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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25화 (25/150)

25화 성지를 향한 첫걸음

1987년의 강남.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서울의 중심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습지에 불과했던 강남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사통팔달 대로가 깔리더니 구석구석 건물이 올라가고,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맥주 한 잔 값만 아끼면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던 강 너머 깡촌의 모습은 종적을 감췄다. 멋지게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강남. 오렌지족이라고 명명된 이들은 강남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형님, 여기도 강남입니까?”

“그럼, 강남이지.”

“그런데… 조금 썰렁하다.”

“응, 아직 여기는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곳이니까.”

“여기 개발될까? 도로도 아직 포장공사 중이라 비 오면 진창이 되겠는데. 안 그래?”

- 태식아, 네가 딛고 있는 땅, 거기로 무역센터가 들어오고, 코엑스가 생긴다. 등신아.

“형님, 내가 볼 때 여기는 틀렸다. 차라리 강남역 근처로 가는 게 어떨까? 거기는 오렌지족들이 비싼 차 타고 ‘야, 타!’ 한다더라.”

- 입 닥쳐, 미친놈아. 네가 유학에서 돌아올 때면 천지가 개벽할 곳이 여기거든.

“실례합니다.”

“어? 자취방 구하려고?”

“아뇨, 땅을 조금 보려고요.”

피식 웃는다. 귀때기 새파란 놈들이 무슨 땅? 이런 뜻이다.

“옛날 삼성동으로 생각하면 큰코다쳐. 이제 오를 만큼 올라서 웬만한 돈으로는 땅 못 산다.”

“적당한 곳 있으면 추천해 주심 안 될까요?”

재차 의중을 보이자 그제서야 안경을 내리고 다시 쳐다보는 복덕방 영감님. 나중에야 개나 소나 부동산이라고 간판을 걸지만 아직 복덕방이라는 정감 있는 간판을 달고 있어서 들어온 참이다.

“구획 정리가 다 끝나서 집 지을 땅은 저기 언덕 너머로 가야 하는데? 여기 일대는 다 상업용지야.”

“집 지을 땅이 아니라 건물을 지을 땅을 찾는 겁니다.”

“엥?”

이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혹시 싶은 눈치다.

“여기 탁자에 행정지도 보이지?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지역이 있으면 찍어 봐. 내가 평생 살아온 곳이라 훤하니까… 시세는 알고 왔나?”

진짜냐? 그 정도 돈 있어? 이런 말씀 되시겠다. 탁자 유리 밑에 깔려 있는 행정전도를 슬며시 가리킨다.

“조금 큰 평수를 원하는데요. 할아버지가 매물로 나온 곳을 알려 주세요.”

“허어, 참 별일일세. 그래… 어떻든 손님도 없는 판에 심심했는데 잘됐다.”

“네, 부탁합니다.”

“금방 학생들이 건너온 비포장 길, 무지하게 넓지? 자그마치 왕복 10차선이야. 여기부터 저기까지 사고 싶은 곳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아직 손을 덜 탔거든. 여기는.”

놀랍다. 여기가 어딘데… 나중에는 한 뼘 땅 사기 힘든 곳이 될 삼성동 중심지역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단다.

“평당 얼마나 하죠?”

“대로를 끼고 있는 곳은 많이 올랐어. 한바탕 강남 투기 열풍이 지나갔거든. 지금15만 원은 줘야 살 수 있을 거야.”

“저기 건물이 들어선 곳이 한전인가요?”

“그래, 분양이 저조해서 정부가 억지로 맡긴 곳이지. 83년도에 저기가 평당 9만 원이었어. 한전이 올해 건물을 준공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덩달아 여기 땅값도 같이 올랐지.”

“나도 저 정도 땅을 살 수 있을까요?”

“헐헐헐, 돈만 있으면 살 수 있고 말고. 학생이 꿈은 야무지네.”

“저게 총 몇 평이죠?”

“자그마치 2만 4천 평이야. 못 오를 나무 쳐다보지 말고 두어 블록 들어간 이면도로 쪽이면 작은 평수가 많으니까 그쪽을 보자고. 가격도 10만 원 정도면 흥정이 될 게야.”

“아뇨, 저도 저만큼 사려고 합니다. 대로를 낀 땅으로요.”

할아버지, 파리 들어 갑니다.

“어른 놀리면 혼난다.”

“혼날 일 없으니까 만 평 이상으로 보여 주세요.”

설마? 하다가, 혹시? 하다가, 이젠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다.

“어느 집 자제분이신지… 삼송? 현도?”

결국 사고 말았다. 미래에는 삼성 전철역이 생기는 코너를 끼고 현도 백화점이 들어설 자리를 중심으로 1만 5천 평을.

자기앞수표로 끊어온 일억 원을 계약금으로 내놓았지만, 돈이 조금 부족했다. 총 토지대금 22억 5천만 원의 10%를 지불하려면 1억 2,500만 원이 더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복덕방 영감님과 토지주 일곱 명을 데리고 시혁과 태식은 근처 보람은행 지점을 찾았다.

이미 일억 원 수표를 확인한 복덕방 영감님의 얼굴은 술을 마신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심심파적으로 상대해 줬던 꼬맹이들이 재신이었을 줄이야. 평생 못 벌 수수료를 벌게 생겼다.

마침, 행원이 실수를 했는지 객장에 나와 욕을 퍼붓고 있던 지점장은 우르르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 손을 비볐다.

몇몇 노인은 낮이 익은 사람들이다. 삼성동에 큰 땅을 가진 대지주들이 섞여 있는 일행을 보고 쪼르르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정 사장님, 김 사장님, 이 사장님까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제 방에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천천히 말씀하시죠. 제가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대답들이 없다. 뻘쭘하다. 다들 창구에 앉은 어린 학생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냐? 이 상황이.

“누나, 예금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요. 그리고 이 수표 좀 작게 쪼개서 재발행해 주시고요.”

시혁이 내민 통장과 수표, 그리고 인출 요청서를 쥐고 얼음이 되어 버린 창구 여직원, 이를 의아스럽게 바라보는 지점장, 이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일곱 명의 지주와 복덕방 영감님까지…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다.

“저, 저. 저기 학생, 아니 고객님. 아니 아니 사장님… 죄송하지만 조금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왜요? 내 돈 찾는데도 무슨 절차가 필요한가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 행원은 울 것만 같은 눈으로 지점장을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제서야 지점장은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인 시혁과 그가 내민 통장을 낚아챘다.

아이고 아버지! 하느님 맙소사! 오마이 갓!

그가 확인한 통장의 잔액은 149억 원, 그리고 같이 제시된 수표 일억 원짜리 한 장.

예금 인출 요청서에는 천만 원권 12장과 오백만 원권 2장 발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 너… 다, 당신, 아니 고객님, 누구세요?”

“거기 적혀 있잖아요. 김시혁이라고…….”

“저희 지점에 무슨 일로… 오셨어요?”

“돈 찾으러 왔는데요?”

말이 헛돈다. 서로 질문만 던지고 있었다. 비로소 복덕방 영감과 지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좀 전까지도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은행에 와서 지점장의 반응을 보니 진짜……였네.

이 꼬맹이가 삼성동 코너변 한 블록을 통째 사들이는 거물 중의 거물이 맞았던 것이다. 일억짜리 수표가 가짜일까 마음 졸였던 것이 헛지랄이었구나.

저 통장과 일억 수표를 합하면 150억… 몇 블록을 더 사고도 남는 돈이다.

보람은행 삼성동 지점에 정적이 감돌았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 했다. 너무 엄청난 돈을 구멍가게 휴지 사듯 꺼내는 시혁의 모습에 질려 버린 탓이다.

시혁은 사들인 토지의 인근 땅을 더 샀다. 복덕방 영감의 전화질에 달려온 다른 토지주가 자기 땅도 사 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천 평을 더하여 끝내 2만 평의 주인이 되었다.

강남 열기가 한풀 꺾이고, 특히 삼성동 일대는 아직 개발 호재에서 비껴 나 있는 지역. 평당 15만 원이면 후한 가격이었다.

그러나 시혁은 이 땅이 얼마나 미친놈 널뛰듯 오르는지 잘 알고 있다. 한 평에 일억을 줘도 매물을 찿기 어려운 귀한 몸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여기까지다. 아무리 끝간 데 없이 오르는 귀물이지만,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다려야 한다.

시혁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세상은 넓고 정작 큰돈 벌 곳은 널려 있거든.

* * *

“호오! 이게 다 일본 부동산으로 벌어들인 돈이란 말이냐?”

“네, 거시서 며칠 후에 토지 매입 잔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또 땅을 샀어?”

“예, 강남 삼성동에 사무실을 지으려고 조금 샀습니다.”

“본격적으로 회사를 만들어서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말이구나. 내가 건설회사 하나 붙여 주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무실 건물이면 적어도 몇백 평은 될 텐데 튼튼한 건설사를 선정해 야지”

“…….”

노태후는 적잖이 놀랐다. 지금까지 이런 놈을 본 적이 없다. 천재라는 것은 익히 인정하지만… 진짜 몇 달 만에 이런 성공을 일궈 내다니.

처음 했던 부탁도 처치 곤란한 올림픽 휘장 사업권이라 테스트하는 심정으로 들어주었다. 그런데 박세진 위원장도 백 퍼센트 망하는 파트라고 말릴 정도의 일을 손에 쥐더니 몇 달 만에 55억 원에 달하는 돈을 벌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왜 휘장 사업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있는지라 운이 받쳐 주는 신기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일본? 그것도 천박한 부동산 거래로 이렇게 단기간에 세 배로 돈을 불려 통장을 내놓는… 이런 놈이 또 있을까?

이 정도면 운이 아니다. 이놈에겐 정말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뼛속 깊이 뿌리박힌 불온한 사상. 대놓고 앞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무리라고 말하는 괘씸한 놈.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철저히 고수하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금도 문밖에서는 철없는 딸이 귀를 대고 있을 텐데… 어찌할까?

“요즘 예지 공부는 안 봐주나?”

“조금 바빴습니다. 온 김에 꼴등은 면하도록 잠시 보고 가겠습니다.”

문밖에서 후다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 저. 바보 같은 기집애.

“자네, 외국어는 좀 하나? 듣기에 영어와 일본어가 수준급이라고 하던데?”

“……!”

“험, 험… 자네 뒤를 캐려던 것은 아니고, 일본의 사업가가 자네를 만나려고 두 번이나 입국했다는 말을 들어서 말일세.”

“네, 어학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웬만한 나라의 말은 거의 소통됩니다.”

“허어! 진짜 희한한 물건일세… 중공 말도 좀 되나?”

“제가 한국말을 안 하면 중국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근데 왜요?”

“이번에 서울에서 내년 올림픽을 대비한 각국 IOC 위원 초청 리셉션이 열리네. 그런데 중공 위원을 담당할 적당한 통역이 없어서 말이야.”

그랬다. 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부를 정도로 적성 국가 취급을 받던 나라가 중국이었다. 6.25 전쟁 이후 미국은 대중국 금수 조치를 통해 경제 봉쇄를 실시했다.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국제적인 고립작전을 편 것이다.

그래선지 한국에서 중국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마저도 간첩 비슷하게 취급하는 배타적인 분위기가 중국어 전공자의 씨를 말린 셈이다.

담벼락마다 ‘멸공’, ‘반공’이라고 빨간 페인트로 써 놓던 서글픈 시절이었으니 오죽하랴.

불현듯 시혁의 머릿속으로 기막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제가 한 팔 거들겠습니다. 행사가 언젭니까?”

“그래? 잘됐구먼. 회사(안기부) 중공 담당자를 한 명 붙여 줄 테니 같이 일정 조정을 해 보게나. 큰 짐을 덜게 되었어. 껄껄껄.”

“네. 도와주신 게 적지 않은데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 다행입니다.”

노태후는 시혁이 구입했다는 삼성동 땅이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알았네. 그런데 삼성동에 매입한 땅은 얼마나 되나? 자네 배짱에 몇십 평 사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만 평입니다.”

“케엑! 이런 이런, 미안하네.”

마시던 물을 뿜어 버렸다. 이 미친놈. 아무리 간이 커도 그렇지. 한전 부지만큼 샀다는 말이네. 겨우 대학교 1학년생이.

“자네… 사무실을 지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예, 거기 사무실을 올릴 겁니다. 제 왕국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곳, 삼성동으로 정했거든요.”

놀라긴 일러요. 이제 시작입니다.

일본과 미국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을 찍고 돌아와 삼송을 통째로 먹을 전진기지… 거기가 삼성동입니다.

김시혁이라는 희대의 빌런이 만드는 세상 훔치기의 성지…….

‘예, 그곳은 성지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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