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똑같은 목걸이의 등장
“각하께서 물을 때만 대답해야 합니다.”
“예.”
“두 손은 항상 보이도록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각하의 존안을 직접 노려보지 않도록 하세요. 항상 각하의 입을 주시하면 됩니다.”
“예.”
“조금 있다가 각하께서 들어오시면 여기 소파 뒤에서 사십오 도로 허리를 꺽어 인사하고, 앉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착석하면 안 됩니다.”
“예.”
“각하보다 먼저 잔을 들면 안 되고, 또 먼저 다 마셔도 안 됩니다. 소파에 등을 붙이지 말고 약간 중간 정도만 허리를 세운 채 걸터앉도록 하세요.”
“아저씨.”
“의전 비서관입니다.’
“예, 비서관 아저씨. 이 과자 먹어도 돼요?”
“…안 됩니다. 각하께서 권하면 그때 하나를 집어 살짝 깨물고 내려놓으세요.”
“방구가 뀌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
이놈, 고분고분하는 듯하지만 심상찮다.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건 아닌지… 괜히 불렀나?
다시 한번 강하게 주의를 주려고 했으나 접견실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선 경호관이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의전 비서관과 시혁은 몸을 일으켜 소파 뒤에 나란히 섰다.
이윽고 등장하는 전도환 대통령과 국회의원 노태후.
피가 쏠렸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주역들이다. 저 두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맘껏 뒤틀어 버린 만고의 죄인.
“다들 앉지. 김시혁 학생도 앉게나.”
“예. 대통령 각하.’
“우선 축하하네. 큰일을 해냈어.”
“네.”
“뭐가 되었건 최초라는 타이틀은 평생 가는 영광이지. 잊혀지지 않거든. 만점을 받다니. 대단해.”
“네.”
“그래. 한국대 법학과에 원서를 냈다고?”
“네.”
“앞으로 법관이 될 생각인가 보군. 자네 같은 인재가 사관학교를 가야 하는데 말이야. 껄껄껄.”
“각하, 제가 보육원 출신입니다. 군 면제 대상입니다.”
“지원하면 되지.”
“지금까지 320점 이상 받은 학생이 사관학교를 간 적 있습니까?”
“허, 이 친구 당돌하구먼. 한마디를 안 지네.”
“이 과자, 각하의 허락을 받으라고 하던데 먹어도 됩니까?”
“…….”
좌중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런 놈은 처음봤거든. 누구든 청와대, 그것도 각하의 개인 집무실에 불려오면 좌불안석, 안절부절하기 마련이다. 천하의 현두와 삼송 회장조차도.
그런데… 과자 먹어도 되냐고 물어본다. 과자를.
“푸하하하, 각하. 재미있는 학생입니다. 비록 반골기질이 있어 보이지만 나름 신선하지 않습니까?”
“흠. 그런가? 노 의원 눈에는 귀엽게 보이는 모양이지?”
“예, 각하께서 그러셨지 않습니까? 겨울이 깊어야 봄이 가깝다고… 시련을 홀로 이겨 낸 잡초 같은 학생입니다. 이정도 깡다구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저는 마냥 귀엽게 보입니다. 이 과자, 같이 드시죠. 저도 땡깁니다.”
의외다. 진짜 의외였다.
시혁은 미래에서 노태후에 대해 너무 많이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보통 사람 시대를 열겠다고 했지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했던 사람. 그래서 별명이 물통령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강단을 보이다니. 세상이 잘못 보고 있구나. 노태후를… 절대 물태후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시혁을 향해 빙그레 웃는 노태후.
“먹게, 김시혁 군. 맛있네.”
“아… 예, 맛있습니다.”
“갈 때 좀 싸 줄까?”
“예, 주시면 좋죠. 산사의 스님 아버지가 이런 단 음식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래그래. 뵌 적은 없지만, 자네 같은 동량을 키워 내신 것만 봐도 도력이 높은 스님이겠어. 많이 싸 줌세. 하하하하.”
이상하다. 간질간질한 이 기분.
이 방은 전도환의 집무실이건만 왠지 노태후가 주인 같은 느낌. 어느 정도 전도환도 그렇게 인정을 하는 듯싶은 분위기… 왜일까?
“김시혁 군.”
“네. 대통령 각하.”
“내년이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해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거고, 대한민국이 재도약할 기회란 말이지. 근데, 국민들 반응이 좀 시큰둥해. 이럴 때 자네 같은 인재가 좀 나서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해 주면 싶은데… 어떤가?”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음. 공보처에서 올린 계획서를 보면 말이지. 올림픽 홍보 모델, 또 방송 출연, 강연 같은 것도 있고, 하여튼 다방면에서 국가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라… 이런 말이지.”
이 정도 이야기라면 한참 밑의 직급을 가진 공무원들이 나서도 되는 일, 적어도 집무실에서 대통령이 거론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 알겠다. 오늘 시혁을 보자고 한 사람은 전도환 대통령이 아니다. 노태후다.
왜 노태후가 시혁을 불러들였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저 표정은… 호감이다.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노태후.
시혁의 기억에 의하면 조만간 이 사람은 민공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당 총재가 되며, 결국 13대 대통령이 된다.
소위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이 시혁을 보고 싶어 했고,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 3월이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나이지?”
“예, 의원님.”
“좀 도와줄까? 사회에 적응하려면 자립 정착금 가지고 턱도 없을 텐데?”
“아닙니다. 돈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습니까? 스스로 헤쳐 나가 보겠습니다.”
“오! 역시 만점자다운 패기일세. 각하, 멋지지 않습니까? 꼭 우리가 하늘회를 만들 때 보였던 결기가 생각납니다.”
“쩝, 뭐… 나쁘지 않구먼. 김시혁 군. 명심하게나. 행여 한국대학교에 진학한 후 좌파 빨갱이들 무리와 놀아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대한민국을 좀먹는 놈들이고, 저 북한 괴뢰의 지령을 받는 놈들이야. 명심해.”
당신은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당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저지른 무수한 악행도 문제지만, 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는지… 왜 천신만고 끝에 입학한 대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들어야 했는지… 아예 이해할 생각이 없는 당신의 무지와 꽉 막힌 사상.
세상에 흑백논리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적이냐, 동지냐? 아뇨, 동료도 있고 친구도 있어요.
제발 올해 벌어질 악몽의 역사가 멈추길…….
* * *
“미안하네. 시간이 많이 늦었구먼. 하여튼 좋은 여행 되길 빌겠네.”
“예, 아저씨들도 늦게까지 고생하셨어요.”
“새마을호가 아니라 무궁화호라서 또 미안하고.”
“오히려 좋은데요. 한숨 푹 자고 나면 도착하니까 걱정 마세요.”
확연히 변한 태도. 어린 학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사내로 여기는 모양이 역력하다.
남자는 부딪쳐 봐야 없는 정도 생기는 법이다. 시혁을 열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리려던 경호실 요원은 진심으로 시혁에게 탄복한 눈치다.
“경호 3과장 이상호라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연락해라. 다시 한번 정식으로 붙어 보자. 오케이?”
“당근 콜이죠. 저도 제 힘의 한계치를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합니다. 꼭 연락드릴게요.”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 다 수컷이다. 서열을 정하고 싶은 건 수컷의 본능이다.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이상호 과장이 작게 보일 즈음, 어두운 차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넘어왔다. 서울을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1982년 야간 통행금지령이 해제된 것도 아이러니하게 전도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내년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는 것으로 확정된 후 국가 위상을 고려해 풀었던 것이다. 오래전 전설이 아니다. 겨우 5년 전까지 밤 12시만 넘으면 다음 날 아침 5시까지 집밖을 나갈 수 없었으니까.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를 탄 시혁의 마음은 착잡했다.
전도환은 예상했던 딱 그대로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사람이 아니다.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을 무차별 학살했듯이 쉽게 멈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노태후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릴 정도로 예상 밖이었다는 것.
저런 사람이 물태후, 물통령으로 불렸다고? 말도 안 돼.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 전략가가 아니라면 야수의 심장을 가진 효웅, 둘 중 하나인데 의외로 소탈한 느낌에 살짝 혼란이 왔다. 전도환과 확연히 대비되는 색깔…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아직 판단할 시기는 아니다.
과자는 스님에게 따로 보낸다고 했는데 잘 받으셨나 모르겠다. 우선 있는 것이라도 가져가라고 챙겨 주던 노태후 의원.
효웅도 괜찮으니 제발 간웅은 아니길.
잠시 책을 보던 그대로 잠에 빠진 시혁. 무궁화호는 천안역으로 경적을 울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잠든 시혁의 가슴에서 잔잔한 옥빛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 * *
- 마운, 자네가 아무리 주석이라도 혼자 독단적인 결정을 하면 어찌하나? 동의할 수 없네.
- 항저우 대학도?
- 그렇네.
- 저장(浙江) 대학 역시?
- 당연하지. 거부하네.
- 다들 제정신 맞아? 이건 우리 항저우 학생 연맹에서 해야 할 일이야.
- 그건 자네 생각이고, 정 하려면 사범대 혼자 하시게. 연맹 전체로 확산시키지 말게나.
‘헉’… 또 들어와 버렸다.
한 번은 그렇다치자. 연이어 두 번씩…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꿈은 맞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냉정해. 김시혁! 이유는 어차피 알게 될 일,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이번에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 항저우 학생연맹의 존립 이유가 뭔가? 학생들의 복지 증진과 향학 분위기 조성이잖나. 그에 합당하고 투명하게 공개를 하자는 것인데 왜 반대를 하는지 모르겠어.
- 이봐, 마운. 석공이 어디를 때리는지 아나? 모난 곳일세.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어차피 연맹 회비는 얼마가 걷히는지 따로 회계를 하지도 않아.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연말에 총액과 이월액만 공개하게 되어 있어. 그걸 왜 미리 까 보인단 말인가?
- 창 위원. 연맹 회비는 학생들이 쌈짓돈을 털어 납부하는 돈이야. 세금처럼 투명하게 사용하고, 회계를 철저히 하는 게 우리 연맹 주석단의 임무잖나? 이를 매월 공개하자는 내 생각을 모난 것으로 표현하지 말게.
- 그래, 세금… 말 잘했어. 세금을 다 납부하는 회사가 어디 있는데? 절세를 넘어 탈세 안 하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으면 말해 봐. 내 손가락을 걸지.
- 설마, 지금 다들 연맹 회비를 사적으로 쓰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 …이봐, 마운. 우리가 항저우 이류 대학 출신인 자네를 연맹 주석으로 선출한 이유가 뭔지 잘 생각하라고.
흠. 여기도 구린내가 펄펄 나는구나. 저놈들은 작당을 해서 학생회비를 빼돌려 왔고, 마운이 그걸 공개하자고 하니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네?
중국 놈이 중국하고 있는 현장이다.
자! 이제 마운 너의 반응을 보자. 너는 어떤 놈이냐?
- 이건 도적질이야. 나는 절대 묵과할 수 없어.
-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맘대로 해.
- 창 위원, 자네 아버지가 항저우 공안국장이라는 것, 다 아니까 그리 뻔뻔하게 나서지 않아도 돼.
- 알면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거 곤란한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어차피 공산당 세상이거든. 괜히 자네가 다치면 우리는 또 새로운 주석을 뽑아야 해. 귀찮은 짓 안 하도록 하세.”
‘왁’하는 웃음이 또 터졌다. 영어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마운을 비웃던 것과 똑같다.
- 나는 끝까지 싸울 거야. 설사 공안이 나를 체포한다고 해도 불의를 보고 참을 수는 없어. 그러려고 대학에 들어온 것이 아니니까.
- 대학? 여기도 사회의 축소판일세. 다 그렇고 그런 꽌시(關系)로 연결되어 있거든. 여기 모인 위원들 중에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은 마운, 자네 혼자야.
아무리 마운이 열변을 토해도 각 대학 위원들은 비웃고 있었다. 어느 집 변견이 짓느냐는 표정이다.
치솟는 울분을 감당치 못하겠는지 마운이 걸치고 있던 인민복을 벗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때, 마운의 가슴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저건?
너무 익숙한 모양.
19년 동안 시혁이 가슴에 걸고 살았던… 그 목걸이.
운(雲)자가 새겨진 그 옥 목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