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놈아, 어여 일어나!”
“…….”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네. 오늘 같은 날 늦잠 자면 어떻하냐?”
“…스님 아버지?”
“어허, 스님이 아빠지. 엄마겠냐? 빨리 씻고 한술 떠라. 시험장까지 공 처사가 태워 준다고 기다린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아버지가 보여?”
사정없이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
아프다! 진짜 아프다. 정신이 번쩍 든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플 수 없지 않나? 왜 아프지?
나는…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그것도 산 채로 땅에 묻혀서, 숨을 컥컥거리다 죽었는데.
너무 선명하고 끔찍한 기억. 55살까지 살았던 김시혁의 삶. 박하 담배를 물려 주던 백정의 무심한 눈길. 한 삽 한 삽 끼얹던 흙더미. 그 와중에 코로 스며들던 쟈스민 향.
그게 다 꿈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이던지.
연속으로 날아오는 스님의 손바닥. 소림의 백보신권 못지않게 아프다.
“학력고사 당일에 뭔 생각이 그리 많아? 냉큼 준비하고 나오너라.”
학력고사? 맞다. 내가 본 건 수능이 아니라 학력고사였다. 그렇다는 말은 진짜 김시혁이… 개같은 인생을 자책하며 숨이 끊어졌던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이네.
그것도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는 날로.
스무 명의 원생이 같이 사용하는 세면장은 아침이면 북새통을 이룬다. 아주 어린애들을 제외하면 다 등교 준비를 하느라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 밖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서 있다. 시혁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다들 아니까.
시혁은 코끝이 아렸다. 예쁘고 착한 동생들. 조만간 시혁은 보육원을 떠나게 된다. 20살 이후에는 더 있고 싶어도 나가야 한다.
세면장의 금간 거울에 비친 시혁의 모습… 진짜 돌아왔다. 19살의 생생한 육체로.
185센티의 늘씬한 키, 연예인 찜 쪄 먹게 잘생긴 얼굴, 길쭉한 팔다리… 시혁은 한동안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목에는 스님 아빠가 걸어 준 녹색 옥 목걸이가 영롱하게 걸려 있었다.
머릴 감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었다. 깨질 것 같은 냉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침착하자, 김시혁!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오늘 집중할 일은 따로 있다.
대한민국이 숨을 죽이는 날이 오늘이잖는가.
비행기가 운항 시간을 바꾸고, 도로마다 경찰관이 늘어서서 차량 경적을 단속하고, 공무원들은 출근 시간까지 늦춘다. 돈을 다루는 은행도, 증권시장도 개장 시간을 연기한다.
거리에는 수험생 등교용이라 종이를 써 붙인 차가 즐비하다. 경찰 오토바이도 혹시 늦는 학생이 있을까봐 독수리 눈빛을 한 채 긴장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래, 고민은 나중에 다시 하자. 오늘은 대입 학력고사만 생각하자.
문제는… 벌써 삼십 몇 년 전 치렀던 학력고사, 과연 몇 개나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대학교 법대는 고사하고 인서울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총명한 머리를 자랑하던 시혁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책가방을 챙기며 시혁은 잠시 예상 문제지를 뒤적였다. 이도 졸업한 선배가 버린 것을 주운 것이다.
“……!”
아! 하나씩, 하나씩, 기억이 난다. 문제지를 덮었지만 자구 하나, 지문 하나까지 모두 되살아났다.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과목이 마치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클릭한 것처럼 떠올랐다. 오히려 더 디테일해지고, 더 섬세하게 뇌리에 박혔다. 이러면 다르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다르지.
가자! 왜 다시 살아났는지 상황파악은 잠시 미뤄 두고.
맹세한다. 앞으로 남의 뜻에 맞추는 거지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며, 내가 완성하는 내 인생… 내 삶을 살아 주마.
오늘 그 첫 단추를 꿰는 날이다.
* * *
시험장은 보육원 근처 중학교. 이것까지 똑같다.
기억 자로 세워진 중학교 건물의 이 층, 2- 7 교실 중간열에 앉았다. 역시 똑같다.
이제 김시혁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명확히 밝혀진 셈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86년 11월 20일. 전국에서 대입 학력고사가 동시에 실시되는 날이다.
연합고사, 국가고사, 예비고사라는 이름을 거쳐 1994년 수학능력평가(수능)으로 바뀌기 전까지 학력고사로 불리는 대입 시험.
필기 320점에 체력장 20점을 더해 총 340점이 만점이지만 지금껏 만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원 역사에서는 1999년 수능에 최초로 등장했었다.
시험장에 모인 수험생들의 눈은 한결같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본의 아니게 긴긴 잠에서 깨어난 시혁만 멀쩡했다.
50명이 꽉 찬 교실은 침 삼키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싸늘한 긴장감.
시혁도 아침에 잠시 보았던 예상 문제지를 꺼내 몇 장 넘겨 보았다. 뭔가 하는 시늉이라도 안 하면 이상하게 몰리는 분위기다.
시혁은 예전 필기시험에서 302점을 받았었다. 체력장은 이미 20점 만점을 취득해 놓았으니 총 합계 322점으로 한국대학교 법학과를 가볍게 합격할 수 있는 점수였었다.
가장 치명적으로 점수를 많이 까먹은 과목이 영어와 수학이었다. 거의 만점을 받은 암기 과목과 달리 허수와 함정에 빠지기 쉬운 영, 수 과목에서 점수를 많이 잃었던 것이다.
영어? 이제 아무 문제가 없지. 이자룡을 따라 미국 생활을 하면서 원어민보다 더 능숙하게 구사한다.
제2외국어? 때마침 일본어를 선택했던 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이자룡이 처음 유학을 간 곳이 일본 아니던가.
수학? 다른 아이들처럼 과외는 고사하고 학원 문턱도 못가 본 것이 두고두고 가슴에 맺혀서 한국대학교에 입학 후 교내 수학 동아리를 줄곧 다녔었다. 교수와 붙어도 자신 있는 경지다.
무엇보다… 하늘이 기회를 주는 것인가?
틀린 문제의 토씨 하나, 소수점 하나까지 다 기억이 난다. 팔뚝을 쓸었다. 소름이 돋았다.
개같은 인생으로 생각하며 숨을 멈췄던 55년의 삶. 정녕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인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 * *
마지막 교시의 벨이 울리고, 다들 좀비처럼 숙였던 고개를 들고 환호를 질렀다. 잘 치렀던 못 치렀던 지긋지긋한 학력고사가 끝났다. 홀가분한 것이다. 간혹 눈물이 맺히는 아이들도 보인다. 생각보다 잘 보지 못했구나.
시혁은 터덜터덜 가방을 들고 교문을 향해 걸었다.
교문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꼭 학력고사를 치르는 날은 혹독한 동장군이 휘몰아치곤 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닌 듯 더럽게 추운 날이다. 그러나 교문에는 그 긴 시간동안 학부모와 각 학교의 선후배들, 아직 다 팔지 못한 엿과 떡을 팔려고 눈치 보는 상인들까지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사람.
어디에 있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모 덕분이다. 스님 아버지. 염주를 걸고 합장한 자세를 아직도 풀지 않고 있다.
아… 아버지!
“뭐 해요? 청승맞게.”
“아이고, 내 새끼. 고생했다.”
“고생은 뭐… 대충 찍고 오는 건데.”
“그게 더 힘든 법이여. 이놈아. 다 아는 걸 억지로 찍으려면 얼매나 힘들었겄냐? 헐헐헐.”
연신 등을 쓰다듬는 스님.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이던 스님을 이젠 내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자랐건만, 여전히 아이로 보이나 보다.
“시혁아. 오늘을 잊지 말거라. 네가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날인겨. 뭐든 스스로 헤쳐 나가는 게다. 용이 개천에서 강까지 헤엄쳐 나갔으니 승천하는 것만 남았구나.”
“용 같은 소리 하네. 이무기라도 됐으면 좋겠다.”
“이놈의 자식, 이 스님 눈에도 보이는 것을 네가 못 본단 말이야?”
“됐고, 이 목걸이는 도대체 어디서 난 거예요?”
“…응, 그거 주웠지. 중국에서.”
“샀다며?”
“아냐,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거린다만, 항주 서호 근처 뇌봉탑(雷峰塔)이었을 거야. 다 무너진 탑 주변을 돌던 중이었는데… 거기서 뭔가 반짝거리길래 주웠어. 왜?”
“그냥… 예쁘기도 하고, 옥으로 된 것이라 비싼 건가 싶어서.”
스님과 공 사의 차를 타고 보육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혁은 내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36년을 거슬러서 다시 살아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숨을 거둘 당시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일한 물건… 이 옥 목걸이.
스님 말로는 내가 보육원에 입소하는 날 목에 걸어 주셨다고 하셨다. 칭얼거리던 내가 이 목걸이를 주자 방긋 웃었다고 한다. 스님은 농담 삼아 윤회를 거듭하던 내 영혼이 중국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이 목걸이가 내 모든 액땜을 해 줄 것이라고 하셨지만…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회귀를 한 이유와 이 목걸이는 깊은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다시 살아난 것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평생 감기 한 번 앓아 본 적이 없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복근이 뚜렷이 새겨질 정도로 건강했던 신체. 그리고 소문난 수재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지금도 차창 밖으로 스쳤던 모든 풍경이 사진첩을 펼친 듯 또렷이 선명하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보육원으로 돌아와 목걸이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작은 옥 조각. 따뜻하다.
돌맹이가 따뜻해? 그러고 보니 표면이 매끄러운 게 아니라 약간 결이 보인다. 그 결은 마치 하나의 글자를 형성한 것처럼 느껴진다.
운(雲)… 운 자가 맞는 것 같다. 구름 운.
일부러 새긴 모양은 아니다. 오랜 세월 자연의 풍화작용에 의해 깎이고 닳은 흔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리 살펴도 별다를 게 없는 작은 옥 조각.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그러다 시혁은 다시 옥 목걸이를 걸고 깊은 잠에 빠졌다.
시혁이 잠에 들자 옥 목걸이는 조금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목걸이 한가운데 구름 운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혁은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 * *
웅성이는 사람들. 뭔지 소란스럽다.
얼핏 보면 대학 강의실 같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초라한 풍경이다. 저런 책상과 칠판을 지금도 쓰는 곳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낡았다.
그런데 칠판에 잔뜩 적힌 글자들… 모조리 한문? 거기다 시혁이 배운 바가 없는 간체자(簡體字),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가 아닌가. 또 서로 싸우듯 말을 주고받는 사람도 다 중국인?
키가 작은 한 학생이 열띤 표정으로 말을 쏟아 내고, 교단의 교수는 난감한 모양으로 반박을 하는 것 같다. 내용은 영어 교육의 대혁신이 필요하다는… 그런 것이다.
‘……!’
문제는 내가 그걸 다 알아듣고 있다는 것, 간체자 역시 완벽히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아무리 꿈이라지만…….
- 마운, 네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거 알고 있나?
- 교수님, 지금 방식으로는 절대 외국인과 프리토킹이 불가능합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영어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나중에 자네가 공산당 고위 간부가 되면 그리 바꾸도록 하게나. 13억 인구 중에 7명 상무위원까지만 올라가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네.
‘왁!’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수의 말에 강의실의 모든 학생은 박장대소하며 마운이라는 학생을 비웃었다. 얼굴이 붉어진 마운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버린다.
저 해묵은 논쟁은 중국에서도 변함없이 벌어지는구나.
그런데…….
왜 내가 저들의 대화를 다 알아듣고, 왜 칠판의 간체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알아듣는 정도가 아니라 말의 숨은 뜻까지 속속들이 귀에 꽂히잖아?
무엇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설마…….
마운(馬雲)이라는 이름.
그… 마운? 삼송을 우습게 볼 정도로 대제국을 건설한 알라딘(Aladdin)의 회장 마운? 중국 최고 갑부, 포브스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중국인, 수천 조 자금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재신(財神).
‘네가 왜 내 꿈에 나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