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22화 (22/150)

22화 저절로 굴러 들어온 왕건이

노태후 민공당 대통령 후보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역사에 남을 6.29 선언.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승리를 자축했다. 군부의 총칼로부터 쟁취한 놀라운 쾌거에 다들 기쁨에 들떴다.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박종철의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에서 촉발되어 이한열의 최루탄 직격으로 인한 사망까지 국민을 개돼지로 알던 전도환 정권은 치명타를 입었다. 그렇다고 다시 광주처럼 총칼로 진압했다간 민란에 직면할 것이다. 올림픽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전도환은 자신의 최대 치적이었던 올림픽을 위해 레임덕을 감당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떻든 판은 기울었다. 이빨이 몽창 빠져 버렸다. 전도환 일당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그러나, 전도환의 실질적 후계자 노태후는 스스로 앞장서서 대국민 항복 선언을 한 이후 급속도로 대중적 지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 그래도 저놈은 조금 나은겨. 항복하잖여?

- 노태후, 글마는 군인이지만 물태후라고. 개중에 착한 편이지.

- 덕분에 체육관 대통령이 아니라 진짜 국민의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어.

- 그래도 이번 기회에 야당 삼김 중에 한 분이 되어야 해. 역사를 역행할 수 없다고.

민심이 서서히 요동쳤다. 이름도 잘 몰랐던 노태후는 일약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다.

“껄껄껄, 시혁아. 네가 확실히 보물이다. 요즘 민공당 내에서도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어. 특히 국민들이 노태후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해 준다는 게 확 체감한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의견도 괜찮으니 조언해 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겨우 대학 1학년생입니다. 후보님.”

“짜식이… 까칠하기는. 이건 우리 식구들밖에 모르는 이야기지만 네 조언 덕분에 오늘날 내가 있는 거다.”

“후보님,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후보님과 저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그냥 제 길을 가도록 보내 주십시오.”

“어쭈? 네가 대학물을 먹더니 많이 변했구나. 네 눈에 아직도 내가 반란의 수괴로 보이더냐?”

“예. 그건 변하지 않는 팩트니까요.”

“…….”

노태후는 시혁을 보면서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다른 놈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당장 안기부 안가에 처넣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예뻐한다고 할 말이 있고, 감춰야 할 말이 있는 법이거늘… 괘씸한 놈이다.

그런데, 밉지가 않다. 볼수록 아깝다. 이런 놈이 내 사람이 된다면 천하가 두렵지 않을 텐데…….

“시혁아. 우리 거래는 아직 안 끝났다. 알고 있느냐?”

“……!”

“나는 네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 하지만 너는 단물만 빨아먹고 등을 보이는구나. 이건 네가 강조하는 비즈니스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 아닌가?”

과연 노태후.

바로 태세를 전환해 훅하고 들어온다.

반박할 말이 없다. 일견 맞는 말이다. 우린 서로 거래를 한 것이니까. 최소한 주고받아야 형평이 맞는데 지금은 자신이 받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아… 이 양반.

“후보님. 제가 대가를 드리면 우리의 거래는 끝난 것으로 해 주시겠습니까?”

“들어 보고.”

“확답을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동으로 너를 도왔다. 너는 말로 하는 것 아니더냐? 그런데 말이란 게 들어 보기 전에는 무게를 달 수 없는 법이다.”

대단하다. 노태후. 장사를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은 교섭술.

“좋습니다. 저는 후보님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흠… 들어 보자.”

“딱 한마디입니다.”

“더 궁금해지는구나.”

“보통 사람들!”

“엉? 너무 평범한 말인데?”

그렇습니다. 누가 이 말을 브랜딩했는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이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은 없거든요.

어차피 당신이 쓰게 될 말, 내가 먼저 말을 해 주는 것뿐입니다. 나는 당신과 갈 길이 다릅니다.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십시오. 군사 정권이 종식되고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모아질 것입니다. 안정을 바라고, 좋은 세상이 오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방법은 후보님이 보통 사람으로 포장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

“예, 후보님은 연설을 하실 때마다 보통 사람 노태후란 말을 꼭 앞에 붙이십시오. 국민들의 머릿속에 완전히 박히도록.”

“세뇌를 시킨다?”

“좋은 말로 각인을 시키는 것입니다. 후보님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사관학교를 나오셨고, 장군을 지냈습니다. 또 전도환 대통령과 같이 쿠데타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슬로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 그 자식, 또 쿡쿡 찌르네.”

“이 슬로건이 후보님을 청와대로 보낼 직행 티켓입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린다.

내가 이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내가 나서서 이 사람을 돕는 것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돕지 않아도 이 사람은 어차피 대한민국의 13대 대통령이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노태후는 저평가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으로 인해서 더 그렇게 인식이 되었다. 그가 재임 중에 이룬 성과까지 물처럼 묻혀 버렸다.

떠밀려서 했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켜 대한민국은 비로소 헌법에 명기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노태후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렀으며.

야당 지도자 김다중의 사면 복권을 결심했고.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조폭을 와해시켰고.

북방 외교를 추진함으로서 먼 훗날 대한민국 외교가 세계로 뻗어 나갈 기틀을 다졌고.

막후 실세로서 군부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도환을 백담사로 내쫓는 등 공사 관리도 철저하게 단행했고.

프레스카드 제도 폐지로 언론 자율성을 보장했다.

그의 6.29 선언으로 인해 4.13호헌 조치가 철폐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도 정권 이양을 완수했다는 점. 노태후는 5년 후 김영상에게 권력구조가 넘어갈 즈음 일체 방해 공작을 하지 않고, 무난히 권력을 넘겼다.

이 점 하나만 봐도 그의 공과는 상당부분 상쇄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시혁의 상념은 노태후의 이어지는 말로 인해서 끊어졌다.

“시혁아,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국민들이 후보님을 향해 물태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웃어넘기십시오. 오히려 코미디언들에게 대통령 풍자를 해도 괜찮다 말하십시오.”

“에잉… 그건 좀 그렇다.”

“아닙니다. 지난 박장희 정권과 전도환 정권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강한 지도자에게 지쳐 있습니다. 이럴 때 물처럼 보이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그들의 피로감을 희석시키는 것은 힐링이 됩니다.”

“물태후라…….”

“예, 소크라테스의 지도자론을 보면 ‘물과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서 가장 바람직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통치를 하는 것만이 그래도 후보님께서 조금이나마 역사에 사죄하는 길입니다.”

목숨을 잃었던 2022년까지 수많은 정권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본 시혁도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 하나 외에 기억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단어.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누가 이 슬로건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가로채서 죄송합니다. 노태후의 집을 나서면서 시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역사는 한 개인이 재단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다.

* * *

“형님, 이상한 사람이 좀 보자고 하는데요?”

“이상한 사람?”

“예, 새로 거래를 튼 도쿄 상업은행 지점장 소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뭐하는 사람인데?”

“소프트파워란 회사의 사장이랍니다. 저는 처음 들어 봅니다.”

“됐다그래. 찾아오는 사람을 다 만나다 보면 우리 할 일을 못 한다.”

“…저, 형님. 그냥 한번 만나 주면 안 될까?”

“왜? 이 자식아. 우물쭈물하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

“우리 같은 교포거든.”

“……명함 받았어?”

제국 호텔은 도교 한복판의 5성 특급호텔이다. 처음부터 여기를 숙소로 정한 것은 시혁의 지시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얕잡아 보이면 바로 칼을 들이대는 놈들이라면서 최고급 호텔에 묵도록 당부를 했던 것이다.

일 층의 로비 라운지로 공사홍이 내려가자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정중히 인사를 해 왔다.

머리가 휑하다. 그냥 반질반질 광이 난다.

“안녕하십니까? K 글로벌의 부사장 공사홍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소프트파워 사장 손창의라고 합니다.”

“예, 아직 사무실이 제대로 준비된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오시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도쿄 긴자를 들어 올렸다 놓는 회사인데 사무실이 무슨 대숩니까? 만나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재일 교포시라고요?”

“네. 아버님 고향이 경상북도 달성군입니다.”

“그러시군요. 제 고향과 멀지 않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대구 출신입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오셨죠. 히로시마에서 피폭 당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잠시 숙연해졌다. 이 거지 같은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 그들의 처참한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먼저 말씀을 드리지만, 아직 우리 건물들은 팔 시기가 아닙니다.”

“아이쿠, 저는 귀사의 건물 중 한 층도 매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런 뜻으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 커피가 꽤나 진하고 구수합니다. 한잔하시는 동안 용건을 들을 수 있을까요?’

공사홍의 말뜻을 손창의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라서 만나 준 것이다. 차 한 잔을 할 동안 얘기를 마쳐라. 그게 현재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다.

이 공사홍이라는 부사장은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사람이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설픈 감정팔이는 역효과만 줄 뿐, 통할 사람이 아니다.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물론 K 글로벌이 투자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왔습니다. 하지만, 제 얘기를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천재거든요.”

허어! 대뜸 자신을 천재라고… 괴짜네.

* * *

[시혁아. 오늘 괴짜를 한 명 만났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당한 기인이셨던 모양입니다. 누군데요?”

[글쎄… 자신이 천재라면서 투자를 해 달라고 하더 구나. 완곡하게 거절했다.]

“스스로 천재라고 했다고요?”

[응. 그러더구나. 얘기를 듣다 보니 진짜 천재인가? 싶도록 말솜씨가 뛰어나고, 판단도 빠른 사람 같지만 우리는 투자회사가 아니니까 말이다.]

시혁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한 기분을 맛봤다. 똥꼬가 쫄깃해질 정도였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사람은…….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손창의라고 하지 않던가요?”

[……!]

“맞군요. 소프트파워 사장 손창의.”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있으며, 내가 조금 전에 만난 사람 이름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것인지… 꼭 꿈을 꾸는 것 같다.]

“아저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손창의라는 사람에게 전하세요. 일등석을 끊어 줄 테니 바로 한국으로 가라고. 제가 기다린다고 말입니다.”

대박! 생각지도 않았던 또 하나의 왕건이가 헤엄쳐 들어왔다.

손창의. 일본 소프트파워의 창업자 겸 CEO.

나중에 세계 부호 순위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사람. 일본에서는 당연히 최고 부자로 등극하는 사람.

그와는 제법 안면이 있었다. 이자룡 덕분이긴 하지만.

그는 버릇처럼 스스로를 천재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가 재일 교포라고 주눅이 든 손창의의 기를 살리기 위해 입버릇처럼 ‘너는 천재다. 자신을 가져라.’라고 한 이후 누구를 만나든 그리 말했었다.

나중에는 듣는 사람들조차 진짜 천재라고 믿게끔 하는 놀라웠던 화술도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중국의 마운이 창업하는 알라딘에 투자를 한다. 그로 인해 3,500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는 초대박을 터트리는 투자의 귀재 손창의.

웬 떡이냐?

‘빨리 와. 당신은 내 꿈을 이루는 발판이 되어야 하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