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너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시혁의 시선을 먼저 느낀 것은 이자룡이었다. 웬 놈이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아직 자신이 삼송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학교에서도 철저히 감추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온 시혁이 적의를 띈 눈빛으로 계속 노려보자 이상했던 것이다.
뭐 하는 자식이야? 낮이 익은 얼굴인데…….
둘의 눈빛이 불똥을 튀겼다.
“아! 바로 너구나.”
“…….”
“얘기는 들었다. 아버지가 탐을 낸 인재라고… 잘생겼네?”
“나도 네 얘기를 엉뚱한 곳에서 들었지. 못생겼다?”
“하하하하. 너보다는 못하겠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아니, 외형을 말하는 게 아냐. 너는 변함이 없구나.”
“……나, 알아?”
“그래, 삼송의 황태자 이자룡이잖아.”
“왜 네 말에서 진한 적의가 느껴질까?”
“살기를 품고 있으니까. 내가 너한테.”
이건 아니다.
이런 식의 대응은 못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었다. 그만큼 트라우마가 컸던 탓이다.
참기 힘들다. 죽빵을 날리고 올라타 목을 조르고 싶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야, 이름이… 그래. 만점 김시혁. 왜 나한테 적의를 품는지 모르겠다만, 어떻든 반갑다.”
“반가워……?”
“뭐야? 우리 처음 보는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는 거야?”
맞는 말이다. 분하지만 이놈의 말은.
지금 나의 분노는 공허하다. 이놈은 황당할 것이다. 이런 식의 반응은 아무 가치가… 없다.
“미안, 내가 좀 예민했다. 이자룡.”
“흠… 여기서 볼 줄 몰랐네. 불세출의 천재.”
“수행원 컨셉을 바꿨나 보지?”
“아! 인사해라. 체육 교육과 오창섭, 우리 셋 다 동기다.”
이건호 회장의 지시로 이학소가 스카우트 제안을 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자 방향을 선회한 모양이다. 머리를 버리고 몸을 택한 것이네… 아예 경호원 같다.
하지만, 앳된 얼굴에 여드름까지 송송 돋아 있는 오창섭. 보고 있기 너무 짠하다. 언제 어떤 꼴을 당할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래, 오창섭 너도 반갑다. 김시혁이다.”
“응, 시혁아. 네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낯설지 않네. 친하게 지내자.”
성격도 모나지 않은 놈이구나. 그래서 더 애잔하다. 내가 빠진 자리를 네가 채웠으니… 어찌하리.
“이학소 사장한테 들었어. 삼송 식구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고?”
아… 이 새끼. 또 열받는 말을, 마치 큰 은총을 베풀었건만 왜 받지 않았냐는 투다.
태어나면서부터 삼송의 손자, 차기 회장의 유일한 아들,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황태자였다. 마음먹어서 안 될 일이 없고, 가지고 싶은 건 눈빛만 줘도 대령했다. 서민들의 삶이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접하는 먼 나라 이야기인 것이다.
“이왕 만난 김에 커피나 한잔할까?”
“그러자, 나도 지금 네가 무척 궁금하거든. 자룡아.”
대뜸 오창섭이 먼저 인문대학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휴대전화가 없으니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차의 카폰으로 예약을 하려고 뛰는 것이다. 이자룡은 절대 손님이 북적이는 커피숍에 가지 않는다.
이자룡은 당연한 듯 쳐다보지도 않는다. 변함없다.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네 버릇. 거기다 오창섭을 머슴으로 생각할 테니.
지금 생각하니 나도 그랬어. 저 오창섭이 하는 행동은 내가 너의 머슴일 때 했던 그대로야.
둘은 어색하게 오창섭이 달려 내려간 길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상기된 표정의 오창섭과 두 명의 경호원이 차문을 열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자룡이 먼저 뒷자리에 오르고 시혁도 옆에 앉았다. 오창섭은 조수석에 급히 몸을 실었다. 경호원은 다른 차로 뒤를 따라 왔다.
오랫동안 유도를 했는지 귀가 만두처럼 변했다. 레슬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 덩치가 좌석을 최대한 당긴 채 조수석에 구겨져 있는 모습. 정말 눈물겹다.
“창섭아, 190은 되어 보이는데, 뒤로 좌석을 좀 밀어라.”
“아냐, 시혁아. 충분해.”
“X발, 보기 불편하다고… 뒤에 자리 넉넉하니까 좀 밀어.”
“…….”
그래도 꼼짝도 하지 않는 오창섭.
비서실에서 그렇게 지시받았을 것이다. 절대 이자룡이 불편하면 안 된다. 너의 소명은 황태자를 잘 모시는 것이다. 그러자고 삼송에서 특채한 것임을 명심해라.
시혁의 짜증이 거슬렸던지 이자룡이 불쑥 말을 건넸다.
“김시혁. 내가 왜 너랑 얘기를 하려는 줄 알아?”
“몰라. 새끼야.”
“너하고 나는 같은 부류니까.”
“뭐?”
“세상은 어차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눠진다. 이건 자연의 섭리야. 나는 삼송을 쥐고 태어났고, 너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 그건 선택받았다는 말이야.”
“하아… 너는 어쩜 한 치도 변하지 않니?”
“……네가 나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만, 명심해라. 우리는 어차피 정상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어. 지배하기 위해서.”
“야! 차 세워. 구역질 난다.”
시혁은 결국 중간에 내리고 말았다.
저 새끼… 혹시 변하지 않았을까? 미래의 그 냉혈한이 아니라 교육이 잘못된 건 아닐까? 후천적인 어떤 이유로 그리되었다면 개선의 여지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타고나기를 그런 놈!
반면 이자룡은 멀어지는 시혁을 룸미러로 물끄러미 보며 말이 없었다. 자신의 위치에 맞게 참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뭐지?
몸이 떨리고 있다. 두려움… 그래, 이건 두려움이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천하의 삼송그룹 황태자가 저딴 놈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놈은 나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그대로 표출한다.
자룡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 왔다. 그대로 뒀다가는 나중에 손톱 밑의 가시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턱밑의 칼이 될 수도 있어. 지금껏 이런 감정을 주는 상대, 본적이 없었다.
‘저놈… 위험하다.’
* * *
법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사시 2차 시험을 치러야 할 선배들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상식적으로 사시 1차 시험을 패스한 재학생이라면 학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줄 것 같지?
없다.
법대의 관례상 그런 거 얄짤없다.
한국 사회의 온갖 마피아 집단이 다 거론되지만 한국대 법대는 열외로 치는 이유가 이것이다. 법대 출신들… 동문 의식이라곤 콩 한쪽만도 안 된다. 정말 없다. 스스로 ‘모래알 법대’라고 자조할 정도다.
그나마 같이 입학한 동기 말고는 선후배 간의 똥군기 같은 것도 없다.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이런 의식도 없다.
한국처럼 학벌 의식이 강한 나라에서 이 정도로 동문들끼리 데면데면하는 학교는 아마 한국대학교 법대가 유일한 것이다.
왜? 엘리트들이 똘똘 뭉치면 더 강력한 파워를 발휘하는 건데. 왜?
너무 잘나서…….
다들 제 팔 흔드는 놈들이라서 그렇다.
그런 판이니 학교에서도 그러려니 한다. 시험이야 매년 있고, 합격할 놈은 어차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시반 같은 거 만들어진 적 없다. 다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
나중에 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더라도 축하 현수막 붙여 본 적도 없다. 한둘이라야 붙이지… 그런 식이다.
심한 경우는 교수가 시험을 며칠 앞 둔 학생들을 몽땅 데리고 세미나를 가기도 한다.
조문호의 얼굴색은 썩은 똥빛이었다. 도서실을 파고 들어갈 듯 죽을 힘을 내지만, 도통 발전이 없다.
1차는 객관식이다. 그렇다고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보통 8지선다식이다.) 어느 정도 숨쉴 틈이 있었다. 그러나 2차는 주관식 서술형. 대충 찍을 수 없는 구조다.
끙끙 앓고 있는 조문호의 옆으로 누군가 앉더니 책을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조문호의 눈이 돌아갔다.
‘……!’
소문이 자자한, 자신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그놈. 수석입학생 만점자 김시혁이네?
새끼… 하고많은 자리 다 놔두고 왜 이 구석 자리에 앉고 지랄이야? 괜히 신경 쓰이게.
“조문호 선배님, 여기서 공부하시나 봐요?”
“어? 으, 응. 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소년등과를 목표로 하는군요.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지.”
“소년등과 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이라는 말 아세요?”
“…….”
“옛날 율곡 이이 선생이 그랬다던데요? 인생에서 피해야 할 세 가지 불행은 소년등과, 중년상처, 노년고독… 이라고 말입니다.”(少年登科, 中年喪妻, 老年孤獨)
“…너, 지금 뭐라는 거냐?”
“송나라 학자 정이천(程伊川)은 소년등과 부득호사라고 했어요. 소년 시절에 과거 합격하면 좋게 죽지 못한다는 뜻이죠.”(少年登科 不得好死)
“야!”
“선배는 그래도 하고 싶으세요?”
“지금 나 먹이는 거냐?”
조문호는 이놈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뜬금없이 다가와 이런 염장을 지르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한 번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는 놈이.
한때는 학과 회장의 자격으로 따로 불러 얘기를 나눠 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긴 했으나 바로 접었다. 얻을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모래알 학과에서 무슨 친목 도모냐? 어차피 다 경쟁자일 뿐인 것을…….
그랬는데.
“선배, 꼭 성공하세요. 2차 시험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렇게 똥을 참으면서 노력하는데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선배 실력으로… 글쎄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야! 김시혁!”
“선배, 여기 도서관입니다. 다 쳐다보잖아요?”
“……!”
“열심히 하세요.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뽜이띵!”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빅엿을 먹이는 거냐?”
“음… 글쎄요. 그냥 선배가 마음에 안 드네요. 교활할 것 같고, 음흉할 것 같고, 남 뒤통수 치기 좋아할 그런 관상이라 할까? 하하하.”
“이 새끼, 밖으로 나와라. 아무리 시험이 목전이라 해도 너 같은 놈은 도저히 그냥 못 보겠다.”
“에이… 제 키가 185예요. 선배,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닙니까?”
“…….”
한순간 시혁의 기세가 사납게 바뀌었다. 목소리를 낮춘 채 물어뜯어 버릴 것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떨어지겠지만, 그냥 거기 껌딱지처럼 늘어붙어서 해봐.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올해 안 되거든. 또 내년에도 떨어질 거야. 그리고 졸업하면서 신림동 고시 낭인이 되는 거지.”
“이 개X끼!”
“워, 워… 여기 도서관, 다들 보잖아. 아마 이렇게 생각할걸? 저 고약한 조문호가 애먼 신입생, 그것도 수석입학생을 잡고 몽니 부리는구나. 시험 스트레스를 왜 엉뚱한 데 풀고 지랄이야?”
마침 도서관 관리 직원이 다가왔다.
“학생, 여기를 운동장으로 착각한 거 아냐?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만, 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을 붙잡고 큰소리야? 너 당분간 도서관 출입 금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뭘 몰라서 예민한 시기의 선배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방해가 되었나 봅니다.”
“아냐, 신입생이 모르는 건 당연하지. 그걸 가지고 화풀이를 하는 선배가 지랄인 거고.”
“……!”
“조문호 선배님. 죄송해요. 학과 회장님이라는 것만 생각했지 지금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미치겠지?
- 저 새끼 조문호. 그럴 줄 알았다.
- 쌤통, 당분간 도서관 출입하는데 지장 있겠네.
- 근데 저 수석, 얘가 참 올곧네. 예의 바르다.
- 잘생겼잖아. 딱 봐도 견적이 나오네. 저런 착한 애한테 선배가 되어 가지고. 에잉…….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만큼 조문호의 평소 행실이 개차반이라는 말이었다.
오늘 두 놈 면상을 다 봤다. 일부러 찾아온 길이다. 이자룡을 보고 난 후, 조문호의 현재 모습도 궁금했던 것이다.
만고의 진리.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고, 사람은 절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이 새끼들…….
‘이제부터 진짜 빌런이 되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