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우연과 인연
1986년은 화약고에 심지가 타들어 가는 해였다.
4월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6월에는 영국 대처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또 일본 엔화가 미친 듯 폭등하더니 100엔당 500원을 돌파했다.
한국대 의류학과 여학생이 공활 중 체포되어 부천 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고대생 9명이 미 대사관을 점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원 체포되었다. 성균관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전방 입소를 거부하고 농성에 돌입하기도 했었다.
10월에는 북한이 금강산 댐으로 한국을 물에 잠기게 한다는 수공설을 발표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말도 안 되는 조잡한 공작이었지만 학자들은 침묵했다.
텔레비전을 켜면 9시 뉴스 첫 꼭지에 무조건 대머리 대통령의 동향을 보도하는 ‘땡전뉴스’가 규칙처럼 지켜졌다.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공중파가 아양을 떠는 세상.
국민을 지키라고 쥐어 준 총칼로 국민을 학살한 살인자를 찬양하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암흑기였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피의 살육제가 조금씩 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폭풍의 눈 같은 1986년이 지나갔다. 다가올 태풍을 감춘 채.
* * *
한국대학교 교무과 여직원 소정 씨는 눈을 비볐다. 지금까지 전례로 봤을 때 첫날 접수하는 수험생은 거의 없었다.
선시험 후지원 방식의 어쩔 수 없는 병폐인 것이다. 거의 막바지 날 지원서의 95%가 접수된다. 그것도 마감 한 시간을 남겨 둔 시간부터.
어찌하리. 평균 5명 중 1명이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 각 대학, 각 학과의 지원율을 보고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생 개개인의 적성? 그런 말은 개나 줘라. 그건 극소수에 해당하는 말이다. 오로지 점수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결정해야 한다. 일단 붙어야 하니까.
그런데 갓 문을 연 1월 10일 9시 정각에 원서를 들이미는 이 학생. 잘생겼다… 어디서 본 듯하기도 하고.
뭐 나름 소신도 있고, 자신도 있나 보네… 어디 보자. 학생 이름이… 소정 씨는 자신도 모르게 지원서를 들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네. 네가… 김시혁이구나.”
“네, 누나. 잘 부탁합니다.”
“저… 미안하지만 조금 기다려 줄 수 있니? 지금 교무과장님이 안 계신데.”
“어? 교무과장님 계셔야 접수되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 관례상 최고 득점자 학생이 접수할 때 사진도 좀 찍고… 하거든. 안 되겠니?”
“뭐, 그렇다면 기다릴게요. 점심 전에 오시겠죠?”
“어머머, 고맙다. 곧 오실 거야. 그동안 접수는 누나가 받아 줄게. 역시 법대구나. 내신도 1등급이니까 무조건 수석 입학은 맡아 놨네. 미리 축하해도 되지?”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빨리 접수하고 한 며칠 여행을 가고 싶었다. 거창하게 여행이라고 했지만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바다가 있는 도시 어디든 가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스님 때문에 무산으로 정하고 말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시혁은 회귀한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지 못했다. 바다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싸울 것인지 고민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정 씨의 눈물 나는 노력이 빛을 발했다. 전화기를 붙잡고 수십 통을 돌린 끝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교무과장… 근데, 혼자가 아니네?
“아이고, 우리 시혁 학생. 뭐가 그리 급해서 첫날 점방 문 열자마자 오셨나그래?”
“아… 네, 그냥.”
“반갑네. 내가 교무과장이야. 그리고 여기 같이 모신 분은 말이야. 교육청에서 나온 오 국장님이시네. 인사드리게.”
“네, 안녕하세요. 김시혁입니다.”
“여기서 보게 되네. 김시혁 군. 며칠 동안 보육원으로, 수없이 전화를 했지만 안 받더군. 결국 한국대학교에 접수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부탁을 좀 해 뒀지. 자네 오면 꼭 연락해 달라고.”
“아! 산사에 전화가 한 대밖에 없는데, 그만 고장이 나서 연락이 안 됐을 겁니다. 그런데 저를 왜요?”
태식이가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스님 방에 딱 한 대 있는 전화기를 분해한 뒤 결합을 하기는 했는데 사망한 것이다. 당연히 연락이 안 되지. 다시 사기 전에는.
“자네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 난리가 났어.”
“예?”
“역사 이래로 만점을 받은 최초의 인물 아닌가. 나라에서도 특별 관리를 해야 한다 이말이지.”
“저는 그런 거 필요 없는데요? 혹시 장학금을 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지만 만점 받았다고 호들갑 떨고 싶지 않습니다.”
“오호, 역시 만점다운 생각일세. 장학금이야 한국대학교 차원에서 4년 전액을 보장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문제는 저 위에서 자네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야.
이 아저씨, 육덕진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손에 끼워진 커다란 반지와 금장 시계가 번쩍거렸다.
저 위라면 장관을 말하는 모양인데. 관계없다. 당신들과 나는 갈 길이 다르니까.
“그래,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지 뭔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지. 각하께서 자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하셨다 이말이야.”
“……!”
이건 아니지. 완전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 나왔다.
땡전뉴스 대머리가 나를 왜?
“보니까 배낭 메고 어디 여행이라도 떠날 생각이었구먼. 미안하지만 그 계획 며칠 미루게. 청와대에서 부르면 재깍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거든.”
“안 됩니다. 약속이 있어서.”
“……!”
미안하기는 합니다. 나는 추호도 그쪽 사람들과 친해질 마음이 없어요. 괜히 도매급으로 같이 엮여서 두고두고 욕먹을 생각… 일도 없답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나? 감히 대통령 각하의 부르심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어디 있다고.”
“제가 평양감사를 할 마음이 없어서요. 누나, 다 됐으면 접수증 주시겠어요? 기차 시간 늦을 것 같은데.”
시혁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벙찐 국장, 교무과장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소정 씨는 슬며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시혁도 빙긋 마주 웃어 주었다.
내가 싫다는데 어쩔 거야?
* * *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에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시혁이 손에 들고 있는 한국대학교 법학과 지원서를 본 담임과 학생주임은 별도 따 줄 기세다. 당당히 허락을 받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주머니도 두둑했다. 몇 년은 돈 걱정 없을 정도로 후원금이 들어왔으니 마음 편히 다녀오라며 스님이 내놓은 봉투에는 자그마치 십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호 기차표까지.
미래에는 KTX에 밀려 빛을 잃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최고 등급의 고급 기차가 새마을호다. 아직 타 본 적이 없다. 자그마치 150킬로미터로 내쏘는 새마을호는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4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
뻑하면 연착하는 무궁화호나 비둘기호와 비교할 수 없다. 좌석도 안락하기 그지없다.
아직 출발까지 10분의 시간이 있었다.
시혁은 스페인어로 된 두꺼운 책을 펼쳤다. 중고 책방에서 산 것이다. 무슨 내용인지 아직 모르지만 ‘자유를 향한 끝없는 울림’이라는 제목에 끌려 충동구매를 한 책이다.
겪을수록 신기한 일이다. 평생 에스파냐어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다. 유럽 지사를 순방한다는 핑계로 마드리드에 애인과 밀회 여행에 나섰던 이자룡을 수행하느라 들린 것이 전부인 스페인.
사용 인구수로만 따지면 중국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 째지만 한국인에게는 낮선 언어가 에스파냐어다. 영어처럼 빈번하게 쓰이는 언어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읽힌다.
동화책 읽듯이, 만화책 보듯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작가가 어떤 의미로 이 단어와 문장을 연결했는지 속속들이 느껴진다.
나 미친 건가?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어떤 때는 이런 자신이 낯설다. 마치 19살 김시혁의 껍질을 하고 있지만 55살의 영혼을 밀어 넣은 호두까기 인형 같다. 몰래 볼을 꼬집어 본 적도 있었다.
“김시혁 학생!”
그때, 상념에 잠긴 시혁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완장을 찬 객차 승무원과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떡대 죽여주는 사람들.
딱 그림이 그려진다. 아… 빌어먹을 새끼들.
“그런데요?”
“일어나게, 같이 좀 가 줘야 겠네.”
“저 표 샀는데요?”
“그건 상관없고, 당장 일어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이제 말도 없이 두 명은 시혁의 양 손을 잡고 일으킨다. 승무원은 선반에 얹어 둔 배낭을 내리고.
“놓으세요. 후회하기 전에.”
“훗…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아. 다친다.”
시혁이 양손을 거칠게 털었다. 순식간에 두 명의 떡대가 통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냥 튕긴 것이 아니라 좁은 통로의 다른 좌석에 부딪쳐 충격이 제법 컸을 것이다. 열차 승무원은 배낭을 들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시혁이 각성한 또 하나의 놀라운 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도망가는 태식의 뒷덜미를 대롱대롱 잡아 패대기를 치면서 알게 되었다. 정확히 측정을 해 보진 않았지만 씨름선수단 전체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듯 샘솟는 괴력.
진짜 미친 건가?
“놓으라고 그랬죠?”
“이, 이. 이 새끼.”
“제대로 하자면 언제든 좋아요. 그런데… 에휴! 그냥 갑시다. 아저씨들이 무슨 죕니까?”
“…너, 김시혁 맞냐?”
“안기부? 아니면 경호실? 어디서 오셨는데요?”
“…….”
승객들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도주중인 학생인가? 겨우 그런 학생 하나 잡자고 안기부 혹은 대통령 경호실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또 저렇게 비참하게 당해?
“저… 시혁 오빠, 맞죠? 이번에 학력고사 만점 받으신.”
탈 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고생 정도의 소녀가 수줍게 물어 왔다. 이 살벌한 상황이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사인 한장만 해 주시면 안 되요?”
“어? 미안하지만 오빠 연예인 아니거든. 아이돌 오빠를 찾아가면 안 되겠니?”
“아이돌이 뭐예요? 저는 오빠처럼 공부 잘하는 남자가 섹시하더라. 사인해 주세요. 네?”
아차! 지금은 아이돌이란 말이 없던가? 그나저나 이 소녀… 꽤나 용감하고 당돌하다. 오히려 검은 양복이 뻘쭘해서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슬쩍 봤지만… 보통이 아니다. 미래 같으면 길거리 캐스팅을 매일 당할 정도로 예쁜 모습이다. 빤짝거리는 건치와 초승달처럼 휘는 눈자위, 170은 넘겼을 키와 매끈한 종아리, 귀밑으로 살짝 내린 애교머리가 너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학생이었다.
외모도 그렇지만 옷차림도 만만치 않다. 우산 로고가 선명한 저 브랜드는 명품이 아님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로 치는 옷이다. 거기에 하얀색 프로스펙스 운동화까지…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에구, 내가 무슨 생각을… 겨우 고삐리에게.’
“그래. 이리 줘. 아저씨들, 좀 기다려도 되죠? 팬이라 는데 싸인은 해 주고 가야죠. 이름하고 학교 말해 봐.”
“리라 고등학교 1학년 1반 노예지.”
“좋은 학교 다니네. 공부 열심히 해라. 그게 최고 효도야. 알았지?’
“오빠! 진짜 잘생겼다. 딱 내 스타일이야. 키도 크고.”
귓가로 훅하고 스며드는 샴푸 냄새, 고개를 못 들겠다. 얘 뭐냐? 노련한 여인이 마음에 드는 남자를 꼬시듯 거침이 없네.
“거기 끝에 내 사랑을 담아 예지에게… 이렇게 써줘요. 학교 가서 자랑하게. 헤헤헤헤.”
“…….”
가만 보니 검정 양복을 막고 있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 명함을 건네고, 그 명함을 받은 검뎅이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보통 신분은 아니란 소리네. 저런 보호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면.
아직 몰랐다. 시혁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 된다는 것도.
서서히 출발하는 기차 차창 밖으로 검뎅이들과 함께 멀어지는 시혁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망울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꼬였네요.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대통령이 부른 이상 다음 기회를 보시죠. 어른도 걱정하고 계셔요.”
“에이, 부산까지 가는 동안 작업 치면 딱이었는데. 할 수없지. 내 남자가 너무 잘나도 탈이네. 기차 세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진짜 기차가 도심 한가운데 섰다. 이 말괄량이 철부지 소녀 한 명을 내리기 위해.
넌 또 누구냐?
* * *
역에는 또 검뎅이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꼭 까만색을 좋아할까? 그래야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먼저 검뎅이 한 명이 타고 뒤 이어 시혁이 오르자, 다시 그 옆에 앉으려는 사람을 손으로 막는 시혁.
“잡혀가듯이 끼여 가고 싶지 않거든요? 아저씨는 저 뒷차 타고 오세요. 같은 일행 맞죠?”
“……!”
“귀에 그런 수신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이 흔한가요? 딱 보니 알겠네. 뭐.”
“저 짙은 썬팅 차에 탄 사람들 모습이 보여?”
“예, 제가 눈도 밝은 편이라서.”
“너… 진짜 괴물이구나.”
“대통령 각하 기다리는 거 싫어하실 텐데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분수가 있지. 완전히 이 학생의 페이스에 천하의 경호실 정예요원들이 꼼짝 못 하고 있다.
가 보자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주지. 권력 찬탈자, 살인마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