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따뜻한 슬픔도 있다
열도에서 소리 없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 시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학교를 다녔다.
5공화국 전도환 시절이라고 매일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한 달에 많아야 2번 정도의 빈도였으니 시위가 없는 날 교정은 도서관이 꽉 차는 게 일상이었다.
그랬던 것이 확 바뀐 것은 올해 1987년 5월부터였다. 거의 매일 최루탄과 돌,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등교한 시혁.
학교에서 시혁은 단연 군계일학의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한 만점자. 한 걸음 한 걸음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당연했다.
- 쟤야… 만점에 수석.
- 후광이 확 비치는 것 같다.
- 제길, 인정하면 지는 건데… 존잘남이네.
- 쟤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잘생겼어, 뇌 똘똘해, 거기다 키는 왜 저렇게 크냐?
- 한번 저 가슴에 푹 안겨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 꿈깨라. 열쇠 세 개가 아니라 열 개 없으면 옆에 가지도 못한다.
설왕설래. 시혁만 등장하면 주위가 휑해졌다.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아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김시혁, 맞지?”
“네. 그런데요?”
“너, 학장실로 좀 가 봐. 찾으신다.”
“…….’
조교의 말에 퍼득 떠오르는 생각… 오늘이었구나. 그때도 이렇게 시작되었지.
오냐,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학장님. 김시혁입니다.”
“오! 어서 와. 입학식 때 보고 두 번째네.
“네. 찾으셨다고요?’
인사를 하면서도 눈길은 다른 쪽을 보고 있는 시혁.
왔어? 당신도 오랜만이네?
“김시혁 학생. 여기 귀한 분을 소개하지. 삼송그룹 전략기획실 이학소 사장님이셔. 인사드리게나.”
“김시혁입니다.”
“말로만 듣던 천하의 천재를 직접 보니 눈이 환하군. 반갑네. 시혁 군.”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이학소 사장님.”
어찌 당신을 잊으랴. 이학소 사장.
삼송의 머리, 삼송 최고의 전략가, 차기 회장 이건호의 오른팔, 실제적인 삼송의 부회장… 무엇보다 악마의 혀로 나를 지옥에 끌어들인 당신.
조문호 전무와 더불어 당신은 내 살생부 최상위에 있거늘.
“보고 나니 더 탐나는군요. 학장님. 부디 오늘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요. 이 사장님. 김시혁 학생에게도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잘 설명하시면 따를 겁니다.”
해몽도 야무지십니다. 학장님. 뒤로 무엇을 약속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뒷목 조심하세요.
“시혁 군, 올해 한국대학교에 우리 삼송에서도 한 분이 입학했다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글쎄요. 삼송그룹에서 직원을 다시 대학에 다니도록 배려하는 줄 몰랐습니다.”
“음. 그럴 수 있지. 아직 당신께서 주위에 떠들고 다니지 않는 한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
“우리 삼송의 유일한 후계자가 한국대에 입학을 했어. 자네와 같은 학년에 말이야.”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그런데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인가요?”
“……!”
쉽지 않지? 처음부터 너무 삐딱했나? 좀 숙여 줄걸, 잘못했나?
“하, 하. 하하하. 역시 만점다운 패기일세. 하하하.”
“시혁 군, 자네 삼송 비서실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우리 이학소 사장님이 자네를 스카우트하려고 직접 오셨어. 이건 대단한 영광일세.”
“험, 험. 역대급 대우를 해 줌세. 이제 갓 신입생이지만 대졸자 초임을 똑같이 지급하지. 물론 보너스 달에는 보너스도 같이 주고 말이야.”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입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자네는 특별한 일을 맡게 되는 거야. 누구나 꿈꾸던 그런 일을… 자네는 행운아일세. 시혁 군.”
학장과 이학소 사장의 콤비네이션 신공이 여실히 발휘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삼송의 확정적 차기 황제 이건호가 TV를 보고 직접 지시한 일인데.
“자네는 그대로 학교를 다니면 되네. 다만, 아까 말한 분을 좀 케어하는 역할을 해 달라 이거지.”
“그러엄,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일세. 대한민국을 떨어 울리는 삼송그룹의 후계자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거야. 이거야말로 마당 쓸고 동전도 줍는 일거양득 아닌가?”
“싫습니다.”
“……!”
“……!”
“저는 그냥 학업에 열중하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이런 조건을 거절한다고?
미친놈이 아니라면 진짜 딜을 할 줄 아는 놈이다. 자신을 헐값에 팔지 않겠다… 이런 뜻인가?
“시혁 군, 월급은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어. 그리고 자네가 몸을 담고 있는 보육원 운영비도 지원하지. 또, 또 뭐가 있을까? 법대 전용 도서관도 지어 줄 수 있다네. 어떤가?”
“시혁 학생, 학교에 큰 기여를 하는 거야. 자네 이름이 두고두고 새 도서관 현판에 남는다 이 말이야.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최고인데 자네 나이에 벌써 이룬다… 멋진 일 아닌가?”
그러세요?
“이름을 남기는 것은 남의 힘이 아니라 제 손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월급을 아무리 많이 줘도 삼송전자 사장만큼 주실 것도 아니고, 보육원 지원은 조건으로 내세우기에 너무 비인도적 아닌가요? 거절하겠습니다.”
“…….”
“…….”
진짜 의외였나 보다.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조차 안 했겠지.
“자네가 모실 사람이 누군지 밝혔는데 그리 말할 수 있다니 놀랍네. 세상에서 세 가지 출세 조건 중 첫 번째가 인맥이라는 사실, 굳이 말 안 해도 알 만한 나이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싫습니다.”
“이유나 들어 보세.”
“첫째, 저를 스카우트한다면서 너무 후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면에 함정이 있겠죠. 제 인생을 담보로 잡힌다거나 하는…….”
“……!”
“…….”
“둘째, 저는 남의 도움이나 인맥 따위에 의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시혁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거든요.”
“…….”
“셋째, 겨우 동년배 코나 닦아 주는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것이죠. 이를 월급이라는 코뚜레에 꿰어 상하관계를 맺을 정도로 제 캠퍼스 생활이 가볍지 않습니다.”
“…….”
“마지막으로 넷째, 저는 삼송그룹이 싫습니다. 재벌의 전횡과 그들의 방식에 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운동권 학생들의 맹목적인 좌익 사상과 결을 달리하는 제 개인적 신념입니다.”
“…….”
입이 조개냐? 왜 둘 다 꼭 다물고 말이 없어?
모르지? 나 돈 많아. 안 그래도 오늘 스님한테 배당금 드리러 갈 거야.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다음 강의하시는 교수님, 출첵에 민감한 분이라서요.”
방을 나오는 동안 학장도, 이학소 사장도 멍하니 쳐다만 본다.
아이고, 숙변 덩어리 하나를 시원하게 배설한 기분이다.
기다려요. 당신도.
삼송의 몰락과 함께 침몰시켜 줄 테니.
* * *
“형님아, 왔나?”
“응. 너 왜 또?”
“별거 아니다. 형님 가고 온갖 스트레스를 나한테 푸시네?”
그 말끝에 안테나를 들고 나타난 스님.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저놈의 자슥. 귀신이랑 도깨비는 뭐 하나 몰라. 저 화상 좀 잡아가지 않고. 손 똑바로 들어라.”
“아부지. 나도 고 삼이다. 동생들 줄줄이 보는데 손 들고 있는 모습 보이는 거 교육상 안 좋다니까?”
“아이고, 복장 터져. 겨우 한 대 있는 테레비,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안테나 성능 향상시킨다고 지랄하더니 끝내 화면이 안 나온다. 애들이 꼰지른 거야. 새꺄.”
스님이 이번에는 화날 만하다. 84년도 송출을 시작한 컬러 텔레비전 시대. 이제껏 보육원에는 흑백밖에 없었다. 그러다 시혁이 만점을 받으면서 동사무소에서 컬러 TV가 하나 배정되었던 것이다.
애들이 환호할 것은 당연지사. 그걸 못 보게 만들었으니 만고의 역적이다. 태식아. 너를 어쩌랴.
“아버지, 태식이 데리고 방에서 좀 봐요.”
“안 돼, 저놈은 하루 종일 손 들고 벌서야 한다.”
“얘기 끝나고 다시 벌 세우더라도 들어오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 태식이가 여기 맏형인데.”
어쩜 변한 게 없을까… 아버지 방만 들어오면 저절로 울컥한다.
한쪽에 곱게 개어 둔 이불 한 채, 벽에 걸린 승복 한 벌, 그 옆에 같이 걸린 낡고 헤어진 바랑.
방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개다리소반… 다리에 청테이프를 칭칭 감은 모습에 시혁은 슬펐다.
저건 아버지의 사랑의 흔적이다. 큰 절 주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조병준 시인의 시처럼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아버지, 이번에 돈을 좀 벌었어요. 이거 우선 쓰세요.”
“…너 사기 쳤나?”
“에이. 씨. 아니거든. 정상적으로 번 돈이라니까.”
“이게 도대체 공이 몇 개냐? 너 집 나가서 무슨 짓을 했길래?”
“아버지가 투자해 준 돈 있잖아? 공 처사님도 삼백만 원 내셨고. 그걸로 종돈 삼아서 벌었어. 맘 편히 쓰세요.”
“일, 십, 백, 천, 만… 치… 칠억?”
“응, 내가 약속했잖아. 백 배로 불려 준다고.”
“아이고야… 내가 천하의 마구니를 키웠네. 나무 관세음보살!”
기가 찬다. 여기 절터와 보육원 부지를 다 팔아봐야 천만 원 남짓 할까? 7억 원이면 이만한 절 70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너 확실히 미쳤구나. 이게 얼마나 큰돈인지 알고 주는 게냐?”
“아버지는? 절값을 통째로 나한테 안 줬남?”
“그건 이놈아. 네 덕분에 들어온 후원금이니까 당연한 거고.”
“아… 시끄러. 하여튼 저기 버스 다니는 좋은 위치에 보육원도 새로 짓고, 애들 각기 공부방도 만들어 주고, 그래! 그 놀이터, 애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모래 깔린 놀이터도 만들어 주고… 특히 아버지 방은 조금 근사하게 꾸미고. 알았지?”
“…….”
“부모 없는 애들이라고 천대받지 않도록 우산 모양 메이커 옷 있잖아? 그거랑 프로스펙스 운동화도 사 줘. 무엇보다 공 처사님 같이 좋은 분, 식당 이모님도 채용해서 월급 팍팍 주면 되잖아.”
“시혁아. 다 부질없다. 시설은 여기 빈 땅에 증축하면 된다.”
“왜? 애들 학교 다니기 편한 곳으로 옮기지?”
“어딘들, 시설을 아무리 좋게 해도 반길 동네가 그리 쉽더냐? 그리고 애들은 사랑을 먹고 크는 것이야. 좋은 시설은 부차적이란다.”
또 뭉클한다. 뭔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만 같다.
“하여튼 알아서 써요. 궁기 좀 그만 떨고. 아버지 방 꼴 좀 봐. 저, 저 실밥 다 터진 바랑 좀 버려. 에이. 씨.”
“내 새끼… 다 컸구나. 허허허허. 다 컸어.”
그때까지 무릎을 꿇은 채 듣고 있던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형님, 나 유학 갈래.”
“이 썩을 놈, 너는 당장 대학 붙을 생각이나 해. 공부도 지지리 못 하는 놈이.”
“아부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과학 경시대회에서 매년 상 탔거든. 다른 건 몰라도 뭘 만지는 것은 자신있어. 보내 줘!”
뜻밖이다. 항상 실실거리고 사고나 치는 놈으로만 알았던 태식, 스님과 시혁은 다시 쳐다봤다.
“그래, 태식아.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데? 유학이 장난은 아니거든.”
“우선 미국에 가서 랭귀지 스쿨 다니면서 영어부터 배우고, 꼭 MIT 갈 거야. 거긴 공돌이의 요람이니까.”
“성적은 되고?”
“수학은 무조건 돼. 그리고 거기도 특별전형이 있더라. 과학경진대회 2회 이상 수상자… 나는 세 번이나 수상했으니까 자격이 된다고.”
“왜 그동안 그런 사실을 꽁꽁 숨겼니?”
“형님, 살림살이 뻔한데… 내가 말하면 공학 재료비며 뭐며 아부지가 그거 마련하려고 또 굶을 거잖아. 차라리 내가 속으로 앓는 게 더 낫지.”
여기 또 한 명의 바보가 있었다. 아버지와 똑 닮은 바보.
그래, 하고 싶다면 해 봐야지. 이제 형님이 뒷바라지해 줄게. 훨훨 날아 봐라. 태식아.
‘어떤 슬픔들은 이렇게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