 없었다.
“남아있는 마을 분들이 더 있을까요?”
경비병이 마을사람들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안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일단 인원파악 해보시고, 여긴 너무 위험하니까 피체르나 지버트로 가셔야할 것 같습니다.”
공녀의 말에 마을사람들은 동의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버트 마을은 이곳보다도 더 공격을 많이 받는 곳이었다.
대부분 피체르 시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혀 공녀는 카르나타와 제레인이 오면 일행을 나누어 피체르로 마을사람들을 보내하기로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무너진 창고 건물을 보고 달려온 카르나타와 제레인이 무릎을 꿇었다. 공녀의 예상대로 그들은 도망치는 마족들을 추적하다가 비룡이 마을로 가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온 참이었다.
“진짜 기사라면, 다음부터는 일반인들의 안전을 우선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교관님!”
카르나타와 제레인의 합류로 인원이 전부 모이자 공녀는 계획했던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 피체르 시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전부 구해내고 보니 250명이 넘는 규모라 지키는 싸움에 능한 벨로나와 체력이 남아도는 카르나타가 가기로 했다.
“저희는 여기서 혹시 밖으로 대피했다가 다시 올 사람들을 기다리겠습니다.”
마을의 경비병들의 말에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마친 공녀는 곧장 일행을 출발시켰다.
벨로나와 카르나타가 사람들을 인솔해 마을 동쪽으로 빠져나가자 공녀와 세냐르, 제레인, 시레온은 마을 서쪽의 산맥으로 이어진 출구로 향했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비룡이 산맥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분열. 들려?
- 아리에.
- 그쪽은 괜찮아?
- 평상시랑똑같아. 숲의 마족 몇 명이 왔다 갔다 했어.
- 조심해. 지금 이어렌인데 여기 마을이 완전 박살났어.
- 뭐? 진짜?
- 응. 무장을 갖춘 숲의 거대 마족이랑 비룡까지 있었어.
- 비룡…….
공녀의 말에 분열이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 비룡, 방금 잡았는데.
- ……뭐?
공녀는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