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빌런도 나쁘지 않아
김포공항 입국장.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보다 들어오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관문이건만, 비즈니스로 들어오는 외국인이 더 많았던 웃픈 시절.
한국인이 외국으로 나가려면 유학, 취업, 비즈니스 등 명확한 이유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선지 자유로이 방문이 가능한 외국인으로 인해 항상 입국장이 북적거렸다.
일본항공의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가 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시원한 손창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따로 캐리어도 없었고, 일등석을 탄 덕분에 일 번으로 입국장을 나선 것이다.
시혁은 젊은 시절의 손창의를 바로 알아보았다. 저 머리는 30대에도 없었구나.
미래에서 누군가 손창의 SNS에 ‘머리카락의 후퇴가 심각하다.’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었다. 손창의의 답글이 바로 달렸다. ‘머리카락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자신만만한 사내 손창의.
“어서오십시오. 손창의 사장님.”
“아, 마중 나오셨습니까? 오늘 바로 미팅을 하신다고 했는데 사장님께 안내 부탁드립니다.”
아저씨가 아무 정보를 주지 않았구나. 일종의 충격요법인 셈이다.
“저는 통역이 아닙니다. 손창의 사장님.”
“……?”
“제가 K 글로벌 대표 김시혁입니다.”
“……!”
입은 닫으시죠. 그 정도면 말벌도 들어가겠습니다.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제가 아직 차가 없어서 택시를 불렀는데 괜찮으시죠?”
“어… 저, 진짜 K 글로벌 김시혁 대표님?”
“예, 일본은 법인 등기부 등본 열람이 엄격히 제한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제 나이를 모르고 오셨군요.”
“…….”
“왜 제가 너무 어려서 대화가 안 되나요?”
“아… 아, 아닙니다. 솔직히 너무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하하하. 우리 부사장님이 조금 짓궂습니다. 이런 정도는 말씀을 해 주셔도 무방한데 말입니다.”
“제 짧은 생에 이보다 더 놀란 적이 없을 겁니다. 지금 도쿄의 정복자라고 불리는 회사 대표님이… 실례지만 나이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올해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천재니까요.”
“…….”
“하하하. 천재끼리 재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가시죠. 택시 시간당 요금이 너무 비쌉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 긴자의 부동산을 당장 팔아도 자산이 3 ~400억 엔(약2,100억 원)은 넘을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소프트파워의 작년 매출이 겨우 3억 엔이다.
소문에 듣자 하니 7억 엔(50억)을 가지고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기묘한 대출 방식으로 몇 달만에 웬만한 대기업 수준의 부동산을 끌어모은 신화… 를 이룩한 한국계 일본 기업이 K 글로벌이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어리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자가용 한 대가 없어서 택시를 불렀단다. 대절비가 비싸니 빨리 가잔다. 기막히다.
“한국에는 처음이십니까?”
“아닙니다. 어릴 때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시 보니 어떻습니까?”
“놀라운 발전을 했다는 게 체감됩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네. 내년 올림픽 때도 꼭 와 주십시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포니2 택시 차창 밖으로 한강변에 우뚝 들어선 건물들이 보였다. 어설프지만 강변 공원도 한참 단장 중이다.
행주대교를 지나 강서구 개화동을 지난 택시는 점점 농촌 풍경이 짙어지는 은평구 불광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후 농로를 타더니 도착한 곳은 비닐하우스 앞.
“내리시죠. 여기가 제 사무실입니다.”
“…….”
“제법 아늑합니다. 에어컨이 없어서 조금 후덥지근합니다만, 자연 바람이 더 좋죠.”
“…….”
내가 낚인 것인가? 아니면 납치라도?
손창의는 한동안 택시에서 내리지 못했다. 이건 완전히 도깨비 놀음이다.
“태식아,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커피 두 잔만 부탁한다.”
“형님, 나도 바쁘다. 손이 없나 발이 없나? 타 먹어라.”
“이 새끼, 유학 비용 안 대준다.”
“추접스럽게… 좀 고차원적인 협박 없나? 매번 그래… 씨.”
여기가 사무실?
7월에 접어든 한국의 뜨거운 폭양에다 비닐하우스에 덥혀진 공기가 빠지지 않은 공간은 완전 찜통과 다름없었다.
거기다 사장이라는 청년과 솜보숭이 고등학생 하는 꼴이… 미치겠다.
내가 홀렸구나. 진짜 잘못 왔다.
“어리둥절한 표정 그만 짓고 앉으시죠.”
“우선 김시혁 대표님. 일본어를 언제 배웠길래 그리 유창합니까?”
“배웠다기보다는 그냥 독학입니다.”
“허… 원어민 수준인데 독학을 했다고요?”
“예, 저는 천재 아닙니까?”
또 저 소리. 자신의 전매특허를 빼앗긴 손창의는 웬지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손창의 사장님. 저는 웬만한 나라의 언어를 거의 다 구사할 수 있습니다.”
“영어는 기본이실 테고, 에스파냐어도?”
“예, 프랑스어랑 독일어, 중국어, 버마와 필리핀 따갈로그 말도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직접 부딪쳐 본 적이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군요.”
“…….”
“어? 진짠데… 우리 형님, 올해 대입 학력고사 만점 받았어요.”
계속 못미더운 표정을 짓는 손창의에게 태식이 던진 한 마디. 그제서야 손창의도 해외토픽에 나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 최초로 대입 시험 만점을 받은 천재에 대한 뉴스.
“설마… 만점을 받았다는 그 희대의 천재가 김시혁 대표?”
“이제 인정하시네요. 천재 맞잖습니까? 하하하.”
몇 잔의 커피를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갈증을 느꼈다. 대화를 할수록 자신이 비빌 레벨이 아니었다. 자존감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나는 천재라 먼저 얘기를 해 왔던 손창의는 비로소 개안을 한 기분이었다.
진짜 천재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허드슨 소프트의 독점 유통권을 따내기 위해서 투자를 받고 싶다. 이거로군요.”
“그렇습니다. 허드슨 소프트로 말할 것 같으면…….”
“잘 압니다. 한국 내에는 아직 퍼지지 않았지만 일본과 세계시장에 더 알려진 회사죠.”
“허드슨 소프트를 아신다고요?”
“그럼요. 닌텐도와 같이 슈퍼마리오 파티 게임을 만든 회사지 않습니까?”
“……아직 발매 준비 중인 게임을 어떻게?”
“아! 네, 제가 정보 스펙트럼이 조금 넓습니다.”
또 순간 실수를 할 뻔했다. 슈퍼 마리오는 81년도에 발매가 되었지만 마리오 파티 게임은 출시가 올해 말이던가? 혀가 꼬였다.
세계적으로 2억장이 팔리는 비디오 게임의 전설.
당연히 잡아야지.
1981년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창업한 스프트파워는 승승장구 성공가도를 달렸었다. 손창의가 선택한 사업 분야는 유통,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인프라(유통)가 훨씬 더 큰 시장이라 판단한 것이 먹힌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시샘을 받았는지 만성간염으로 5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모든 것을 직원들에게 물려준 채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차피 죽을 목숨 남은 생존기간 동안 무엇인가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사업에 매진하자고 결심한 후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섰지만,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지금 손창의는 상당히 곤경에 빠진 상태였다.
허드슨 소프트의 유통권을 따내지 못하면 끝장날 정도로 코너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허드슨의 유통권을 따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아무도 손창의에게 투자를 해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한국행이 그의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시혁도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자룡과 같이 만났을 때 손창의 본인 입에서 고통스러운 이 시절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아저씨, 가만 있어도 10월 달이면 투자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먹어야겠어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저에게 날개를 달아 줄 오른팔이 될 거니까.’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예, 김시혁 대표님. 30억 엔은 있어야 합니다.”
“적지 않은 돈이군요.”
“하지만, 허드슨의 유통권을 따기만 하면 소프트파워는 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잠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지만, 엄청나게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조건은요?”
“아! 투자만 해 준다면, 경영권을 담보하겠습니다.”
“51%를 넘기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합니다. 기로에 선 제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뭘 못 하겠습니까?”
절박하구나. 목숨처럼 소중한 경영권을 통째로 넘기겠다고?
“이렇게 하시죠.”
“…….”
“제가 8월 말에 모든 부동산을 처분할 겁니다. 지금 일본의 부사장님이 겐코 상사와 접촉 중입니다. 일거에 다 털어 낼 생각입니다.”
“……!”
“대충 짐작하기로 400억 엔(약2,800억 원) 내외가 될 것입니다. 그중 요청하신 허드슨 소프트 유통권을 위한 자금 30억 엔을 드리죠.”
“아아아. 그 대답이 저를 살렸습니다. 고맙습니다. 김 대표님.”
“다만, 조건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어요.”
“말하시오. 저는 51%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더 양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서 미래에 그런 통 큰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거다. 지분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과 미래 비전에 목숨을 거는 참 비즈니스맨이다.
“모두 합해서 100억 엔을 드리죠. 허드슨 소프트 유통권 확보에 필요한 30억 엔은 그대로 쓰세요. 분명 대박을 칠 테니까 말입니다.”
“대박?”
아… 씨, 또 무의식 중에 튀어나와 버렸다. 아직 대박이라는 말은 없지.
“크게 성공을 할 거라는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2억 장, 일본에서만 3천만 장은 팔릴 것으로 봅니다.”
“예, 그런데 왜 70억 엔이나 더 주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렇지, 이게 본론이다.
“저는 사업을 발굴하는 손 사장님의 혜안을 믿습니다. 앞으로 손 사장님은 투자자로 변신하십시오. 지금의 수익이 아니라 미래에 세상을 바꿀 비지니스 모델을 찾아서 거기 전문적으로 투자를 하시는 겁니다.”
“저를 어떻게 믿고…….”
“우리는 천재니까요. 하하하.”
이 대머리 아저씨, 감격에 겨운 표정일세.
아닙니다. 제가 감격스러워요. 이렇게 쉽게 천하의 소프트파워를 손에 넣게 될 줄 몰랐어요.
“지분은?”
“약속하셨던 51%로 만족합니다. 70억 엔의 자금이 더 투자되었지만 그건 손 사장님을 얻게 된 것으로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줘 고맙습니다. 김 대표님.”
“참!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
“잠시 짬을 내서 미국에 좀 다녀와 주십시오. 일본의 공사홍 부사장님과 같이.”
* * *
[잘 알겠다. 네가 결정한 것이니까 그대로 하마.]
“섭섭하지 않으세요?”
[이유가 있겠지. 내 좁은 안목으로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을 테고.]
“아저씨, 손창의 사장은 단순히 장기판의 말로 쓰고 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K 글로벌의 한 축이 되고도 남을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 잘 판단했다. 나도 그 사람이 예사로 보이지 않더라.]
“겐코 상사와는 협상이 마무리되어 갑니까?”
[밀당 중이다만 거의 끝났다. 오히려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다.]
“예, 일본 자산입니다. 사정 봐줄 필요 없습니다. 최대한 빨아들이세요.”
[그런데, 미국은 무슨 일이더냐?]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서죠. 아마 그런 거래는 손창의 사장이 선수니까 맡겨 두세요. 아저씨는 최종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흠.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사뭇 궁금하구나.]
“아저씨, 전에 그러셨죠? 삼송을 무너뜨리려면 발목을 자르라고.”
[그래. 기억한다.]
“그리고 융단폭격을 가해야 머리가 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응. 맞다.]
“일본에서 삼송의 발목을 자를 돈을 벌었습니다. 그럼 이제 융단폭격 때릴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예, 아메리칸 드림. 우리는 미국의 심장부에 칼을 꽂을 겁니다. 그리고 무한 자본을 향해 몇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거죠.”
이제 빌런이 되기로 작정한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줄 것이다.
그게 빌런의 진면목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