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1화 (11/150)

11화 잭팟! (2)

동장군이 아무리 강해도 봄 햇살을 이길 수 없다. 먹처럼 짙은 어둠도 한 줄기 새벽빛에 밀려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1월, 박종철 고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어린 대학생이 경찰의 물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위에 부정적이던 직장인, 소위 넥타이 부대가 가담하기 시작했다.

안정을 원하던 중산층이 움직이면서 다급해진 정부는 급히 이 사건을 봉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치안 본부장의 인터뷰는 휘발유가 되고 말았다. 그는 기자들을 모아 놓고 코미디 같은 해명을 했다.

‘탁자를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말이냐 막걸리냐? 도리어 이 말이 도화선을 당긴 셈이다.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다. 학생들 일색이었던 과거 시위 양상이 삽시간에 변했다. 직장인과 상인이 가세하면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그런 와중에 시혁은 꽃피는 춘삼월, 한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당히 수석으로.

“어이! 우리 수석, 영광이다.”

“만점! 사람 맞냐? 한번 만져 보자.”

“괴물이 바로 너구나. 사인해 줄래?”

짓궂은 선배들이 이례적으로 몰려와 시혁을 탐색했다. 좋아서? 절대 아니다.

한국대 법학과에 진학했다는 사실은 여기 모인 모두 천재란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천재가 집합하는 곳이니까. 이 아성은 지금껏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그런 천재들 입장에서도 시혁은 단순히 귀여운 새내기로 볼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사법고시 합격을 최고 목표로 삼는 법학과 선배들에게 시혁은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로 보이는 것이다. 시혁의 만점은 그만큼 공포스러운 점수다.

한국대학교 법학과에서는 간간이 저런 초인이 튀어나오곤 했었다.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삐져나오듯이.

그 초인들은 재학 중, 20대 초중반을 넘기지 않고 사시에 합격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었다. 이들에게 붙이는 영예로운 이름이 소년 등과.

시혁이 소년 급제, 소년 등과를 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경쟁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간 보러 온 것이다. 잠재적인 강력한 경쟁자가 확실한 시혁은 이 애매한 분위기에도 담담했다.

- 야, 저놈 진짜 물건이다.

- 응, 꼭 노회한 대법관을 보는 기분이야.

- 저렇게 흔들고 띄워 주는데 얼굴색도 안 변해.

- 근데… 쪼오끔 멋있다. 애가 듬직하고 모델 해도 되겠네.

- 다른 병아리들과 너무 비교된다. 군계일학 인정!

- 씨바, 내년에 바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무조건 한 자리 예약이잖아.

쭈삣거리는 다른 새내기과 달리 시혁은 확실히 돋보였다. 선배들이 둘러싸고 웅성거렸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응대할 뿐, 건방진 행동이나 넘치는 어떤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같이 입학식을 치르는 신입생들에게 이런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과연… 역시… 저게 만점자의 위용이구나.

그러나 간단한 식순을 마치고 선배들을 따라 입장한 강의실에서 시혁의 평정심은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반갑습니다. 87학번 신입생 여러분. 법대 3학년 조문호라고 합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여러분의 학교 적응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울 법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너, 이… 새끼! 깜빡 잊고 있었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여러분은 최고입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0.01%에 들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자긍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우리 법대는 선배들의 똥군기 같은 거 없습니다. 사발 술잔 돌리기 같은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하고, 이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 네가 평소에 침을 튀기며 지껄이던 말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였구나. 새록새록 기억난다.’

“고시 합격 기수, 연수원 기수, 법원과 검찰 기수… 앞으로 수많은 계단에서 여러분은 선, 후배와 만나게 됩니다. 족보는 그때 따지십시오. 먼저 살아남은 뒤에.”

‘말도 안 되는 괴변 늘어놓지마. 누구보다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조직에 충성하라던 네놈이…….’

“법대생의 최우선 목표는 당연히 사법고시 패스죠. 어떤 것도 이에 앞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여기 맞추세요.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꿈꾸면서도 법전 내용을 읊어야 합니다. 그렇게 몸부림쳐도 여러분 중의 30%만이 그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게 현실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조문호… 조 전무.

김시혁의 직속 상관이었던 삼송 비서실의 전략센터장 조문호 전무. 삼송 장학생 수혜자이기도 한 조문호는 철저히 삼송의 개로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지난 2월 치러진 사법고시 1차 관문을 넘고 2차 시험을 기다리는 중일 거다. 하지만, 꽝이야. 보기 좋게 2차에서 낙방을 하고 신림동 고시 낭인 대열에 합류했던 선배.

결국 3년 내리 고배를 마시다가 포기하고 공채로 삼송맨이 되었다. 주력인 삼송전자도 아니고, 삼송 생명 총무과 신입 직원이 된 것이다.

시혁이 조문호에 대해 이를 가는 이유는 그의 됨됨이를 알기 때문이다.

살살거리며 시혁에게 접근했었다. 같은 법대 선배라는 것을 빌미로.

둘에게는 고시를 패스하지 못한 열등감이 잠재되어 있었다. 시혁은 이자룡의 수발을 드느라 시간이 없었고, 조문호는 실력이 없었지만.

그래선지 곧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곤 하는 관계가 되었다. 주로 조문호의 요청에 의해서.

시혁은 단 한 번도 개인적인 부탁을 이자룡에게 해 본 적이 없는 바른생활 수행원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그러나, 징징 짜는 조문호의 간절한 눈물에 홀려 이자룡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하고 말았다. 조문호는 그렇게 본사 비서실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조문호에게 이자룡의 내심과 동향, 관심 분야를 알려 준 시혁. 덕분에 조문호는 이자룡의 입맛에 맞는 기획안을 계속 제출했고, 당연히 이자룡의 눈 가시거리에 들었다.

수익률과 성공 확률이 희박한 기획안이었지만 평소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한 보고서를 미리 올려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조문호가 예쁘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물론, 이자룡이 시도했던 신사업들은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다 망했다. 그 뒤치다꺼리는 모두 삼송그룹 차원에서 맡아 뭉갰지만, 같이 일을 도모한 이자룡과 조문호는 코드가 맞는 주군과 내관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조문호는 이자룡 군단에 합류한 뒤에도 변함없이 딸랑거렸다. 무뚝뚝한 시혁과 비교했을 때 입안의 혀처럼 구는 조문호를 이자룡은 고속 승진시켰다.

그렇게 조문호는 시혁의 상관이 되었다.

그때부터 조문호는 더 이상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살랑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발톱을 드러낸 채 시혁을 갈궜다.

이자룡도 그런 조문호를 더 신뢰했다. 예로부터 멍청한 군왕은 없다고 했다. 간신이 군왕을 멍청하게 만드는 법이다. 서서히 시혁은 그저 이자룡을 수행하는 역할만 맡게 되었고, 정작 민감하고 중차대한 문제는 조문호가 차고 앉았다.

그럴수록 조문호는 시혁을 더 괴롭혔다. 끈질기게 이자룡을 자극해 시혁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어쩌면 이자룡이 시혁을 팽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문호의 입김이 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 당신과 나의 악연도 이번 생에서는 좀 정리하자. 더 이상 속고 살지 않을 테니까.

‘화끈하게 부숴 주마.’

* * *

“나쁜 놈, 애비 등골 빼먹을 놈.”

“그만해, 아버지.”

“천하의 망종 같으니.”

“아… 좀 그만하라고.”

“아이고. 내 새끼, 아까워서 어떻게 보내나.”

“…….”

“공 처사 말 잘 듣고, 귀찮다며 라면만 처먹지 말고, 학교 빠짐없이 다니고, 선상님 말씀이라면 하나님처럼 받들고… 알았냐?”

저 끝도 없는 잔소리.

“아버지, 스님이 무슨 하나님을 찾아?”

“이놈의 새끼, 빨리 뜽어낸 테레비 안테나나 고쳐!”

슬그머니 끼어들던 태식만 아무 죄도 없이 등짝에 불이 났다.

“아버지, 그만 들어가요. 누가 보면 이산가족 헤어지는 줄 알겠다.”

“아무리 코앞으로 가도 맘이 다른 법이여. 내 품 안에 품고 있던 새가 비바람 치는 세상으로 나가는 마당인디.”

오늘은 시혁의 보육원 퇴소 날이다. 만으로 18세, 우리 나이로 스무살이 되었다. 여기서 꼬박 18년을 살았던 시혁도 가슴이 먹먹했다. 스님은 공 처사를 딸려 보내면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연신 잔소리를 하는 참이다.

시혁과 공 처사는 비닐하우스로 가방 하나씩 들고 이사를 했다. 참 이삿짐치고 단출하다. 시혁도 공 처사도.

“아저씨, 무슨 심정으로 따라나선 거예요.”

“…그냥. 시혁이 혼자 보내기 뭐해서.”

“진짜 무대뽀다. 아저씨도.”

“시혁아, 나는 믿는다. 너라면 꼭 성공할 거다.”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당장 다음 달이면 계약금만 준 인쇄소에서 몰려와 난리를 칠 상황인데?”

“어찌 되겠지. 내가 게이오 대학에서 회계학을 배우긴 했다만, 세상은 사람의 얄팍한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더구나. 모사재인 성사재천,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공은 하늘의 점지를 받아야 이뤄지는 법이더라.”

“너무 무속적인 말씀인데?”

“네가 아무 대책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보지 않아. 나 같은 범부가 보지 못하는 뭔가 있겠지. 또 망하면 어떠냐? 아저씨가 운전할 줄 아니까 밥이야 굶겠니? 허허허.”

고맙습니다. 아저씨. 스님이 아버지라면 아저씨는 삼촌이셨어요. 항상 제게 어깨를 빌려주셨죠.

걱정 마십시오. 시기가 도래했거든요.

* * *

1987년 4월 6일.

이름도 생소한 코모로 회교 연방공화국의 압달라 대통령이 전도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제5공화국 전도환 정권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장사동 안기부장이 기를 쓰고 방해 공작을 했지만 분위기는 노태후 민공당 의원으로 기울었다. 노태후가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이미 대세가 되었다.

노신형 총리와 장사동 안기부장 모두 국민 밉상 전력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노신형 총리는 전직 안기부장, 장사동은 현직 안기부장이다.

민주화를 바라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는 현 정국에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없는 태생적 한계로 가시권에서 멀어졌다. 남은 것은 노태후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권 말기라고 해도 전도환은 체면치레를 위해 각국 수반을 계속 초청했다. 국민들에게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수작이었다.

버마, 콜롬비아같이 국익에 별로 도움이 안 될지라도 와 준다면 국빈으로 초청하는 일을 적극 추진했다.

지금 방한한 코모로 회교연방 공화국의 압달라 대통령도 한국이 이렇게 환대해 주자 한껏 기분이 들떴다. 아프리카 대륙과 마다가스카르 섬 사이에 위치한 코모로는 인구 50만에 불과한 소국이다.

코모로 대통령은 김포 국제공항에 내린 뒤 극진한 국빈 영접을 받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뭔가 덕담이라도 하려는 듯, 압달라 대통령은 같이 동석한 외무부 장관에게 물었다.

“오! 장관, 저 길가에 양국 국기와 함께 게양된 것이 내년에 귀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마스코트 깃발인 모양입니다.”

“네, 압달라 대통령 각하.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호랑이를 신성시해 왔습니다. 산군(山君)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일종의 수호 동물로 여깁니다.”

“그렇군요. 멋진 디자인입니다. 전체 배색과 잘 어울립니다. 회색 바탕에 호랑이의 황색 몸체가 잘 드러나는군요.”

“……!”

X발, 뭔소리야?

장관은 당황해서 어버버 거렸다. 회색 바탕에 황색 호랑이가 어울려?

가만가만. 그러고 보니 관리가 통 안 되고 있구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가의 가로수에 매달아 둔 깃발… 한결같이 누리끼리하다. 어떤 깃발은 끝의 실밥이 다 터져서 너덜거리는 것도 보인다. 태극기가 깨끗하게 날리는 모습과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이거 큰일이다. 나중에 대통령 각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경을 칠 게 뻔하다. 저 조수석에 앉은 안기부 통역 놈이 벌써 노트에 뭔가 쓰고 있는 게 보인다.

살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고 외무부 장관은 생각했다. 내 소관이 아니거든.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내무부(행정 자치부) 장관의 얼굴도 떠올랐다.

X 돼 봐라.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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