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예상 밖의 투자 제안
“오빠! 이거 먹어. 저것도 맛있어. 참, 이건 바나나… 물 건너온 거야. 필리핀 산. 그리고 이거 미제… 캘리포니아 오렌지랑 파인애플.”
정신이 없다.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예지는 온 집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덕분에 아줌마는 냉장고에 있는 모든 과일을 다 꺼내야 했고.
얘가… 노태후의 막내딸일 줄 상상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살다 보니 이런 인연도 있구나. 놀랍다.
“그런데, 그때 새마을호는 왜 탄 거니? 어디를 가려고?”
“……!”
“수행한 분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부산? 대구?”
“어? 어… 대구. 거기 할아버지 집에.”
“학교도 빼먹고?”
“…….”
“너, 공부 못하지? 임마, 열심히 해야 해.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 알았어?”
“응, 나름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네. 오빠가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말 몇 마디 섞더니 어느새 슬쩍 말을 놓고 코맹맹이 소릴 한다. 왠지 아줌마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 여시, 탱자탱자 놀면서도 전교 1등은 맡아 하는 것이.’
“가족은 어떻게 되니?”
“응, 아빠랑 엄마. 그리고 큰언니랑 오빠는 미국 유학 중이라 나도 못 본 지 몇 년 됐어.”
노태후에게 이런 늦둥이 딸이 있는지 몰랐다. 재벌 2세와 결혼한 큰딸의 뉴스는 종종 접했지만 막내딸은 전혀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때, 밖이 소란스럽다.
- 왔구나.
“아이고, 이게 누구야? 김시혁 군 아닌가?”
“안녕하셨습니까? 의원님.”
“음… 분위기가 확 달라졌네. 어디서 도라도 닦고 온 모양일세.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결례를 용서 바랍니다.”
“아니야,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예측 불허한 일도 있는 게지. 그런데, 우리 막내하고 면식이 있었던가?”
“아빠, 이거 먹어. 내가 깎았어.”
“어, 으응. 그래? 웬일로 과일을 다 깎았다니? 신기하네?”
“무슨 소리야! 아빠 과일은 항상 내가 준비하잖아?”
당황해서 말문을 막는 딸의 모습이 그저 좋은 모양이다.
씽긋 웃는 노태후, 하트가 뿅뿅 솟아 나는 것 같다. 늦둥이의 사랑스런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는 딸 바보의 전형이다.
“그래, 이렇게 온 이유를 좀 들어보지. 서재로 옮기는 게 어떤가?”
“네, 좋습니다.”
“딸, 남자끼리 시간을 좀 가져도 되겠지?”
“응, 아빠. 커피는 항상 하던 대로 내가 타 줄게.”
“…으응. 그래 줄래? 근데, 아빠 크림하고 설탕 몇 스푼 넣는지 아니?”
“아빠!”
그렇게 서재로 둘은 서재에 마주 앉았다. 노예지가 어설픈 커피를 내올 때까지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딸이 서재 문을 닫자마자… 전혀 다른 사람이 시혁의 앞에 앉아 있었다.
“짐작했는지 모르지만, 청와대로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였어. 그렇다고 자네가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올 정도는 아니지 않나? 지금부터 커피를 다 마시는 십 분? 아니, 이십 분을 주겠네. 그동안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볼 필요 없을 걸세.”
이 사람,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노태후에서 전장을 호령하는 뇌회한 장군이 시혁을 거칠게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이 이 사람을 모르고 있구나. 속고 있거나.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오늘 노태후의 마음을 잡아야 미래를 위한 첫 단추를 꿸 수 있다.
“제가 의원님의 미래를 바꿔 드리려 합니다.”
“허허허, 세상이 학력고사 만점 받는 것처럼 말랑말랑해 보이나?”
“의원님은 항상 이인자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전도환 대통령의 한 발 뒤에 서야 했지요. 지금도 그렇고요.”
“…이놈!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라. 너 정도는 언제든 실종자 명단에 올릴 수 있어.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나불대는 거냐?”
거칠게 내뱉는 노태후, 이렇게 시혁이 훅 들어올지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시혁은 무덤덤했다. 내친 걸음이다.
“12월 12일 거사를 성공한 이후로도 그렇습니다. 보안 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은 뒤 정무 장관을 하셨죠. 그것도 정무 2장관을… 또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쳐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셨고, 지금은 민공당의 의원 뺏지를 다셨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여기서 더 할 말이 없으면 일어 나라. 내가 너를 서재로 들인 것이 실수였나 보다.”
“아직 이십 분에서 일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입으로 두말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입이 떡 벌어진 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잠시 그렇게 시혁을 노려보던 노태후는 한숨을 후 몰아쉰 뒤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약속한 것이니 더 들어주마. 그러나 시간이 다 차도록 내가 납득이 안 되면, 네 당돌한 짓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르게 될 거다.”
“감사합니다. 불쾌하시겠지만 계속하겠습니다.”
“…….”
“남들이 볼 때는 나름 요직을 거쳤다고 하겠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실권이 없는 자리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보직만 맡으셨어요.”
“갈수록 태산이군. 더 해봐!”
“전도환 대통령이 보안 사령관 당시 핵심 측근이었던 허삼소 대령, 허화풍 대령, 그리고 자산일보 출신으로 측근에 합류한 허만도 현 장관까지 ‘쓰리 허(許)’가 국정을 장악한 마당에 무슨 힘을 쓰셨겠습니까?”
“으, 흐, 음.”
점입가경이다. 어느 누구도 노태후의 면전에 대놓고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일개 대학 신입생 어린놈 입에서 이렇게 신랄한 독설을 듣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노태후.
저절로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약속만 아니었다면 벌써 죽통을 날리거나, 비서관을 불러 끌어냈을 것이다.
“이제 오 분 지났다. 힘들지만 더 해 봐라. 이 빌어먹을 자식!”
“곧 대선 정국에 들어갑니다. 의원님도 불안하실 겁니다. 후보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거죠. 전도환 대통령의 복심은 다른 곳에 있지 않나? 하는 불안감 말입니다.”
“…….”
“맞군요. 장수동 안기부장과 노신형 총리가 의원님의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
“걱정 마십시오. 그 두 사람은 절대 후보가 되지 못합니다. 의원님이 결국 13대 대통령 후보로 낙점될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거지? 네 말대로 대통령의 의중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이냐?”
노태후의 지금 처지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낙관적이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분하지만, 이놈의 진단은 송곳처럼 정확하다. 거침없이 심장을 헤짚는다.
“이제 조금 대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광주학살 때문입니다.”
“……!”
“전도환 대통령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12. 12 군사 쿠데타가 아닙니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이미 잡은 정권, 다음 대통령이 이 추악한 전모를 파헤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죠. 이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무의식이 깊게 박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유약한 나다? 또 같이했으니까?”
“예, 그렇습니다. 설사 의원님이 싫다고 거절해도 맡길 겁니다. 공범이 후사를 맡아 주면 다리 뻗고 잠들 수 있으니까요.”
아프다. 이놈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박힌다. 그럼에도 빨려든다. 이놈의 다음 말이 너무 궁금하다.
“좋아, 과거는 접어 두고… 어차피 내가 대권을 물려받는다니 기분은 좋구먼.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예, 후보가 되신 후부터 진짜 전쟁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두에 그랬습니다. 의원님의 미래를 바꿔 드리겠다고… 시간이 다되었군요. 더 들으시겠습니까?”
그때 노예지는 서재의 문밖에서 귀를 붙이고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쩜 좋아, 머리만 좋은 게 아니네. 끝내준다. 이 오빠.’
이십 분으로 한정했던 시간은 세 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예지는 침을 코끝에 발라가면서 다 들었다.
* * *
주방이 발칵 뒤집어졌다. 외출에서 돌아온 김옥순 여사는 영문도 모른 채 남편의 호통에 음식을 차려야 했다.
“시혁아, 이거 먹어 봐라. 예지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찜닭 하나는 기막히게 잘한다. 그리고 요거요거, 된장국… 캬아,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몰라요.”
“아빠, 된장국은 내가 끓였어. 오빠 많이 먹어.”
“…그럼, 이건 놔두고… 그래그래. 이 돼지갈비 먹자. 하하하하.”
김옥순 여사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외출에서 돌아온 집에서 처음에는 딸이 정신을 쏙 빼놓더니 이번엔 남편까지 침을 튀기며 대접하는 저 학생이 누구길래?
“다 맛있습니다. 예지가 직접 끓였다는 된장국도 너무 입에 맞네요. 배가 빵빵해서 더 먹으면 터질 것 같습니다.”
“…그 된장국, 내가 끓였는데.”
“엄마! 미원은 내가 넣었잖아!”
그랬어? 이 된장국 맛의 비밀은 미원… 이었구나.
한바탕 광란의 식사가 끝나고 다시 응접실 소파에 온 가족과 시혁이 앉았다. 설탕 범벅이 된 커피를 앞에 두고.
“시혁아, 내가 뭘 해주면 되겠니? 지금껏 네 얘기를 듣기만 했다만 이제 네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라. 다 주마.”
“아빠, 그거 우리 오빠한테 모욕적인 말 아녜요? 학력고사 만점자는 당연히 4년 장학금과 생활 보조금도 나올 텐데? 법대니까 고시 패스하면 떡하니 판사님 되실 거고.”
그제서야 김옥순 여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가 걔야? TV만 켜면 나오던 세기의 천재라는 그 만점?
그런데 이 천방지축 막내딸의 눈치가 요상하네? 언제 봤다고 우리 오빠? 기가 막힌다.
“오늘 의원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온 것인데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 말해, 뭐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마. 그리고 앞으로 수시로 들려서 머리 맞대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예, 언제든 의원님이 부르시면 달려오겠습니다. 그럼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초롱초롱 시혁을 바라보는 노태후. 마치 첫사랑의 여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저는 고시를 보긴 하겠지만, 법관이 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엥?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한국대 법대잖아?”
“저는 돈을 벌 겁니다. 그것도 많이요.”
시혁이 뜻밖의 선언을 하자 모두 멍한 표정이 되었다. 역사상 처음 학력고사 만점을 받아 한국대 법대에 지원했다. 당연히 수석으로 입학할 것이고, 고시도 어렵지 않게 패스할 것이다.
사법 연수원을 수료한 뒤에는 판사 아니면 검사로 임관되어 적당히 경력을 쌓아 전관예우 받는 변호사 개업, 혹은 여의도로 직행하는 코스도 나쁘지 않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야말로 장미꽃을 깔아 둔 탄탄대로 영순위 예약인데… 그걸 뻥 걷어차고 돈을 벌겠다고?
“시혁아, 힘과 권력을 가지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단순히 돈을 목표로 삼기에는 네 능력이 아깝지 않니? 그쪽 세상도 만만치 않은 복마전이다. 또 무엇보다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는 길이야.”
“저는 다른 사람이 이룬 길을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 힘으로, 제 능력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돈의 단위는… 의원님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클지 모릅니다. 적어도 삼송그룹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 정도의 부를 손에 쥐어야 합니다. 꼭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아무도 커피 잔을 들지 않았다. 어린 학생의 치기 어린 말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포부를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예지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시혁을 바로 보지도 못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걸 시혁에게 들킬까 봐 살짝 팔짱을 껴야 했다.
“내 평생 오늘처럼 많이 놀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좋아,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오빠, 나는 거기 투자할래. 끼워 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