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열도 침공 (2)
공사홍의 하루는 소리 없는 전쟁과 같았다.
이끼 다다시가 먼저 건물을 물색하고 사전 작업을 한다. 항상 사려는 수요가 들끓는 게 현실인 일본에서 남보다 먼저 매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왔어… 이 가게 언제부터 저런 사람들이 진을 치기 시작한 거야?”
“쉿! 저치들 문신 봐. 야쿠자야.”
“그렇다고 별다르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지. 언제 사시미 꺼내고, 언제 총질할 지 모르니까.”
“다른 가게로 옮기자. 불안해서 술 한잔하겠어?”
며칠 연이어 출몰하는 야쿠자 덕분에 가게 주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답이 없었다. 그저 와서 술 마신다는데. 그저 와서 물건 고른다는데.
주변에서 그 건물은 기피 대상이 되어 버렸다.
“기무라 상, 돈을 더 쓰겠나?”
“당장 주시오. 이번 판만 이기면 다 갚고도 남아.”
“그럽시다. 대신 이번에도 지면 당신 건물 팔아서 갚아야 해.”
“그게 얼마짜린지 알고 하는 말이야? 한 달만 더 묵혀도 두 배는 오르는 건물을?”
“떨어질지 오를지는 옥황상제 말고는 몰라. 나는 지금 가치만 본단 말이야. 사채가 그런 거지. 안 그래?”
“몰라, 일단 돈부터 줘. 판 돌아가기 전에.”
“사인만 하시면 이 돈은 당신 거야. 오케이?”
명대사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당신이 판때기에 앉은 지 30분이 넘도록 호구가 보이지 않으면, 당신이 호구다.
노름이란게 그런 거다. 한 판만, 한 판만 하다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올인을 하게 되는 거지.
그 판때기의 뒤에서 야릇한 미소를 짓는 이끼 다다시를 건물주는 인식할 정신이 없었다.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렸는데 주위가 보일까.
“사홍 형, 오늘은 야무지게 한 건 엮었어요. 푸하하하.”
“대형 전광판이 있는 빌딩이라 쉽게 안 팔 줄 알았는데 잘 설득했네?”
“뭐. 그것도 설득의 한 방편이니까… 인간이란 게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이번에 새로 배우는 기분입니다.”
“이끼, 너도 재일 교포 출신이다. 비록 귀화를 했다지만, 그거야 이 더러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 네 조국이 대한민국임을 잊지 마라.”
“그러려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제 모습에 염증이 나다가 짐승 같은 쪽바리 놈들에게 한 방 먹인다고 생각하면 죄의식이 없어져요.”
“그래, 이번 작전이 끝나면 같이 한국으로 넘어가자. 대표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이다.”
“그 대표라는 분이 사업자등록증 보니까 많이 젊던데?”
“이끼, 네 나이 많음을 자랑할 생각 다시는 하지 마라. 그런 숫자로 평가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사람 무안하게 정색을 하고 그러십니까? 제가 감히 보스께 무례할 사람 아니지 않습니까? 형님 앞이니까 재롱 떠는 거지.”
“이끼야. 눈이 확 밝아진다는 느낌… 너는 아직 모르겠지. 형도 그랬다. 19년을 지켜보면서도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오각성을 한 고승처럼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요?”
“그런 게 있다. 나중에 너도 저절로 알게 될 일… 그건 그렇고, 계약은?”
“내일 형님이 대표님 도장 찍고, 은행에서 돈 입금되고, 법무사가 담보 서류 넘기면 끝나는 거죠.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잖소?”
“이번 거 처리하면 총 몇 개지?”
“음… 보자보자. 총 54채가 됩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대충 1,000억 엔 조금 넘어요.”
“한국 돈으로 따지면 8,000억 정도 되는 셈이네. 속도를 더 내야겠다.”
이끼는 질린 표정으로 공사홍을 바라보았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빌딩을 매입하기 시작해서 긴자 이면도로 변을 중심으로 마구 퍼담았다. 매입한 건물은 손도 댄 적이 없었다. 기존 세입자들 임대료를 올린 적도 없다. 심지어 만나 본 적도 없다. 그저 법무사가 대행을 했을 뿐이다.
“형님, 우리가 처음 매입한 건물 기억하십니까?”
“응, 왜?”
“거기 가격이 벌써 몇 배 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권리 행사를 안 하십니까? 임대료를 배만 올려도 이익이 꽤 클 텐데요.”
“아직 네가 한가한 모양이다. 그런 푼돈에 욕심을 낼 시간 있으면 건물을 한 채라도 더 잡아오너라.”
“도대체 한국의 대표님이랑 형님 목표가 뭐요? 지금 규모만 해도 상상이 안 되는 돈이란 말입니다. 처음 가져온 종잣돈 500만 달러는 벌써 껌값이 됐어요.”
“한국에 삼송그룹 알지?”
“당연하지. 싼 물건을 만들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일, 이 등을 다투는 곳인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룹이다. 비록 국제적으로는 아직 저평가 되어 있지만… 거기를 먹을 정도의 돈을 모으는 것이 일차 목표라고 할까?”
“이차는?”
“그건 아직 몰라. 대표님이 보는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니까. 그저 따라가는 거지.”
이끼는 아직 시혁을 본 적 없다. 놀라지 마라. 이놈아. 세상에 다시없을 괴물이 네 보스다.
* * *
[시혁아, 더 이상 뒤에서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하긴 벌써 54채를 가진 부동산 업계의 큰손이 되었는데 소문이 안 나는 게 무리죠.”
[그래, 맞는 말이다. 중소 건물주들이 피하고 만나 주지를 않는구나.]
“더 이상 꼼수로 사는 것은 힘들다고 보는 게 맞아요. 그럼 정공법으로 나가볼까요?”
[정공법?]
요미우리 신문 1면은 광고를 싣지 않는다. 전통이다.
그 전통을 깨고 요미우리가 하단 박스 광고를 실었다. 도대체 얼마를 줬는지 알 도리가 없다.
- 계약금 20%를 드린 후, 일주일 뒤 바로 잔금 전액을 드립니다. 계약 증거금, 계약금, 지정 위탁금, 중도금, 잔액 위탁금, 잔금의 단계를 대폭 줄여서 매입하겠습니다. 거기다 현재 시세에 30%를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K 글로벌 주식회사)
미친 건가?
당시 일본의 부동산 매입 단계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서로 계약의 의사를 밝히는 계약 증거금을 매입자와 매도자간 주고받고, 이를 근거로 법무사에서 서류를 꾸민 후 계약금을 반드시 은행을 통해 송금해야 한다.
그럼 법무사는 송금증을 첨부해 내무성에서 거래 허가를 받은 다음 이를 양측에 전달하면, 다시 매입자가 매도자의 계좌로 계약금을 보내고, 증거 예탁금을 재무성에 예치해야 한다.
또 법무사가 불알에 요령 소리 나도록 양쪽에 전달하면 비로소 예탁한 돈을 찾아서 보내고, 중도금은 세무국의 허가를 받아 보낸다.
마지막으로 잔액 예탁금을 법원 등기소로 보내는 절차가 남아 있다.
처음 부동산을 사고파는 사람은 이 과정에서 심장이 말라 비틀어진다. 각 부서간 업무 협조를 안 하는 일본의 규칙과 절차 때문이다.
이걸 다 무시하고 먼저 전액을 준다? 또 현 시세에 30%를 더 얹어서? 무슨 배짱이냐… 뭐 하는 놈들이냐?
그러나, 팔아야 하는 건물주 입장에선 완전 땡큐지.
마침 시기가 일본 부동산이 정점에 도달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솔솔 나오는 시기였다. 오르긴 하지만 전처럼 미친 듯 폭등하는 광풍이 한풀 꺽인 참이다.
상투에서 부동산을 매입한 투자자들이 슬슬 걱정을 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광고가 나오자 시장이 들썩거렸다.
“미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나?”
“그럴 리 없습니다. 회장님. 슬슬 매물을 정리할 때가 되었는데 기횝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이놈들은 무슨 똥 배짱으로 이 지랄을 하는 거지?”
“그 회사를 조금 알아봤습니다. 겨우 19살의 어린 조센징이 대표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한국 재벌 2세가 비자금을 빼돌려 묻지마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곧 재벌 하나가 자빠지겠구먼. 이 철없는 투자로 인해서.”
“회장님, 어찌할까요?”
“미코, 사업은 타이밍이다. 우린 철저한 분석과 통계만 믿는다. 감으로 대충 사업을 하는 조센징의 눈먼 돈이라면 먹어 줘야지. 흐흐흐.”
“좋군요. 일본의 법률상 만약 계약 해지를 하려면 계약 금액에 해당하는 손해 배상금을 매입자가 또 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손해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사홍은 이끼 다다시를 대동하고 다이치 은행 지점장을 다시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도 광고를 봤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시장이 서서히 조정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정장님, 지난 2개월간 우리 K 글로벌이 귀행에 손해를 끼친 게 있습니까?”
“그렇지만, 이건 경우가 다릅니다. 절차를 건너뛰는 것도 그렇고, 지금 시장 상황에서 30%를 더 주고 매입한다는 발상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판단됩니다.”
“이 전화기 스피커폰 됩니까?”
“예, 당연히 됩니다. 소니에서 나온 최신 기종입니다.”
공사홍은 말없이 전화 번호를 눌렀다.
[예, 부사장님.]
“대표님, 여기 다이치 은행 긴자 지점장과 같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상대방이 대뜸 부사장임을 알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저렇게 대답을 하는 것은 사전에 약속을 한 것이다.
[지점장님, 안녕하십니까? K 글로벌 대표이사 김시혁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일본어를 너무 능숙하게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십니까? 이번 광고에 따른 거래를 귀행에서 부정적으로 보신다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아, 네. 은행도 규정이 있는지라, 이번에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김 대표님.”
[하하하. 아뇨, 지점장은 우리 제안을 승낙하셔야 합니다. 그 자리를 지키려면.]
“……!”
[고깝게 듣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는 지점장에게 기회를 드리는 것이니까요.]
“조금 더 듣겠습니다.”
[지금 우리 부사장이 지점장님께 매물 목록을 드릴 겁니다. 총 40건의 빌딩이죠.]
“미쳤습니까? 40건을 한꺼번에 어쩌란 말이오? 행여 대장성 노무라 과장을 통해 이 일을 풀 생각일랑 마시오. 이 정도라면 총리가 와도 불가능하니까.”
[흠… 지점장께서는 본점 이사가 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제 제안을 다 듣지도 않고 화부터 내시면 굉장히 후회하실 것 같은데 말이죠.]
지점장은 콧김을 씩씩 뿜어 내다가 시혁의 싸늘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은행원이 고객에게 먼저 역정을 낸다는 것은 큰 실책이다. 지금까지 K 글로벌 덕분에 다이치 지점 중 1등을 했다.
“아!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김 대표님의 고견을 다 듣고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만 하죠. 역대 귀행 지점 대출 중 가장 큰 액수가 될 거래니까요.]
“…….”
[귀행에서는 총 40개 빌딩의 계약금 20%만 주면 됩니다.]
“예? 20%만 말입니까?”
[그렇죠. 대출 기간은 딱 일주일, 그 이상도 필요 없습니다.]
이게 무슨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한 지점장. 대답을 못한다.
[만약, 일주일 뒤에도 시장이 지금같이 소강상태라면 지점장은 바로 건물주들에게 손해 배상금 20%를 더 주고 계약을 해지하십시오.]
점입가경이다. 일주일 뒤에 바로 손해 배상 하고 계약을 해지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54채 전체 빌딩값이 매입 당시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는 뛰었습니다. 손해 배상을 해 줘도 귀행은 30채 이상 이익이 남습니다. 우리가 일주일 내로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그 권리 행사도 포기하겠습니다.]
이젠 침도 흘린다. 은행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올인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쉽게 말해서 즉시 40채의 건물 매입에 따른 계약금 20%를 대출하고, 일주일 안에 우리가 못 갚으면 바로 20%의 손해 배상금을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껏 매입한 전체 54채에 대한 권리 일체를 담보로 말입니다. 귀행은 일주일만 계약금 대출을 해 주면 되는 셈입니다. 리스크 제로, 보장 이익 만땅, 아닌가요?]
공사홍은 그 장면을 쳐다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시혁이다.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하지만, 공사홍도 시혁의 의중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일주일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지 모른다.
그저 믿을 뿐이다. 시혁이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지점장은 이번 거래를 끝낸 후 반드시 본점 이사실로 직행할 겁니다. 실패해도 은행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준 셈이니 그 또한 직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맞죠?]
지점장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손에 쥐었다. 이끼 다다시의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자그마치 40채 전체 금액 2,800억 엔, 20% 대출만 따져도 560억 엔이다.
통화를 같이 들었지만 간을 배 밖에 두고 사는 사람같다. 공사홍 형이 진짜 괴물 같은 보스를 모시고 있구나.
이 방에서 담담한 사람은 공사홍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