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6화 (16/150)

16화 털어먹는 자와 털리는 놈

“껄껄껄! 역시 시혁이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멋지게 해치웠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확실히 이번 일은 운이 없었으면 불가능하지.”

“예.”

“너 아니? 운도 실력이라는 거. 준비가 안 된 놈에게는 운이 오지 않는다. 또 운이 왔다는 것도 모르고 흘리기 예사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이다. 너는 그 범주를 넘어섰다는 말이고.”

“하여튼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뭘? 사람 한 명 소개한 것이 뭐 대수라고… 그래, 이젠 학교 공부에 열중해야지? 한국대학교 법대생이 고시도 패스 못 하면 쪽팔리는 일 아니냐?”

“고시는 관심 없습니다. 패스야 하겠지만 그쪽으로 계속 나갈 마음이 없으니까요.”

“허어, 이놈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네가 큰돈을 벌었다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무조건 권력이 최고다. 판, 검사를 좀 하고 나중에 떡하니 뺏지 달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생기는 거지.”

“지금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유한합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있지요. 십 일 이상 붉은 꽃 없듯이 언젠가 물러나야 합니다.”

“호오! 그래서?”

“정치 권력은 종내에는 자본 권력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유한하나, 자본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신기루처럼 없어지지 않습니다.”

“……!”

이놈 봐라? 진짜 확고하다.

“너는 돈을 택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네, 전에 말씀드렸지만 삼송과 대한민국 재벌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황금의 성을 쌓을 것입니다. 얄팍한 지분으로 거미줄처럼 상호출자를 통해 지배권을 갖는 한국의 재벌이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 오늘 온 용건도 그 돈을 벌기 위해서겠네? 이만 꺼내 봐라.”

과연 다르다. 전도환과 노태후는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원죄가 없어지지 않겠지만…….

“저를 돕는 사람 중에 공사홍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재일교포 2세죠. 일본 게이오 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한 인재입니다. 이분을 일본으로 좀 보내려고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군요.”

“가면 될 일을 굳이 부탁까지 하는 속사정은?”

“이분이 일본에 있을 때 조총련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흠… 조총련이라. 민감한 부분이구나.”

“예, 귀국하자마자 옛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왼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 이상을 선량한 국민으로 살아왔습니다. 겨우 이적 단체에 이름을 올린 죗값치고는 넘치도록 했다 생각합니다.”

“그건 쉽지 않겠다. 혹여 그 사람이 오랫동안 사상적인 전향을 하지 않고 속마음을 달리 가지고 있다면, 네가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이다. 만약 내가 손을 써서 도와줬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옆에서 조용히 과일을 깎고 있던 예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아빠, 해 줘. 다 조사했을 거면서 왜 질질 빼는데? 시혁 오빠 옆에 있는 사람 뒷조사도 안 할 아빠가 아니잖아.”

“이 기집애야, 이건 다른 문제야.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시한 폭탄과 똑같은 걸 몰라?”

“나도 공 아저씨 잘 알거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그냥 해 달라고오.”

“아이고, 머리야. 너 그 칼이나 치우고 말하면 안 되겠냐?”

잘한다. 예지. 이때만큼은 네가 최고다. 예뻐! 딸바보가 이길 재간이 있나.

뭉텅뭉텅 과육을 베어 내서 먹을 것도 없는 사과 한 조각을 포크로 찍으며 노태후는 잠시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딸의 저 애절한 눈빛을 보고… 안 해 줬다간 소금으로 범벅된 된장국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런데 일본에서 무슨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건가?”

“땅을 좀 사려고요. 건물도.”

“…겨우 복덕방을 하려는… 거냐?”

“예.”

“네가 큰돈을 손에 쥐고 있다지만, 지금 일본 부동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중이다. 제대로 된 투자가 힘들 텐데? 건물 한 채 사면 끝일 거다. 네 돈으로는.”

“버블(Bubble)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거품?”

“예, 일본 경제는 버블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거품은 터지기 전까진 황홀하게 아름답습니다. 점점 몸집을 불리고 계속 공기를 빨아들이죠. 일본 부동산도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네 말을 믿기 힘들구나. 세계 경제 순위 2위의 대국이다. 미국도 버거워서 플라자 합의를 통해 환율을 강제 절상시킬 정도로 무서운 나라야.”

“꺼집니다. 버블은. 반드시요.”

“좋아, 거품이 터진다고 하자. 그러면 네가 투자한 부동산도 폭락할 텐데?”

“내릴 겁니다. 터지기 전에.”

“도박을 하겠다는 말이네. 나는 지금껏 화투도 쳐 본 적이 없다.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것, 알고 있느냐?”

노태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시혁에게 반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어릴 때 고생했던 트라우마가 뿌리 깊은 노태후에게 노름꾼은 상종 못 할 인간인 것이다.

“선택의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됩니다. 그 선택을 순간의 기분에 취해서 하게 되면 도박이지만, 충분한 계산과 사전 분석에 의해서 하게 되면 투자죠. 주식도 나라 살림도 똑같은 게 아닌가요? 앞날을 어느 누가 단정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와주시는 김에 제 돈을 자유롭게 외화로 송금되도록 좀 해주십시오.”

“우리 오빠, 진짜 멋지다. 어쩜 저리 말을 조리 있게 잘할까?”

“아이고, 혈압! 예지 엄마, 쟤 좀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어머! 왜요? 멋있는데. 우리 시혁이는 내가 봐도 성공할 거야. 좀 보태 줄까?”

“엄마, 나도 나도, 일억 있어.”

우리 시혁이? 당신마저…….

노태후는 소파에 머릴 눕히고 말았다. 여자들이란… 왜 잘생긴 놈에게 꼼짝 못 할까. 내 편이 없구나. 우리 집에서.

두 여자를 피해 도망치듯 서재로 옮긴 시혁과 노태후.

“다음 달에 정식으로 민공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시겠군요.”

“응, 뉴스를 봤구나.”

“예,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한국대뿐만 아니라 각 대학 학생회가 결집하고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매일 안기부의 보고를 받고 있다. 쉽게 타개책이 나오지 않는구나. 네 생각은 내가 어찌 하면 좋을까?”

“항복하셔야죠.”

“……!”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오신 의원님께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리하셔야 합니다. 팔 한쪽은 내줘야 고지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직선제를 받아들이십시오.”

“안 돼! 절대 그건 안 된다. 정권이 넘어갈 거다.”

“죄송하지만, 안 넘어갑니다. 의원님은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

“그러기 위해서도 먼저 국민들에게 항복을 하셔야 합니다. 의원님의 최대 단점은 전도환 대통령과 같이 군인이었다는 것, 대중적인 지지도가 적다는 것, 그리고 강력한 야당의 삼김(三金)이라는 경쟁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면서 백기를 들라는 뜻은?”

“이기기 위해서죠. 아마 시국은 더 혼란의 극을 달리게 될 겁니다. 전도환 대통령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할 것이고요. 하지만 광주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올림픽이 무산될 테니까요.”

“…….”

“이럴 때, 민공당의 대통령 후보이신 의원님이 먼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발표를 하면, 앞에 말씀드린 세 가지 단점을 단박에 상쇄할 수 있게 됩니다. 일타 쌍피가 아니라 삼피를 얻는 것입니다.”

“조금 더 해 보거라.”

“대중들은 승리를 자축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나서서 스스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고 생각하겠죠. 군인의 총칼에 맞서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항복한 적장을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과감한 결단을 내려 준 의원님을 국민들은 기억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의원님은 전도환의 후계자, 군인 출신 노태후가 아니라 대중적인 정치인 노태후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야당의 삼김은?”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시험에 들 겁니다. 삼김 모두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포기하지 않을 거구요. 사분오열된 야권은 표를 찟어 가지며 자멸할 것이 분명하죠. 의원님은 36%만 확보해도 청와대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이. 이놈… 후화! 진짜 양파 같은 놈이다. 까면 깔수록 더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런 놈과 적이 되면 편히 잠자리에 눕지 못할 것이다.

소름 돋는다. 겨우 스무 살짜리에게.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예지 말이야. 요즘 공부도 등한시하고 하루 걸러 자네한테 가서 노는 모양인데…….”

“예, 이번에도 꼴등하면 제가 혼낸다고 했습니다. 오면 꼭 끼고 공부를 가르치는데 성적이 잘 오르지 않나 봅니다.”

“꼴등? 예지가?”

“그렇다던데요?”

미치겠다. 이 여우 같은 딸내미가 어떻게든 옆에 있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산통을 깰 수도 없는 일… 그래도 너무했다. 전교 일 등이 꼴찌라니. 예지야.

네가 문제다. 이놈아. 그저 어린 꼬맹이로만 생각하는 네놈이…….

시혁은 사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적절히 알려 줄 뿐이었다. 큰 줄기의 역사는 변하지 않고 진행된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시혁이 조언을 하지 않아도 노태후는 6.29 선언을 하게 된다. 또 야당의 삼김도 분열을 거듭한 끝에 끝내 단일화를 못하고 단독 출마를 하게 된다.

아쉬운 일이다. 이때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로 설 기회를 놓친 절대적 이유는 삼김의 욕망 때문이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 *

“여기 있습니다.”

“그냥 소포로 주셔도 될 일을 직접 오시다니 감사합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후배님.”

“…한국대 출신이시군요?”

“예, 57학번… 화석이죠. 후배님과 딱 30년 차이가 납니다.”

“혹시…….”

“하하하. 맞습니다. 저도 법대예요. 비록 고시는 고배를 마셨지만.”

“아! 그러셨습니까? 선배님.”

“재학 중 두 번 떨어지고 바로 포기했죠. 내 머리로는 힘들다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온 겁니다.”

중앙정보부, 지금 이름은 안전기획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기관의 정점.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라 정보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들은 권력의 시녀였다. 간첩을 조작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야당 탄압에 앞장선 괴물.

“저 개인적으로는 공 선생 케이스가 참 안타깝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재원을 이리 만들어 미안합니다. 후배님.”

떠보는 건가?

“아닙니다. 다 지난간 과거인 걸요. 개의치 않습니다.”

“앞으로도 공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받을 겁니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할지 몰라요. 부디 행보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경고? 은근한 협박?

“일본 지사에 제가 알아봤죠. 웃기는 건 조총련에서 공 선생의 존재 자체를 몰라요. 가입했다는 것만으로 호들갑을 떤 것은 우리죠. 하지만, 한번 리스트에 올라가면 쉬이 지울 수 없다는 것 후배님도, 공 선생도 아실 겁니다. 진심으로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건 마음에 와닫는다. 안타까워 살짝 전해 주는 진심이 느껴진다. 선의에는 선의로, 악의에는 더 큰 악의로.

“선배님, 안기부 생활은 할 만하십니까?”

“하하하, 안기부를 왜 컴퍼니(회사)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죠. 스스로 쪽팔리니까.”

“…….”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럼 우리 같은 정보기관이 진짜 회사가 되겠죠. 그때까지 필요악이지만, 대한민국에 있어야 합니다. 뱉고 보니 서글픈 말이군요.”

괜찮은 사람 같다. 나름대로 신념도 있다. 조직의 행태에 실망하면서도 필요악이라 버티며 내일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

찜했어, 선배. 내 인재 풀에 이름을 올렸다고.

* * *

공사홍은 감격했다. 여권이 나오고, 출국 허가서가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빨갱이라는 정말 아무 관계없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긴 이후로 포기하고 살았었다. 죽을때까지 일본에 갈 수 없다 여겼었다.

“남자가 그깐 일로 울기는… 뚝!”

“시혁아.”

코끝이 찡해서 시혁은 화제를 돌렸다.

“아저씨, 좋아하는 프로야구팀이 어디예요?”

“…청보 핀토스.”

“촌스러워… 나는 MBC 청룡.”

“그런데 왜?”

“‘히트엔드런(hit- and- run)’ 작전 잘 아시죠?”

“응. 치고 달리기.”

“예, 일본에 가시면 그래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치고 달려요.”

“히트엔드런!”

“여기서 최소한 삼송의 발톱 하나는 뽑을 수 있는 돈을 벌어야죠. 우리는 털어먹는 자가 되는 거고, 일본은 털리는 놈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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