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천조국 침공 (1)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서는 한참 황소상의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훗날 월가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게 되는 월가의 상징 황소상.
제막식을 마친 살로만 브라더스의 신임 회장 존 굿 브래던은 23번가 살로만 빌딩을 들어서며 비서에게 짜증을 내비쳤다.
“이 일정은 누가 잡은 것인가?”
“회장님, 10분입니다.”
“내 10분이 그리 가치가 없단 말이야?”
“아닙니다. 다만, UC 버클리 사무엘 교수가 직접 전화를 해 왔습니다. 거절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에잉. 동양 원숭이들을 만나는 건 항상 구역질 난다고. 거기다 코리안? 나는 한국전쟁에서 막내 삼촌을 잃었어.”
“일본 기업가도 같이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는데 영어가 유창합니다.”
“그래? 일본은 그래도 선진국이지. 미국말도 잘 듣고… 알았어, 한번 만나보지.”
시티은행의 투자 부문 사장이었던 브래던은 얼마 전 인수한 살로만 브라더스의 회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브래던은 일본에게는 작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티그룹의 일본 지사장을 몇 년 하는 동안 일본 애인이 있었던 탓이다. 반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이유 없는 혐오감을 품은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것이다.
“마사요시 손이라고 합니다.”
“사홍공입니다.”
“오! 이쪽이 일본에서 오신 손님이시군. 어서 오시오. 존 굿 브래던이오.”
노골적으로 공사홍을 무시하고 손창의에게만 아는 체를 한다.
“근데, UC 버클리에서 공부를 하셨소? 동문이군. 반가운 일입니다.”
“브래던 회장님. 사무엘 교수님이 제 지도교수셨습니다. 회장님과 절친이라는 말을 듣고 소개를 부탁드린 겁니다.”
“그래요. 그 친구와는 축구 클럽에서 같이 운동을 했었죠. 추억이 많습니다. 제가 항상 이겼지만.”
“오히려 사무엘 교수님이 스트라이커였고, 회장님은 골키퍼였다고 하던데요?”
“그 친구는 원래 거짓말을 잘하기로 유명합니다. 껄껄껄.”
사내들이 만나면 의례히 스포츠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거기다 확인할 수 없는 과거사를 들어 보면 모두 마라도나고 펠레 아닌 사람 없는 법이다.
“그래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일본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일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월가의 노련한 회장으로 옷을 바꿔 입는 브래던. 표정부터 차갑게 바뀐다.
“제 한국 보스께서 귀사가 보유한 TIPS(미국 물가연동 국채)에 관심이 많습니다.”
“몇 년짜리로?”
“1년짜리가 좋겠습니다.”
“……!”
이놈들 봐라? 하는 표정이다.
미국 국채는 1년 미만짜리 단기형과 중기형 T- Notes, 그리고 T- Bonds라고 부르는 30년짜리 초장기형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국채 TIPS는 물가 상승분을 반영해 주는 국채다. 대신 금리가 매우 극악하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는 기관과 증권사들이 매입을 하지만, 인기가 별로 없는 상품이다.
급격한 물가 상승, 그것도 정부가 지정한 3% 이상의 미친 듯한 상승이 있어야 이자 외에 별도 보상을 받는 룰이 적용되는 채권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미국의 경기는 역대 최고 호황기다. 비록 무역 적자를 내고 있으나 일본과 독일을 주저앉힌 뒤 반사이익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그런 판에 0.15%에 불과한 이자를 받으면서 누가 여기에 배팅을 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알았소?”
“저희도 모릅니다.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TIPS를 사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신의, 아니 당신들의 보스는 돈이 썩어 나는 사람인가?”
“제는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1년 동안 묵혀 봐야 겨우 0.15% 이자… 이걸 받기 위해 투자를 하겠다? 지금 같은 시국에?”
“모릅니다. 회장님.”
“혹시 자금세탁을 하려는 건 아니고?”
“전혀요. 매입자금은 일본 법인에서 송금될 겁니다.”
“흐음… 이해가 안 되는군.”
존 브래던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또 있습니다. 옵션으로 T- Bonds(30년형 초장기 국채)도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아예 태평양 앞바다에 금괴를 가라앉혔다가 다 녹은 후에 찾는 게 더 낮지 않을까?”
“저희는 지시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뭐… 나야 수수료만 벌면 그만이니까 상관없소만, 대체 얼마나 사려고 합니까? 국채 거래 최소 단위가 10만 달러라는 건 알고 계시죠?”
“2억 달러를 각기 T- Bonds(30년 국채)와 TIPS(1년 물가 연동형 국채)에 투자하겠습니다.”
“……!”
오늘 이 노인네 여러 번 놀란다. 우습게 생각했던 동양인 두 사람이 이런 큰 손이었을 줄 몰랐던 것이다.
“더 있습니다. 회장님. 거기에 옵션을 붙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몰아서 말하시오. 지금도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우리가 매입하는 2억 달러의 국채는 레버리지를 10배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도 동의해 주십시오.”
“당신들, 미쳤소? 지금 미국 국채를 가지고 도박을 하자는 거요?”
“보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행을 바라고 무작정 지르는 것을 도박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통계와 계산에 입각한 행동을 투자라고 한다.”
브래든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이건 미친 짓이다. 이들은 미국의 경기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처박힌다는 것을 전재로… 투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그것도1년짜리와 30년짜리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담보로 10배의 레버리지를 써서 20억 달러를 지른다는 말이다. 레버리지는 그냥 주는 여신이 아니다. 반드시 치명적인 전제 조건이 붙는다.
“올해 안에 미국 경기가 무너지지 않으면 당신 보스의 2억 달러는 한순간에 없어집니다. 알고 하는 소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이건 마치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에서 바늘을 던져 백악관의 대통령 대가리를 맞추겠다는 말과 같은 겁니다. 미친 짓이오. 겨우 몇 개월 내에 미국 경기가 급락할 경우는 세계대전이 다시 터지지 않는 한 불가능해.”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콜! 나는 미친 사람을 아주 좋아합니다. 알아서 돈을 바치겠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소?”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 체결 증거금 100만 달러를 수표로 끊어 온 공사홍이 사인을 했다. 나머지 잔금은 9월 10일 전액 납부하는 것으로. 담담히.
그런 공사홍을 바라보면서 손창의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감추느라 꽉 움켜쥐어야 했다. 아직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이 거래를 중개하기는 했지만 그도 브래든 회장처럼 내심 미친 짓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골백 번 짱구를 굴려 봐도 미국 경기가 몇 개월 내에 나락으로 처박힐 일이 없다. 설사 전쟁이 다시 난다 해도 3% 이상 물가가 급격히 폭등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 말은 오히려 올해 말까지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져 미국 경제가 나락으로 처박히지 않는다면, 레버리지 피(Fee)를 감당하지 못한 채… 망한다는 말이다.
차라리 저 돈을 다 맡겨 주면 신사업을 발굴해서 투자하겠는데… 돈의 주인은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 미치겠다.
* * *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손창의는 공사홍에게 소근대듯 물었다.
“공 형, 두렵지 않습니까?”
“…왜요?”
“힘들게 일본에서 성공한 돈이 거품처럼 없어질지 모르는데도 괜찮단 말이오?”
“허허허, 그 걱정을 왜 손 사장이 하고 있습니까? 우리 대표님이 하셔야지.”
“옆에서 봤습니다. 공 형이 얼마나 업무를 철저히 처리하는지를… 그런데 보스의 치기 어린 행동을 말리지 않고 복명한다는 말입니까? 이건 짚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손 사장, 그대는 아직 대표님을 몰라요.”
“…….”
“그게 당신과 나의 차이입니다. 세상에는 상식이란 게 있죠. 항상 상(常), 알 식(識)…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은 그 상식을 뛰어넘어 버리면 인정을 못 해요. 그냥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깜짝 놀라죠.”
“공 형 말씀은 대표님이 구름을 부르고, 태풍이라도 일으키는 분이란 말이오?”
“두고 보면 압니다. 제가 왜 담담할 수 있는지를…….”
두 사람은 변함없이 공항에 마중 나온 시혁의 택시를 타고 비닐하우스 사무실로 왔다.
“신 라면 괜찮죠? 이거 죽입니다. 완전 중독성 쩝니다.”
“내가 끓이겠습니다. 물 조절이 생명인데.”
“에이… 부사장님, 밥은 잘해도 라면은 내가 달인이죠. 적당히 꼬들꼬들할 때 불을 꺼줘야 하는데 항상 퍼지게 하잖아요?”
이 두 사람, 너무 자연스럽다. 그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비닐하우스에서 라면 끓이는 것을 두고 티격태격한다.
지금 거의 2,000억 원을 버리고 오는 길이라고. 인간아!
“계약 잘하셨네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습니다. 역시 손 사장님의 협상력은 베스트, 좋네요.”
“…….”
“일본의 부동산은 일거에 정리합니다. 8월 말일 전에.”
“예, 대표님. 긴꼬 자산관리와 협의는 끝났습니다. 다시 건너가서 도장만 찍으면 당일 입금될 겁니다.”
“긴꼬상사가 큰 마음을 먹었네요?”
“예, 이런 대량 매물을 가진 회사는 우리가 유일하니까요.”
“폭탄 돌리기를 하려면 진땀 꽤나 흘릴 텐데… 고마울 다름입니다. 하하하.”
너무 해맑다. 저 웃음이 올해 말이면 허무하게 변할 것이다. 손창의는 아직 이해 못 한 채 씁쓸하게 라면을 흡입했다.
그런데… 맛있네. 일본 라면과 확실히 다른다.
“미국에 설립한 K 글로벌 USA가 우리 지주회사가 될 겁니다. K 글로벌 재팬은 손 사장님을 지원하는 회사로 남기고요.”
- 아이고, 결국 내가 이 어린 보스와 K 글로벌을 먹여 살려야 하는구나. 그래도 100억 엔이라는 자금은 남겠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손 사장님, 나중에 자금이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까요. 다만, 투자를 하겠다고 결심하셨으면 먼저 선 집행하고 후 보고하십시오.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 예예, 당연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저지른 미친 투자금은 봄눈 녹듯 없어질 게 뻔한 일, 앞으로 내가 벌어야 당신이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손 사장님.”
“예? 예.”
“이번 미국 투자에 대해 확신이 없으시죠?”
“…….”
“그럴 겁니다. 그냥 돈을 버렸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공포라는 말 아세요?”
“공포?”
“그렇습니다. 나는 미국 경기가 급락하고, 대공황처럼 사회가 망가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급격히 물가가 올라서 몇 퍼센트의 추가 이익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요.”
“아직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조만간 미국 역사상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 발생할 거예요. 향후 몇십 년간 학자들이 연구해도 원인을 밝히지 못할… 공포가 밀어 닥칩니다.”
“…….”
“나는 그 공포를 먹을 겁니다. 금융기관들, 투자은행들, 펀드사들이 겪을 공포라는 과실을 따먹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공포는 말입니다. 실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무섭습니다. 전염이 너무 빨리 되거든요.”
“…….”
“나는 미국 월가의 공포를 통해서 우리 자산의 몇 배를 불릴 겁니다. 오늘은 그냥 편안하게 매콤한 한국 라면이나 드세요. 걱정은 내가 할 테니까.”
- 아무리 생각을 또 해 봐도 이 두사람은 확실히 미쳤다. 지금 라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참, 손 사장님 투자금 100억 엔, 그리고 살로만에 보낼 2억 달러, 그래도 조금 남죠?”
“예, 한화로 대충 200억 정도 차액이 생깁니다.”
“그중에 50억 원은 일본에 괜찮은 집 하나 사죠. 앞으로 자주 가야 하는데 묵을 곳이 있어야죠. 차도 사고.”
“나머지 150억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한국으로 보내 주세요. 조금 벌었다고 증명해 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의심을 피하려면.”
잠시 머뭇거리던 손창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보스, 이제 한국도 사무실을 장만하고 차도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가 어때서요?”
“…….”
“…….”
“하하하. 농담입니다. 우리도 돈 지랄을 좀 해 보죠 뭐. 강남 지역에 봐 둔 곳이 있긴 합니다.”
“강남?”
“예, 삼성동 일대인데요. 거긴 아직 노는 땅이 많더라고요. 우리도 이번에 강남 사람이 되어 볼까나… 하하하.”
이제 기다리면 된다.
공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