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3화 (3/150)

3화 개꿈

‘헉!’

시혁은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아직 여운이 가득하다.

너무 생생했던 꿈같지 않은 꿈. 과연 이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삼자의 시선으로 지켜보았지만,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었다.

시혁은 시계를 보았다. 전면 유리에 금이 간 탁상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분명 꿈속 강의실의 벽시계는 오후 3시였다. 다만, 그게 어제 오후인지 확실치 않다. 날짜를 특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지금은 어느 누구도 마운을 모르겠구나. 그가 몇 년 후 창업하게 되는 알라딘 닷컴이 얼마나 엄청난 기업으로 성장하는지도 모르겠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금융 부분을 총괄하는 또 다른 회사 자이언트 그룹이 무려 3,500조 원의 자금을 움직이게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없겠구나.

하지만 나는 안다. 마운이라는 인물의 미래를.

시혁은 기억의 창고를 뒤적여 마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마운이1964년 생이니까 시혁보다 4살 더 많다. 거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마운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광적으로 영어에 매달렸다.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무조건 영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마침 마운이 태어난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抗州)의 호수 시후(西湖)는 유명한 관광지로 외국인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마운은 온종일 마주치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눌한 마운의 영어는 점점 다듬어지고, 세련되게 변했다. 원어민보다 더 능숙한 프리토킹이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중국 시대상으로 볼 때 정말 센스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공부는 그닥 잘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수학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관계로 전체적인 성적도 별반 좋지 못했다. 덕분에 가오카오(高考, 중국 학력고사) 점수가 모자라 두 번 연속 대학에 떨어졌다. 겨우 삼수만에 항저우 사범대학에 입학했으나, 일류도 아닌 이류 대학도 운좋게 결원이 발생하면서 턱걸이로 들어갔다.

그다음… 모르겠다. 의외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네? 세상에 공개된 흔한 이야기 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시혁은 마운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자룡과 마운이 사업차 미팅을 할 때, 수행원으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이게 전부다.

그 작고 초라하게 생긴 사내, 겨우 163센티미터의 단구에 얼굴도 과히 호감형이 아닌 마운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지던 기세… 후광이 확 번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놀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개꿈일 수도 있지.

긴 하루를 보낸 여파로 이해하자. 왜 한 번도 공부한 적 없는 중국어가 들리고 간체가 해석되는지 알 수 없으나, 상황 자체가 비상식적이지 않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차분하게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지피지기 해야 백전백승할 수 있는 법(知彼知己百戰百勝).

시혁이 싸워야 할 대상은 녹록한 이가 아니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대 재벌 삼송의 후계자 이자룡, 결국 삼송그룹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한국의 모든 기득권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 모른다. 그만큼 삼송그룹의 뿌리는 깊고도 넓다.

그래도 기다려 줘.

이 개자식아. 제발 기다려 줘.

이번 생은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너를 갈아 마시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주마.

철저히 짓밟아 줄게. 이자룡!

* * *

마운은 항저우의 사범대학 교정을 나서면서 분을 참을 수 없어 씩씩거렸다.

다 썩었다. 학교도, 교수도, 교육부도 마찬가지. 지금껏 수도 없이 건의를 했건만 하나같이 기존 방침을 바꿀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중국은 너무 오래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왔다. 그 같잖은 죽의 장막에 갇혀서 후진국으로 몰락한 것이다. 일찍이 지난 역사 동안 중국은 세계 경제의 35%를 담당했었다.

그랬던 중국이 세계은행 총재가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 지구촌 빈민 문제의 67%가 중국에 있다고? 뼈아프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달라지고 있다. 중국이.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덩사오핑(鄧小平) 동지의 개혁 개방이 먹히고 있는 것이다. 남쪽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선전(深玔)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광동같이 문을 열어젖힌 일선 도시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중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려면 무조건 세계 공용어로 쓰고 있는 영어는 필수다. 선택이 아니다. 무조건이다.

그런데 저 돼지 새끼들의 머릿속에 똥밖에 없으니 답답한 것이다.

“이봐, 마운!”

“응, 첸수룡. 왔나?”

“한바탕 붙었다며?’

“말귀에 말뚝 박힌 당나귀들과 붙어봐야 뭐해? 이제 포기하련다. 제길헐.”

“하버드는 또 소식 없고?”

“거기도 감감무소식.”

“너도 참 질기다. 벌써 몇 번째나 지원서를 넣는 거야?”

“흐흐흐, 열 번 두드려서 안 열리는 문이 없다길래 그대로 했지. 이번이 열 번째 지원서를 보냈는데… 안 되네.”

“너무 앞서가려고 하지 마.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 잊었나?”

“친구야, 앞서가는 게 아니라 뒤쳐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야. 정확히 하자고.’

“알았으니까, 얼른 총장님께 가 봐. 수업 끝나는 대로 총장실로 오라고 연락 왔어.”

나이는 세 살 어리지만 동기의 전언을 듣고 총장실에 당도한 마운은 옷부터 살폈다.

아직 쌀쌀한 날씨건만 얇은 옷차림이 걸렸다. 이 인민복도 얻어 입은 것이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헐렁하다. 할 수 있나… 원래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 신세인걸.

“오! 어서 오게. 마운.”

“안녕하셨습니까? 총장님.”

“그래, 티관인(鐵觀音) 차 한잔하려나?”

“예,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제 처지에 철관음 같은 고급 차를 이럴 때 아니면 어디서 맛보겠습니까?”

“원, 친구하고는… 말에 가시가 잔뜩 들어 있어?”

“…….”

“장 교수랑 그만 부딪히게. 자네가 가장 잘하는 것이 영어 아니던가? 그런데 영어교육과 교수와 자꾸 반목하면 어떡하나?”

“죄송합니다. 총장님. 쉽지 않네요. 장 교수님은 도대체 소련에서 뭘 배우셨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영어는 미국의 말입니다. 그걸 소련식 발음으로 가르치니까 첫 번째 문제인 것이고, 거기다 되지도 않는 문법과 독해 위주로 하는 강의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유일하게 마운을 이해하는 사람. 우 총장이 아니었다면 항저우 사범대학교도 입학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 연달아 대입에 실패하고 삼수생 신분으로 지원한 항저우 사범대학교마저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똥구멍 찟어지게 가난한 집에 손을 벌릴 수 없는 일,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런 판국에 사수? 죽어도 더 못 한다.

포기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든가? 그래도 아쉬워서 전문대학을 기웃거릴 때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그것도 낙방한 항저우 사범대학 총장에게서.

결원이 생겼는데, 입학하지 않겠냐고… 영어 하나만큼은 똑소리 나게 한다고 입시원서에 썼던데 해 보지 않겠냐고… 앞으로 영어를 모르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없다는 포부에 관심을 가졌다고…

“자네, 첫 번째 떨어졌을 때 어느 대학을 지원했었나?”

“베이징 대학입니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네만… 가오카오 점수는 몇 점이나 받았지?”

“네, 총장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점수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내가 알면 안 되나?”

“우선 수학이 1점이었습니다.”

“……! 딱 일 점?”

“네.”

총장은 거의 데굴데굴 굴렀다. 이 미친놈! 진짜 미친놈! 지금까지 하는 짓으로 봐서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마운 학생. 세상이 자네를 몰라주니까 서운하지? 자네는 스스로 숨은 보석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렇지?”

“예, 솔직히.”

“그럼, 자네가 세상을 무시하게나.”

“……!”

“자네를 몰라주는 세상에 불평을 할 게 아니라, 세상이 자네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면 될 거 아닌가. 무시하게. 세상을.”

“다만, 그때까지는 이빨과 발톱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네. 왈패의 다리 사이를 기어간 한신(韓信)의 사례를 명심하게나.”

“…….”

“이제 삼 학년이 되었으니 내년이면 졸업반, 그때까지 무난히 학교 생활을 마치면, 직접 추천장을 써 줌세. 마침 내 군대 동기가 항저우 전자 기술대학 학장으로 부임했더군. 약속하지.”

마운의 꿈은 교수였다. 영어교수. 장 교수 같은 엉터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영어를 가르치는 참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 마운에게 총장은 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마운의 인생을 바꿔 준 두 사람 중 하나인 우 총장.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류에 불과한 항저우 사범대학 졸업생이 바로 다른 대학의 영어 강사로 간다? 이게 현실이 된다면 역시 전설로 남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계기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잘 있었나? 친구!]

“모린! 항상 전화를 걸게 해서 미안해.”

[하하하하. 아직 중국은 외국으로 전화하기 쉬운 곳이 아니니까 충분히 이해하네. 오늘 하루는 어땠나?]

“죽을 지경… 분명히 중국은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변함이 없어. 경직된 화석 같아.”

[마운, 드레곤은 말이야. 잠을 오래 잔 다네. 그러나 한번 눈을 뜨면 무섭게 변하지. 세상을 온통 흔들고 말지. 자넨 드레곤이야.]

“모린, 호주가 그리워. 뉴캐슬의 정경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 평등과 풍요로움, 그리고 거기서 느낀 자유… 이게 잦 같은 현실을 견디는 원동력이야.”

[마운, 나는 믿어. 용틀임치고 있다 했던가? 중국도 그렇지만 자네의 내심 깊숙이 잠재된 드래곤도 곧 잠에서 깰거야. 공상은행(工商銀行)으로 돈을 조금 보냈네. 건강 잘 챙기고 오늘도 굿럭!]

중국이 개방되는 초기, 1980년 호주. 중국 친선협회의 일원으로 항저우를 방문한 호주인 몰리를 만난 건 마운의 생에 있어서 큰 축복이었다.

겨우 16살의 어린 나이에 산 영어를 익히려 발버둥치던 마운은 서호 관광 중인 몰리에게 무작정 다가갔다.

“저,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현지 발음을 배우려고 합니다. 혹시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대신 항저우 여행 가이드 해 드릴게요.”

“…….”

160센티미터도 되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학생, 얼굴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글주글 이상하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느껴진 열망.

이 학생은 진심이구나.

왠지 모를 끌림에 몰리는 일행과 따로 떨어져 일주일이나 마운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이 작은 소년의 가슴에 숨겨진 불덩이를 발견한 몰리는 호주로 귀국하자 바로 초청장과 항공권을 보냈다.

문제는 비자, 중국인 밀입국자와 불법체류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호주 외교부에서 마운의 비자는 번번이 거절되었지만 몰리는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결국 비자를 받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방문한 호주에서 마운은… 자유를 알아 버리고 말았다.

훗날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몰리와의 우정으로 인해서 오늘날 마운이 있노라고 마운은 말하곤 했었다.

* * *

시혁은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학교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시혁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지금까지의 추론이 다 맞았다.

책상 위에 가득한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어떤 분야, 어떤 내용이건 다 기억한다. 다 해석이 가능하다. 깊이 들어가면 그에 관련된 공부를 더 해야겠지만 일단 한번 정독한 책 내용은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버린다.

- 동화 대백과사전 287페이지 17번째 줄… ‘개쑥부쟁이’는 구계쑥부장이, 또는 큰털쑥부장이라고도 한다. 산과 들의 건조한 곳에서 자라며 높이 35~50cm이다. 줄기는 곧게 서고 가지를 치며 털이 난다. 7월과 8월에 두상꽃차례를 이뤄 가지와 줄기 끝에 꽃이 핀다.

- 형사소송법 314조… (증거능력에 대한 예외) 제312조 또는 제313조의 경우에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진술을 요하는 자가 사망, 질병, 외국거주, 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더 확인할 필요가 없어. 다 맞았다. 내가 엄청난 것을 얻었구나.

특히 중국을 위시한 생판 듣도 보도 못하던 나라의 말과 글이 읽힌다. 저절로 해석되고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꿈을 꿨던 것일까? 마운의 꿈을.

그래서 교수와 논쟁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마운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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