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열도 침공 (3)
메릴린치의 싱크탱크 경제 전략 연구소에서 보고서가 하나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는 내부적으로 만든 것이다. 외부에 공개가 되는 문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문건은 보고되는 당일 알 만한 사람은 다 읽어 본 동네 똥개가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비서실 여직원의 단순한 실수 때문이었다. 이 여직원은 비밀 취급 도장을 보지 못하고 다른 서류의 뒤에 붙여 각 언론사에 팩스로 발송을 하고 말았다.
언론사에 일반적인 보도 자료를 돌린다는 것이 비밀 문건까지 같이 보낸 것이다.
‘일본 부동산의 버블 붕괴가 다가온다.’
내용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일본의 부동산이 임계점에 달했고, 1989년부터 버블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를 폭망케 하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것.
미국의 모든 언론사가 이 문건을 대서특필했다. 각국의 통신사들도 미국발 뉴스로 받아서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이야 말해 뭐하리. 자기들 이야기인 것을.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하루 종일 이 뉴스로 떠들어 대고, 아사이 신문 같은 경우 호외를 뿌릴 정도로 난리를 떨었다. 미국의 말이라면 똥도 우아하다고 생각하는 원숭이들에게 세계적으로 정평 있는 금융기관 메릴린치의 경고는 가히 충격이었고,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공사홍도 이 뉴스를 봤다. 지점장의 사인을 받은 지 5일이 지난 날이다.
숙소인 제국호텔 룸으로 지점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은 계약한 그대로 이틀 후 집행을 할 것이니 양해 바란다는 말이다.
일본인 특유의 정중한 말이었으나 내용은 당신들 망했어. 다이치 은행은 바로 약속한 20%의 위약금을 물어 주고 나머지 자산도 다 꿀꺽 하겠다는 뜻이다.
K 글로벌에 대출금을 갚을 현금이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아는 놈의 발 빠른 손절 통보.
가뜩이나 심란한 집에 휘발류를 들이붓는 야비한 놈이다. 어쩌면 자기 임무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이틀의 시간이 있음에도 하는 짓거리… 더러운 쪽바리의 전형이다.
개자식… 공사홍의 어금니가 꽉 깨물려 졌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이끼 다다시는 연신 한숨만 쉬며 TV를 꺼 버렸다.
“형님, 우리 다 끝났나 봐. 존나 뛰면서 어렵게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참 허무하네.”
“이끼. 입 닥쳐라.”
“사실이잖소? 저런 뉴스가 매시간 도배되고 있는데 누가 부동산을 산단 말이오? 우린 망했다고.”
“이끼야. 나는 말이다. 지금도 마음이 차분하다. 허세가 아니라 실제 그래.”
“제기랄… 그냥 5일 전에 다 처분했으면 한국 보스나 우리나 모두 엄청난 거부가 되었을 텐데… 억울해서 그래요.”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너처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아냐. 논리, 분석, 이 따위 계산이 들어가면 그건 신뢰가 아니다.”
“…….”
“그냥 믿는 거야. 무조건. 그러다 안 되면 같이 죽으면 돼. 그게 신뢰다. 새끼야.”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 교환원은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받겠느냐 물어본다.
[아저씨, 뭐 해요?]
“예, 대표님. 저녁 먹고 뉴스 보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 이끼 다다시라는 분과 같이 계시나 보죠?]
“예, 사무실 주소지는 법무사 사무실로 등록했고, 숙소는 이끼와 같이 쓰고 있으니까요.”
[전혀 걱정하는 말투가 아닌데요?]
“제가 왜 걱정을 합니까?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시킨 일을 잘하면 되는 거죠.”
[하하하, 역시 우리 아저씨. 걱정 마시고 내일 다른 은행을 알아보세요. 아마 오후쯤 방문해서 주거래 은행을 바꾸겠다고 하면 받아 줄 겁니다. 다이치 은행의 모든 거래를 일괄 인수하는 조건으로요.]
“……!”
[그렇게 하세요. 오늘 맛있는 야식이나 시켜 드시고요.]
“혹시 지점장이 대표님께도 전화를 한 것입니까?”
[아뇨, 분명히 그 사람 성향상 아저씨에게 협박을 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해줄 필요 없잖아요?]
* * *
그 시간, 일본 내각도 불이 붙었다.
“경제 대신, 큰일 나지 않았소? 이러다가 경제가 한 방에 내려앉게 생겼소이다.”
“총리 각하, 걱정 마십시오. 찻잔 속 태풍입니다. 저는 오히려 광풍이 불까 봐 걱정입니다.”
“무슨 말이오? 메릴린치에서 우리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꺼진다고 경고를 했어요. 온 언론이 그걸 보도했고요.”
“총리 각하, 우리 민족의 얄팍한 본성을 아직 모르십니까?”
“민족성? 그게 무슨 뜻이오?”
“두고 보십시오. 사람들은 더 부동산 사재기에 미쳐 날뛰고 그로 인해 제2의 광풍이 불어닥칠 겁니다.”
“당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총리 각하, 메릴린치의 보고서에 적시된 날짜를 보십시오.”
“…1989년 후반기…….”
“그렇습니다. 국민들은 개돼지와 같습니다. 먹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대가리를 처박을 것입니다.”
“설마?”
“사람 잡는 것이 그 설마입니다. 저는 경제상을 하고 있지만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저라도 대출받아 집을 사겠습니다. 투자회사들은 더하겠죠. 시한폭탄 터지는 날이 명시되었습니다. 지금부터 2년 남았습니다.”
“…….”
“사람 심리라는 것이 당장 죽는다 하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2년 후에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최후의 만찬? 죽기 전 주변 정리?”
“비슷합니다. 겁이야 살짝 나지만 2년이나 남았구나. 그동안 더 오른다. 다른 놈이 채기 전에 내가 샀다가 1년쯤 후에 팔아 치우면 나는 살 수 있겠지. 다른 놈들이 그때 뒈지던 말던 나하고 상관없어… 십 중 십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경제 대신의 분석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다음 날 은행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집을, 상가를, 건물을 사려고 대출을 신청하는 행렬이 창구마다 북적거렸다.
가뜩이나 넉넉한 유동성으로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던 투자회사, 부동산 회사, 펀드사는 매물로 나온 부동산에 진을 치고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매물이 자취를 감췄다. 일 순간에.
왜 팔아? 내가 미쳤어? 더 오를 거야. 메릴린치가 그랬잖아? 1989년에 버블이 꺼진다고… 그 말은 1989년까지는 계속 오른다는 말이거든.
- 안 팔아.
“형님, 이거 분위기가 야리꾸리 합니다. 온통 저를 찾는 전화예요. 지금 시세의 두 배를 줄 테니 팔라고 악쓰는데요.”
“전화받지 마라. 새꺄. 어제만 해도 죽상을 짓던 놈이 지금은 또 히히덕거리냐?”
“…아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회장을 하지. 헤헤헤. 형님이 이해하쇼. 그렇다고 내가 형님과 대표님을 배신한 건 아니잖소?”
“배신까지 했다면 네놈 모가지를 잘랐겠지… 대충 밥 먹었으면 일어나자. 도쿄 상업은행에 가 봐야 한다.”
“다이치 은행 지점장 전화가 열 번은 더 왔어요. 이 더러운 배신자 새끼.”
“세상은 이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반전에 또 반전… 우리 대표님은 감당이 안 되는 분이 틀림없어. 이끼야.”
공사홍과 이끼 다다시가 옷을 걸치고 로비로 나가자 황급히 후다닥 뛰어오는 사람… 지점장이다.
오전에 다이치 은행 창구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봤을 것이다. 똥줄이 타서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아! 지점장. 다음에 봅시다. 약속 시간이 급해서.”
“부사장님, 저에게 딱 1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택시 불렀어요. 로비에서 승강장까지 한 2분? 그동안 짧게 끝내 주시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부사장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지금껏 우리 은행의 협조가 있었기에 그 거래를 다 성사시킨 것 아닙니까? 제발 거래를 지속하도록 배려 부탁…….”
“이런이런, 1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구려. 다음에 봅시다. 오늘 중으로 귀행의 대출금 전액을 갚도록 하리다. 법무사를 보낼 테니 깨끗하게 저당을 풀어 주시소. 지점장.”
“공사홍 부사장님, 저 이대로 가면 바로 짤립니다. 용서하십시오. 제발!”
“축하합니다. 전도 유망하시니까 더 좋은 직장을 잡겠죠. 판단도 빠르시고. 그럼 이만.”
떠나는 택시 백미러로 주저앉은 지점장을 보면서 이끼 다다시는 큭큭거리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일본을 흔히들 갈라파고스 같은 섬나라라고 한다.
희한한 나라다. 고집도 존나 쎄다. 대를 이어서 가업을 물려준다. 100년 식당, 100년 여관, 100년 철공소 같은 것이 흔하고 널렸다.
좋게 말하면 장인 정신이지만, 기실은 외골수라는 말이다. 개혁을 두려워한다. 변화도 싫어한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는지 신기할 정도다.
자민당이 아무리 부패하고 실수를 저질러도 절대 바꾸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쭉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나라 일본의 부동산이 본격적인, 진짜 버블이 새로 만들어졌다. 언젠가 터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투다.
누가 뒈지건 나만 아니면 그만인 것이다. 오히려 끝물이 닥치기 전에 마지막 만찬을 하려는 하이에나들이 몰리면서 삽시간에 부동산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공사홍이 방문한 도쿄 상업은행은 막 전국구 은행으로 도약을 꿈꾸는 후발주자였다. 당연히 시장에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으로 공사홍이 도착한 것이다. 조용히 순번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고객님. 오늘따라 너무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셔서 늦었습니다. 대출을 하시려고요?”
“예, 조금 많이 필요합니다만.”
“걱정 마십시오. 담보할 부동산이 있거나, 매입할 부동산의 계약 증거금이라도 지급하셨다면 나머지 자금은 전액 대출을 해 드립니다.”
“아, 그렇군요. 이끼야. 빌딩 서류들 여기 행원 선생님께 드려라.”
창구 담당 행원은 낡은 007가방에서 계속 나오는 서류를 보다가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렸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곧이어 지점장과 차장, 과장, 대리까지 전 직원이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지점장 혼도 미스이입니다. 영광입니다. 저희 지점을 찾아 주신 고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 좀 요란하군요.”
아닌게 아니라 지점의 보안 경찰은 은행강도라도 든 줄 알고 검은 몽둥이를 꺼내고 있는 참이다. 객장에서 상담 중인 고객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이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재신을 맞이한 지점 직원들의 반짝거리는 눈망울. 처음 공사홍을 응대한 창구 직원은 어깨에 한껏 뽕이 올라가 있다. 무조건 첫 순위 진급 확정일세.
* * *
“하하하. 아저씨 한바탕 활극을 하셨네요?”
[시혁아, 너는… 정말 신의 혜안을 가졌다. 매번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어허! 대표님이라고 해야죠.”
[껄껄껄, 잘 처리됐다.]
“금액이 꽤 컸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아저씨.”
[정확한 시세는 아마 달포는 지나야 나올 거다. 이런 분위기라면 그 정도 지나야 감이 잡힐 거야. 돌아서면 폭등한다. 미쳤어.]
“나중에 결산할 때 이끼 씨도 충분히 챙겨 주세요. 마음 고생 많았을 겁니다.”
[언제로 보느냐? 손을 털 시점을.]
“메릴린치의 분석은 정확합니다. 1989년 12월까지 계속 오를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올해 8월 모두 텁니다. 아쉽지만 부동산에 돈을 묻어 둘 여유가 없거든요.”
[올해 8월… 새겨 두마. 언제든 지시만 하거라.]
그렇다. 아무리 미래를 알아도, 아무리 정확한 시점을 알아도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공사홍이라는 걸출한 보석이 없었다면 이런 성공은 힘들었을 것이다.
일찍 팔았어도 큰 이득을 얻었겠지. 그러나 이만큼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둘 생각은 접어야 했을 거다.
시혁은 공중전화에서 나오다가 거만한 표정으로 캠퍼스를 걸어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 뒤를 한 사람이 졸래졸래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네. 너를 어찌하리.
어떻게 찢어 죽여야 내가 느꼈던 그 고통을 돌려줄 수 있을까?
드디어 네 발톱을 뽑을 자금이 마련되었어. 이자룡.
두 번째 잭팟이 터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