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7화 (7/150)

7화 비밀을 엿보다

‘헉!’

눈을 뜬 시혁은 여전히 무궁화 열차에 있었다.

‘또… 들어갔구나.’

시계!

손목의 카시오 전자시계에 떠 있는 숫자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분명히 봤다.

마운이 논쟁을 벌이던 학생 연맹의 사무실에 걸린 시계도 3시였다. 창밖이 환했던 것으로 보아 오후 3시일 터.

정작 충격적인 일은 사무실의 달력, 하루하루 찢도록 된 일회용 달력은… 1월 11일.

아직 닥치지 않은 오늘 오후 3시.

‘그런 것인가? 나는 마운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하루 뒤를 꿈에서 보는 셈인가?’

시혁보다 네 살 더 많은 마운이지만, 삼수를 하는 바람에 마운이 올해 4학년생이고 시혁은 새내기다.

여기서 1년 시차가 생기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나이 산정법과 입학년도 차이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마운과 시혁은 똑같은 날들을 살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만약 지금 추론이 맞다면, 시혁은 마운의 하루 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봤던 상상치 못했던 물건… 그 목걸이.

시혁은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 꺼내 다시 살펴보았다. 틀림없이 똑같은 모양이다.

이 볼품없는 옥 목걸이가 한 쌍이었구나. 어쩌면 이 목걸이로 인해서 마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항저우까지 그 멀고 먼 거리를 뛰어넘고 12시간을 앞당겨 마운의 미래를 보도록 하는 매개체… 이 목걸이가 만든 운명 아닐까?

아직은 모든 게 미로다.

* * *

“놓쳤다고? 그게 말이 돼?”

“…….”

“안기부 블랙 요원이 겨우 갓 대학교에 들어가는 놈 하나 커버 못 했다?”

“죄송합니다.”

“그놈 해외 지국 중에서 가장 오지로 발령 내. X신 같은 새끼.”

“저… 한 명이 아닙니다.”

“……!”

“세 명을 붙였습니다. 부장님 지시를 제가 어찌 허투루 하겠습니까? 고르고 고른 최고 정예들이었습니다.”

“맹랑한 놈이다. 감히 각하의 심기를 거스른 놈이야. 거기다 노태후 선배의 눈치가 이상해. 점점 각하와 대등하게 맞먹으려고 한단 말이지. 노 선배 주변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철저히 차단하도록!”

“부장님, 어차피 대권을 넘겨야 합니다. 노태후 의원과 관계를 좋게 좋게 회복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요물 같은 것이다. 각하가 퇴임한 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약점을 쥐고 있어야 하는 거 몰라? 가뜩이나 학생들 때문에 시국이 어수선한 판국이야. 불만 붙이면 터지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지. 틈을 주면 절대 안 돼.”

“…예.”

“노태후는 각하와 달라.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평생 각하의 보살핌을 받아온 주제에 차기 대통령까지 물려 받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변했어. 눈앞에 대권이 보이니까 점점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말이야. 에잉… 못마땅해.”

단둘만 앉도록 되어 있는 밀폐된 방에서 심상찮은 대화가 오고 갔다.

이 둘은 장사동 안기부장과 1차장이다.

장사동은 청와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중이었다. 오직 한 분뿐인 주군, 전도환 대통령을 위해서다.

임기가 겨우 1년 남짓 남았다. 이제 슬슬 퇴임 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주군은 친구인 노태후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다. 일견 타당한 일이다. 독기를 품고 있는 야당의 삼김(三金)이 대권을 잡으면 바로 정치보복을 하리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니까 사후 안전을 위해서도 노태후가 맡는 것이 옳기는 하다.

하지만, 장사동은 노태후가 심히 마땅치 않았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냥 싫었다.

같은 사관학교 기수로 만난 주군과 노태후는 줄곳 친구였지만 상하관계처럼 지내 왔다. 주군이 가장 먼저 진급을 하면 공석이 된 전임 자리에 노태후를 천거해 앉혔다.

주군이 챙겨주지 않았다면 별은커녕 진작 군복을 벗어야 할 무능력자가 노태후라는 생각에 속으로 경멸해 왔던 것이다.

X신 같은 놈, 찌질한 놈, 주군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순탄하게 진급을 해온 덕분에 오늘날 호강을 다 누리는 못난 놈 주제에.

꼴에 선배랍시고 잡다한 지시를 하는 노태후가 그냥 보기 싫은 장사동 안기부장은 얼마 전 이상한 보고를 받았다. 청와대로 학력고사 만점을 받은 학생을 부르는 일이 있었는데, 실상은 주군이 아니라 노태후가 만든 자리라는 것.

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을 부르면서 청와대 이름을 파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즉시 안기부 블랙요원을 시켜 뒤를 밟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최정예 요원 세 명이 꼬마를 놓쳐?

“좀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 꼬마 혹시 북한에서 밀봉교육이라도 받은 거 아냐?”

“그건 아닙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놈이고, 보육원에서 성장했다는 것과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사항이 없습니다.”

“계속해.”

“먼저, 부산역에서 해운대까지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한 명은 같이 동승해서 감시했고, 두 명은 차량으로 뒤를 밟았답니다.”

“…….”

“다음 해운대에서 하차한 후 목표가 달맞이 고개를 넘어 청사포쪽으로 이동했다 합니다. 거기가 워낙 지형이 거칩니다. 절벽도 많고요.”

“그래서?”

“…보고서를 보고 마치 소설 같아서 제가 팀장을 불러 직접 들었습니다만… 허참!”

“어허, 서두가 길다.”

“예,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몇 미터 바위를 그냥 뛰어넘더랍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낭떠러지 너머로 유유히 가는 목표를 뻔히 보면서도 쫓아가지 못했다 합니다.”

“어디 아파?”

“……하지만, 사실인 듯합니다. 세 명의 진술이 일치합니다.”

“허허허. 이걸 믿으라고?”

“블랙 요원들은 모두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북한에 던져 놔도 홀로 생환할 수 있는 최고들이죠. 그런 놈들이 넋을 잃고 쳐다봤다 합니다. 어떤 요원은 원숭이 같다고 했고, 다른 요원은 도약하는 호랑이 같다고 표현을…….”

“나가!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장사동이 재떨이를 움켜쥐자 1차장은 급히 머리를 감싸고 뒷걸음쳤다.

‘제길, 나도 그랬다고요. 오죽했으면 세 놈 오줌을 받아 약물 검사를 했겠어요.’

* * *

시혁의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움푹 들어간 만처럼 생긴 곳에서 우연히 찾은 동굴. 우측으로는 멀리 해운대가 보인다. 좌측으로는 또 송정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보이고.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거칠게 불어오는 1월의 바닷바람. 까마득한 발밑 낭떠러지에는 파도가 몸을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시혁은 미동도 없이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55년의 삶이 토막 난 필름처럼 엉켜 복잡했다.

왜 다시 회귀했을까?

왜 이 시점일까?

왜 몇 달 전 지나쳤던 거리의 풍경들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각인될까?

왜 어떤 책이건 보기만 하면 저절로 기억이 되는 걸까?

왜 듣도 보도 못하던 세상 모든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왜 신체 능력이 이토록 놀랍게 활성화되었을까?

왜 전혀 관계없는 마운을 꿈에 엿보게 되는 걸까?

왜 마운과 나의 시간은 비틀어져 있는 것일까?

왜, 왜, 왜?

그중심에… 이 목걸이.

그저 작은 옥 조각에 불과하다. 운(雲)이라고 새겨진 부분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모된 흔적으로 보일뿐 글자 같지도 않다.

아무리 살펴봐도 별다를 게 없다.

그러나 이 옥 조각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장 중국으로 날아가 마운을 만나 확인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아직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인이 해외로 나가려면 기업 출장이나 유학, 해외 취업 같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 시절. 시혁의 기억에도 내후년 1989년에야 비로소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게 주어진 이 능력, 생생한 나이… 이 기회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운명은 내가 어디로 가길 바랄까?

그리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원수… 삼송의 이자룡에게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까?

출발선이 너무 다르다. 이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존 재벌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삼송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몇이나 될소냐.

그 격차를 줄일 방법, 그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종내에는 이자룡이 스스로 땅을 파고 산채로 들어가 묻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론은.

돈이다.

대한민국이 삼송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는 그들을 존경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가진 상상치 못할 돈 때문이다. 삼송이 뿌리는 엄청난 돈의 위력은 정계와 재계와 사법, 언론을 망라하고 광범위하게 뻗쳐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말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서구 사회의 구호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국가가 보살핀다는 의미로 쓰여 왔다.

즉,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뜻이다.

삼송이 은밀히 목표를 정하면 이 말을 꼭 강조한다. 당신이 삼송의 그늘로 들어오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한다. 생활, 부, 권력, 쾌락까지 모든 것을 다 해 준다…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성인군자, 많지 않다. 구십 퍼센트는 넘어간다.

그래… 결론은 돈이다.

삼송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삼송에 넘어가지 않은 십 퍼센트의 세력을 포섭해서 저항군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력 간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내 편이 필요하니까.

‘돈을 벌어야겠다.’

삼송이 넘보지 못할 만큼 막대한 부를 손에 넣어야겠다.

시혁은 다시 옥 조각을 목에 걸었다. 운(雲)이라는 글자를 이루고 있던 작은 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조금전과 비교하면 윤곽이 선명해졌다. 물론 시혁은 보지 못했다.

* * *

제법 수염이 자랐다. 십 일 동안 동굴에서 칩거하며 명상에 잠긴 까닭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생각도 정리되었다. 앞으로 갈 길에 대한 계획도 수립했다. 목표가 정해진 것이다.

시혁은 무작정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연희동으로 향했다. 연희동에는 전도환의 옛집도 있지만,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노태후 의원의 집도 있다.

‘최소한의 종잣돈을 만들기 위해서 부딪쳐 보는 거다.’

시혁은 종잣돈, 시드 머니를 만들 가장 빠른 열쇠를 가지고 있는 노태후를 만나야 했다. 비빌 언덕이라곤 지금 현재 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이런 배짱이 생겼는지 모른다. 만나 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받은 느낌이 너무 강렬했다. 왠지 노태후라면…….

“누구라고?”

“김시혁이라고 합니다.”

“학생! 너 아프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찾아와? 머리에 총 맞았어?”

거칠게 밀어내는 경찰. 노태후의 집 대문까지 가보지도 못했다. 아예 골목 모서리에 설치된 간이 초소에서 막히고 말았다.

난감하다. 그렇다고 밀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다. 경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고, 아무 연관도, 사전 약속도 없는 어린 학생을 출입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생각과 현실의 벽은 이렇게나 두텁구나. 사실 좀 억지스러운 일이었어.

돌아가자… 실망한 채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 시혁 오빠 아녜요?”

자전거를 탄 여학생이 등장하자 초소 안에서 나오지도 않던 경위 계급의 경찰이 급히 나와 경례를 올린다.

“아가씨, 혼자 외출하시는 겁니까?”

“아뇨, 저 뒤에 시커먼 차 따라오잖아요.”

“아, 그렇군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시혁도 여학생의 난데없는 등장이 신기했다. 이름이 노예지라고 했던 새마을호의 그 여학생 아닌가?

가만? 노예지? 노… 씨 성?

“여긴 웬일이세요?”

“응, 예지구나. 여기서 또 만나네?”

“우와! 제 이름 기억해요?”

“그럼, 리라 고등학교 1학년 1반 노예지. 오빠가 처음 싸인해 준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여전히 잘생겼다. 수염까지 야성적이네. 진짜 딱 내 스타일이야.”

“고맙다. 예지야. 또 보자. 오빠는 가 봐야겠어.”

“아직 대답 안 하셨잖아요? 요기 왜 왔어요?”

“…응, 노태후 의원님을 좀 뵈려고 했는데, 약속이 안 돼 있으면 힘들다네. 혹시 기회가 되면 다시 오려고.”

“오빠! 들어가요. 내가 만나게 해 드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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