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천조국 침공 (2)
열도는 하이에나들의 마지막 잔치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메릴린치의 극비 보고서가 유출되면서 예상과 다르게 시작된 2차 버블,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잠자고 나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 들 때 가격과 숟가락 놓을 때 가격이 달랐다. 매물이 나왔다는 소문만 나면 벌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 부사장님, 또 왜 이러십니까?”
“시장 논리대로 가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래도 그렇죠. 전에 양해 각서까지 체결한 것을 지금 와서 갑자기 올리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까짓 법적 효력도 없는 양해 각서 거론하지 마시고… 지금 결정하시죠. 저는 이토추 상사분들과 다음 약속이 잡혀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만.”
“…….”
죽이고 싶겠지. 당장 방아쇠를 당기고 싶을 거다. 그러나 어쩌랴. 손잡이를 쥐고 있는 건 나고, 칼날을 쥔 쪽이 너희인데.
공사홍은 느긋했다. 너희 아니라도 사 줄 놈은 줄을 서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투다.
“K 글로벌의 세금까지 우리가 부담하면 아무리 앞으로 가격이 더 올라도 부담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시죠.”
“차 잘 마셨습니다. 그럼…….”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급히 일어나시면 어떡합니까? 조금만 조절을 해 달라는…….”
“이토추 상사는 이미 사전에 다 수용하겠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그나마 그동안 긴코와의 우정을 생각해 먼저 기회를 드렸어요. 제가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다는 거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우정? 이게 우정이냐? 그냥 야쿠자의 칼만 없다 뿐이지, 강도 같은 놈아!
“일본 어디를 뒤져도 긴자에 94채의 빌딩을 가진 회사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긴코가 이를 전부 인수하면 단숨에 일본 부동산 업계 1위가 되는 겁니다.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그게 무리한 거야. 깡패보다 더한 새끼야. 세금을 다 떠안으면 30% 이상 올려주는 거라고.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가격은 시간만 지나면 오르기 마련이고, 긴코에서 은행 원금이 부담된다면 승계를 하시구려. 당분간 이자만 갚다가 나중에 되팔 때 정리하는 방법이 어떠신지?”
- 그게 그거지. 지금 갚으나 나중에 갚으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안 받을 수가 없다. 지금 파토 내면 긴코 투자자들이 경영진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저 날강도 조센징… 저놈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 주인은 더한 놈이겠지.
“하하하. 마무리를 잘하셨네요? 좀 심했다.”
[시혁아, 이렇게라도 아버지 복수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여한이 없어. 나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또 감상에 젖으신다. 100억 엔을 더 받아 내신 승부사가… 참, 이끼 다다시상은 좀 챙겨 주셨어요?”
[그래, 현금으로 일억 엔 줬다. 그리고 당분간 K 글로벌 재팬 전무직을 맡길까 싶다.]
“좋죠. 아저씨가 인재라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얼마든지 고용하세요.”
[이제 미국만 남았구나. 내일 브래던 회장에게 2억 달러 송금하고 바로 출발하마.]
“예, 이번에 미국 가시면 태식이 거처도 좀 알아봐 주시고, 제일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존 메리웨더!”
살로만 브라더스의 신임 회장 존 굿 브래던과 엄청난 레버리지 거래를 체결했었다. 이제 미국 침공의 마침표를 찍어 줄 사람을 포섭해야 한다.
브래던 회장과 매번 충돌하는 살로만 브라더스의 펀드 매니저 존 메리웨더는 이번 작전의 키맨이고… 그는 미국 침공의 사령관이 될 사람이니까.
* * *
“FUCK! FUCK! 개나 물어갈 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뉴욕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미국 마천루 역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여기 88층에 뉴욕풍의 전통 바(Bar)가 있다. 더럽게 비싼 곳이다. 일반인은 섣불리 접근하기 쉽지 않은 회원제 술집.
그 바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왜소한 백인은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연신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가 한잔 사도 될까요?”
“…누구?”
“남는 게 돈과 시간뿐인… 당신들이 경멸하는 동양 원숭이랄까?”
“잽(Jap)?
“다행히 일본인이 아니라 코리안이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지요.”
“잽이나 코리안이나 마찬가지, 하여튼 술은 다른 사람에게 사고, 혼자 있게 해 줘.”
“술은 고통을 줄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실연의 고통은 새로운 연인을 사귀면 없어집니다.”
“훗!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한테는 독사 같은 아내가 있어.”
“일도 마찬가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고통만 길어집니다.”
“어쭈! 점점 가관일세. 뭘 안다고 주절주절 지껄이는 거야?”
“미스터 메리웨더, 나는 당신의 고통을 끝낼 카드를 가지고 있어. 말 함부로 내뱉지 마.”
“…너 누구야?”
“말했잖아? 네 고통을 깨끗이 해결할 수 있는 마술사라고.”
“조까, 마술 같은 소리 그만하고 왜 나한테 접근한 거야? 너 정체가 뭐야?”
“이제야 내 술 받을 준비가 되셨군.”
명함을 보고 멍한 표정의 메리웨더. 처음 보지만 익히 아는 이름이다. 얼마 전 회장이 이 회사 때문에 잔치를 벌였다고 들었으니까.
소위 돈을 바치지 못해 환장한 미친 투자 회사라나.
“내 이름을 알고 술잔을 내밀 정도면 내가 회장과 반대로 배팅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왔겠지?”
“빙고!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야. 메리웨더.”
“적의 적은 친구다?”
“아니, 오히려 당신을 스카우트하려고.”
“미친! 내가 아무리 막장으로 가고 있지만, 당신 회사 같은 또라이에게 빌붙어 밥 먹을 정도는 아니거든?”
“그럴까? 올해 말이면 회장이 당신 목을 단칼에 자를 거고, 그 멍에를 가진 채 재취업이 될까?”
“…….”
“그래, 당신은 말이야. 갈 곳이 없어. 퇴직금 받으면 남은 여생 낚시나 하면서 살 수는 있겠다. 낡은 포드 트럭을 몰면서… 그지?”
잔인하게 심장을 파고드는 송곳 같은 말. 하지만 반박을 못 하겠다. 사실이다.
메리웨더는 올해 말이면 갈 곳이 없다.
“더 지껄여 봐. 당신 회사도 2억 달러를 허공에 날리고 비참하게 없어질 지경 아닌가?”
“천만에, 우리 회사는 10월에 성대한 잔치를 할 거야. 당신 회장의 무식한 판단을 먹이 삼아서.”
이쯤되면 광기가 아니라 확신?
“당신,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군. 물론 말을 안 해 주겠지?”
“Nope! 그건 나도 몰라. 오직 보스 한 분만이 아신다.”
“이봐, 공. 이거이거 위험해. 한 사람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판단하는 거…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말이거든.”
“메리웨더, 우리 내기할까? 네가 옳은지, 보스가 옳은지.”
“……!”
“보스의 말씀에 의하면 10월 중,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질 거야. 그때서야 당신은 보스의 판단을 이해하게 될 거고.”
“완전히 미쳤군. 당장 여기서 나가! 미친 새끼야!”
“하하하,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 명함… 잘 가지고 있어. 내 직통 번호야.”
두 사람의 간극은 너무 컸다. 공사홍은 시혁의 예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고, 존 메리웨더는 단 한 치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 누구든 앞 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하지만 상식이 깨지는 순간 기적은 등장한다. 멀지 않았다.
[쩝… 먹히지 않는구나.]
“그럴 겁니다. 겪어 보기 전에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아저씨가 이상한 거지.”
[시혁아, 정확한 날짜를 특정할 수도 있냐?]
“예, 이제 한 달 하고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10월 19일 월요일, 미국은 한 번도 못 겪어 본 상황에 빠집니다. 우리는 그 공포를 기다립니다.”
[10월 19일 월요일…….]
“예, 아마 역사는 그날을 일컬어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라고 부를 겁니다.”
[그런데 시혁아. 네 예측대로 미국 증시가 대혼란에 빠진다고 치자. 그래도 우리가 보상받는 것은 얼마 안 되지 않나?]
“아저씨, 사람은 평상시라면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하지만요, 공포가 뇌를 장악한 이후에도 계산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무조건 살길을 찾아 달리는 거죠.”
[솔직히 무슨 말인지 백 퍼센트 이해를 못 하겠다. 내 머리의 한계인가 보다.]
“두고 보세요. 우리는 당당히 깃발을 꽂을 겁니다. 미국의 심장부라는 월가에.”
* * *
처음 시작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홍콩 항셍지수가 420.8포인트(11.1%)나 빠졌다. 이 충격은 즉시 도쿄, 시드니,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 증시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런던 증시가 개장되자 10.8%가 폭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증시는 밤에 잠겨 있었고, 일부 금융사가 주의 깊게 살폈으나 소폭의 하락에 그칠 것이라 생각하며 덮어 버렸다.
미국 증시는 거의 독보적인 활황세였으니까.
정작 이 군불에 장작을 던져 넣는 원흉이 밤새 가동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의 누구도 감지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신기술로 여기던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 매매 프로그램이 그것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맹신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286에서 386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컴퓨터가 불러온 혁명, 이를 활용한 자동 매매 프로그램은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의 통계 수치를 입력한 자동 매매 프로그램은 시장이 5% 이상 급변하면 무조건 방어 매매에 나서도록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는 밤 사이 아시아에서 몰아닥친 급변 사태를 감지하자 최고 등급의 자동 매도 주문을 스탠바이 상태로 락온(Lock- on) 시켜 버렸다.
그리고.
아침 9시 뉴욕 증시가 오픈하자마자 자동으로 매도 주문을 쏟아냈다.
한 회사가 아니라 월가의 거의 모든 펀드매니저 컴퓨터가 동시에…….
검증되지 않은 전산 시스템의 함정이 마침내 발동한 것이다. 자동 매매 프로그램이라는 목동의 총성이 울린 셈이다.
이를 본 양 떼들이 공포에 질려 달리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절벽으로 추락하는 장세를 보면서 덩달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는 탈출 작전에 가세했다.
양 떼들은 바늘 구멍 같은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한 푼이라도 건져야 거지 꼴은 면하니까.
공포라는 대마왕이 뉴욕 증시를 와락 덮쳤다.
“시혁아…….”
[예, 시작되었군요.]
“진짜 네 말대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음… 지금 뉴욕 시간 오전 10시, 아직 멀었습니다. 장 마감까지 지켜보세요.]
“언제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절로 양 떼와 반대로 늑대들이 몰려들 겁니다. 그때 경쟁을 시키세요. 계산기 따위 다 던지고 광분할 때, 우리는 단순한 안전 자산인 미국채를 파는 게 아니라…….]
“꿀꺽!”
[그들의 공포를 먹는 빌런이 되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월가의 모든 금융사에게 우리 채권의 존재를 미리 알리라고 한 거구나.”
[큭큭큭… 그동안 미친놈이라 비웃던 늑대들에게 레버리지까지 써서 손에 쥐고 있는 미 국채 20억 달러는 등불입니다. 이 공포를 벗어나게 해 줄 동아줄로 보일 거예요.]
“어느 정도를 마지노선으로 잡으면 될까?”
[T- Bonds(30년 국채)와 TIPS(1년 물가 연동형 국채) 각기 10억 달러씩 가지고 있습니다. T- Bond는 미끼 상품이고, TIPS 가 진짜죠. 여기에 불을 지필 겁니다. 메리웨더가.]
“메리웨더?”
[예, 그가 키맨입니다.]
“그 사람은 일체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 같았다만…….”
[아뇨, 협조를 하라고 아저씨를 접근시킨 게 아닙니다. 경각심을 일깨워 준 거죠. 그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할 겁니다. 그게 도화선으로 월가는 온통 불바다가 돼요. 기다리면 됩니다. 딱 일주일만.]
“일주일?”
[아까 마지노선을 물어보셨는데, 그건 아저씨가 판단하세요. 최대한 많이 긁어모으는 거죠.”
“최대한 많이. 신나는 말이구나.”
[예, 어차피 우린 빌런이 되기로 했잖습니까?]
“어쩌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악당으로 기록될 수도 있겠다.”
[원래 빌런은 욕을 먹는 역할입니다. 하하하하.]
공사홍은 객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광장에 월가의 상징 황소상이 돌진할 듯 사납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칙칙한 먹구름이 오전의 햇빛을 가리며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폭풍우가 닥칠 모양이다.
뉴욕이 시커먼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