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천조국 침공 (3)
“팀장,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화가 빗발칩니다.”
“와그너. 잠깐만, 기다려.”
“지금까지 1억 2천만 달러 손실입니다. 더 하락하면 수습이 안 된단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만 보는 손실이 아니다. 문제는 이후의 대응책이야.”
“……!”
“얼마나 갈까? 이 공포가.”
“그걸 누가 예측할 수 있겠어요? 신이 아닌 이상.”
“……아니, 한 명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결국 뉴욕 증시는 하루만에 22.6%가 폭락했다. 다우존스 지수 508포인트, S&P 지수도 20.5%가 하락하는 것으로 악몽 같은 장을 마감했다.
살로만 브라더스의 각 층 사무실은 모두 정적에 잠겨 있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한결같이 앞날에 대한 깊은 공포에 휩싸여 축 늘어져 있었다.
“와그너, 배신자 지미에게 슬쩍 물어봐. 그 입 싼 새끼라면 자랑삼아 털어놓을 거야.”
“팀장, 이미 물어봤어요.”
“오! 역시… 뭐라던가?”
“대공황의 전조라고 보는 모양입니다. 당시 4년 간 내리 하락을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에 버금가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정부 채권을 미친 듯이 사들이고 있답니다.”
“흐흐흐. 역시 그놈들이 맞았군. 회장이 전에 팔아 치운 20억 달러를 생각하면 뒷목 잡고 넘어가겠다.”
“그… 무슨 글로벌인가 하는 동양계 회사?”
“응, 회장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과감히 배팅을 할 거야. 다른 방법이 없어. 나중에 이사회에서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요오?”
“기다리라고 했잖아. 우선 통화부터 해야겠어.”
객실 전화가 울리자 공사홍은 받지 않았다. 이 새끼… 애가 타 미칠 지경일 거다. 바로 다시 전화 온다에 이끼 다다시의 손목을 걸 수 있다.
또 연이어 전화가 울렸다.
“예.”
“교환입니다, 존 메리웨더라는 분이…….”
“받겠습니다. 연결해 주세요.”
다행히 이끼의 손목은 자르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굿 이브닝, 존!”
“…안녕하시오. 공.”
“찰리라는 영어 이름이 있소만.”
“반갑소, 찰리. 다름이 아니라 잠시 볼 수 있을까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이봐, 메리웨더. 당신은 나를 만나 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미안하오. 전에 심하게 말했던 것 사과드립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때 당신에게 두 장의 명함을 줬어. 그중 한 장이 한국에 있는 보스 번호야. 그리 전화해.”
“한국의 당신 보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네… 쯧, 열쇠는 나에게 없어. 오직 보스에게 있거든. 마침 한국 시간은 낮이겠네. 경고하는데, 정중히 대하는 게 좋을 거야.”
* * *
겨우 비닐하우스를 벗어난 것만으로 태식은 방방 뛰며 좋아했다. 스님 허락도 받았고, 시혁 형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영어로 대화하라는 구박이 귀찮지만 이정도는 애교로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후 미국으로 유학가면 몇 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삼성동과 가까운 대치동의 작은 아파트로 시혁과 태식이 거처를 옮긴 지 한 달여.
“형님, 아무래도 형님을 찾는 것 같은데?”
“누군데?”
“영어다.”
“이 새끼, 아직도 기본 회화가 안 돼? 막상 유학 가면 어쩌려고… 에잉. 이리 내.”
눈을 흘기며 전화를 넘겨 받은 시혁. 뻔하다, 이 번호로 전화할 미국 사람은 딱 하나뿐인 까닭이다.
“헬로우, 메리웨더.”
[…내가 누구라고 아직 밝히지 않았소만.]
“한국 속담에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이 있거든요.”
[당신의 현명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마이다스 킴.]
“대충 1억 달러 이상 손실을 봤으니, 오늘 하루 힘드셨겠군요.”
[…….]
“아! 당신 팀에 스파이를 박을 정도는 아닙니다. 괜히 다른 팀원 의심하지 마시오.”
‘11년 후 당신은… 세계적으로 워낙 유명세를 타서 내가 모를 수가 없소이다. 메리웨더.’
[휴… 이젠 당신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어찌 해야 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
“내가 왜 당신에게 금쪽같은 정보를 알려줘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당신, 프로 아닌가요?”
[그렇군요. 나는 프로, 맞습니다. 그럼 어떤 대가를 치르면 되겠습니까? 알다시피 조직에 묶여 있는 처지라 공식적으로 컨설팅 피(Fee)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 푼돈 벌려고 당신 전화를 기다렸다 생각하면 오산이요. 알잖아요?”
[좋습니다. 조건을 말해 주시오.]
“당신이 탐나는 것이지. 나는.”
[왜? 나는 곧 모가지가 잘릴 퇴물 펀드 매니저에 불과한데 말이오.]
자세가 바뀌었다. 이미 기울어진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정식으로 상대해 주지.
“지금은 그래. 하지만 덕지덕지 묻은 흙을 털어 내면 놀라운 빛을 발할 보석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거든.”
[처음 들어 봅니다. 내가 보석이라는 말.]
“이봐. 메리웨더. 다이아몬드가 뭔데? 왜 그리 열광할까? 그까짓 탄소 덩어리에 말이야.”
[…….]
“하찮은 돌 조각을 빛나게 하는 것은 커팅의 차이야. 클래식한 오벌 컷, 투명도를 돋보이게 하는 바게트 컷,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은 프린세스 컷… 수많은 방식이 있어. 나는 그중에 페어 컷으로 세공한 것을 제일 좋아해. 흔히 물방울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명품을 만들거든.”
[…….]
“페어 컷을 한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정말 흔치 않아. 그런만큼 고결하고 찬란한 빛이 나지.”
[…….]
“존 메리웨더, 당신은 아직 커팅 되지 않은 원석이야. 그걸 물방울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어.”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게임 오버다. 이제 메리웨더는 내 사람이다.
왜 시혁이 그토록 존 메리웨더를 원했는지 지금은 아무도 이해를 못할 것이다. 11년후 이 사람이 설립한 롱텀캐피탈 매니지먼트(LTCM)로 인해 미국 재무부가 파산지경에 처한다는 사실도.
그러나 존 메리웨더는 11년 동안 매년 평균 40%의 전무후무한 수익을 거두는 천재 펀드 매니저였다. 마지막 갬블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블랙 먼데이 같은 천재지변을 만나지 않았다면 미국 전체 자산 10%를 쥐고 운용한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이제 그 돈을 내가 먹어 주마. 롱텀캐피탈 매니지먼트(LTCM)도.
“메리웨더, 당신 회장 브래던은 이 공황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에 배팅할 거야. 맞지?”
[그렇습니다. 내부 정보에 의하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당신은 거꾸로 가야 해. 무조건.”
[역발상?]
“아니, 그런 단순한 갬블이 아냐. 이 혼란은,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 양 떼들의 공포는 곧 진정될 거야. 지금 회장이 가지고 싶어하는 30년짜리 신규 발행 채권은 쳐다보지도 마.”
[그럼 저는?]
“3개월 전에 발행된 29년 9개월짜리 채권을 집중 매입해야지.”
[그 차이는 뭡니까?]
“이런이런… 아직 꿈을 못 깼어. 메리웨더.”
[…….]
안 봐도 뻔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붉어진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있을 것이다.
“공포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야. 양 떼도 늑대도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30년 꽉찬 신규 발행 채권만 찾을 거라고. 겨우 3개월이 지났건만 기발행 채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말이지.”
[……!]
“그런 거야. 공포에 잠식된 뇌는 계산기를 던져 버리고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굴만 찾게 되어 있어. 그게 뱀 굴인 줄 모르고.”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간극이 엄청나겠군요. 겨우 3개월 차이지만… 거의 15% 이상… 굉장한 발상입니다.]
“그래. 그래서 당신 회장에게 30년 국채를 10배 레버리지까지 쓰면서 산 거야. 일주일 뒤 사태가 진정 되면 당신 회장의 국채는 고비용을 지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거꾸로 15% 저렴하게 구입한 기발행 채권은… 재평가를 받게 되는 거고요.]
“빙고! 나는 이미 배 터지게 벌었어. 2억 달러 투자로 5억 달러는 수확할 수 있을 거야.”
[보스! 하지만 10억 달러는 TIPS(물가 연동형 국채)에 투자하신 거 아닙니까?]
보스란다. 꽤 듣기 괜찮다. 세기의 보석이 될 천재에게 듣는 존칭이다.
“30년 물 T- Bonds에서 15% 수익이 나겠지. 이건 미끼고, 실상 주공은 TIPS라고. 사람들 대다수는 당신 회장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
[…….]
“TIPS는 앞으로 더 발행이 안 돼. 기존에 발행한 것을 빼고는 시장에 없다는 말이야. 양 떼들은 향후 몇 년간 엄청나게 물가가 폭등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대공황의 전조라 생각하니까.”
[……! 손실 보전을 하려는 묻지마 투자. 최후의 발악!]
“그래. 벌써 공 부사장은 TIPS를 팔아 달라는 양 떼에게 시달리느라 죽을 지경일걸?”
[도대체 보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메리웨더. 이번 팁으로 당신이 회사에 지고 있는 손실, 한 방에 다 벌충해 주고 깨끗한 몸으로 나와. 그런 다음 이번 수익 5억 달러와 원금 2억 달러를 가지고 우리 일을 하는 거야.”
[그래서 저에게 상세한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까?]
“그럼! 내 사람이 실패라는 멍에를 지는 꼴, 나는 못 보거든. 하하하.”
[제 팀원 중에 와그너라는 우직한 놈이 있습니다.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근, 업계 최고 대우는 기본으로 깔아 두지.”
[보스,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동양인 목소리를 구별하기 힘들다지만 굉장히 젊게 들립니다만…….]
“응, 나 20살. 올해 대학교에 입학했어.”
[OMG! Jesus!]
* * *
정확히 일주일 만에 승부가 갈렸다. 밀물처럼 밀려왔던 블랙 먼데이 사태는 썰물처럼 없어져 버렸다. 증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왔다.
살로만 브라더스의 회장 존 굿 브래던은 추가 국채 거래로7천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반면 메리웨더의 팀은 추가 국채 거래로 1억 5천만 달러의 이익을 회사에 안겨 주었다.
블랙 먼데이 발생으로 입었던 손실도 거의 제 자리를 찾은 지금 회사에서 메리웨더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회장이 별거냐? 월가에서는 돈만 많이 벌면 최고다. 작년 메릴린치의 연간 수익이 4억 달러였던 것과 비교했을 때 메리웨더의 경이적인 수익은 전설로 남을 만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월가에 겨우 2억 달러를 들고 들어와 4개월 만에 총 5억 달러의 이익을 일군 의문의 회사 K 글로벌 USA…….
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진 놈의 정체가 뭐냐?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다크호스의 등장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행여 1 달러라도 움직이면 바로 뒤를 쫒을 심산인 거다.
월가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실적만 믿는다. 승자독식은 월가에서도 적용되는 룰. 어마어마한 투자금이 실적을 올린 회사로 몰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K 글로벌 USA는 만성적인 공실률에 골머리를 앓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다섯 개 층을 계약하고 아직 입주도 안 했다.
“메리웨더, 자네가 회사를 살렸어. 겨우 투자자들이 안정되었네. 큰 공을 세웠어.”
“왜 회장님이 입힌 손실 때문에 투자자들이 떠난 것은 거론하지 않는 겁니까?”
“허허허. 이 사람, 기분이 많이 언짢았구만. 자네나 나는 모두 프로 아닌가? 기분 풀고 재계약에 대해서 논의 해 보세.”
“백지수표라도 나오나요?”
“자네가 원한다면 내 이사회를 설득해 보겠네. 백지수표도 가능하고말고. 암!”
“흠… 미안하지만, 오늘부로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이번에 수익 창출한 부분에 대한 커미션, 정확히 정산 바랍니다.”
“……!”
“참! 여기 사직서… 제 것하고 와그너, 그리고 메린, 조엘도 같이 나갑니다.”
“왜 이러시나? 개인적인 감정은 묻어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자네는 지금 스타야. 몸값이 최고라는 말이지. 월가라는 정글은 독립하기 만만한 곳이 아냐.”
“아이고, 새로 입주할 사무실이 휑해서 할 일이 태산입니다. 우리 내기할까요? 1년 후 누가 월가라는 정글에서 살아 남는지?”
“…….”
“아! 아직 모르시는구나. 내가 어디로 옮기는지… 회장님이 가질 수 있었던 5억 달러를 인터셉트한 그 회사, K 글로벌 USA 기억하시죠?”
“헉!”
“예, 제가 거기 신임 CEO겸 수석 펀드 매니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브래던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