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또 이 지랄이냐?
시혁은 여전히 학교에 나갔다.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을 옮긴 뒤로 매일 검정색으로 썬팅된 차가 집 앞에 서 있는 장면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끄집어낸 뒤 박살을 내고 싶지만… 아직 살벌한 도살자 전도환이 대통령이다.
노태후는 민공당의 총재 권한 대행을 거쳐 정식으로 민공당 대표가 되었다. 권력의 균형이 서서히 기울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막바지 정권의 감시 따위 깨끗이 무시해 주는 것으로 정신 승리를 만끽하자.
교정은 평화로운 풍경을 되찾았다. 산발적으로 ‘나가자!’를 외치는 학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켰다는 승리감에 시큰둥한 분위기다.
강의실은 대체로 8대 2로 나눠졌다. 교양과목으로 대충 꿀강의 일정을 짜고 그동안 못 했던 연애질에 빠진 2와, 처음부터 법전을 파고 있는 8.
한국대 법대다운 모습이다.
시혁은 OT도, MT도 참석하지 않았다. 예전 생처럼 수학 동아리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선택한 케이스다.
그런 시혁에게 선뜻 다가오는 동기도 몇 없었다. 너무 부담스러운 탓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별종은 있는 법.
“야! 오백 원만 줘봐.”
“너, 지금도 고삐리처럼 삥 뜯냐?”
“삥은 무슨… 그냥 달라는 거지.”
“그게 삥이야, 새끼야.”
“시혁아, 솔직히 나 배고파 뒈질지도 몰라. 삼 일 굶었어.”
“너 입술에 고춧가루 붙었다.”
누구든 만나면 오백 원을 구걸하는 이 새끼. 별명도 ‘오백 원’이다.
참 애매한 돈이다. 안 주자니 치사해지고, 그렇다고 대학생 주머니서 선뜻 나오기 쉽지 않은 금액. 백 원 더 보태면 짜장면이 한 그릇인데…….
“시혁이 너 저번 중간고사도 몽창 아뿔(A+)이냐?”
“응, 기본이지.”
“너 같은 놈은 비 오는 날 비 쫄딱 맞고, 눈 오는 날 미끄러지고, 벼락 칠 때 바짝 구워졌으면 좋겠다. 재수없어.”
“이 또라이 새끼. 여기 오백 원… 얼른 꺼져라.”
“흐흐흐. 진작 내놓을 것이지. 근데 백 원 더 없냐?”
“…….”
“오백 원짜리 한 장 더 줘도 괜찮아. 새로 나온 500원짜리 동전도 받는다.”
살인은 이래서 나는 거야. 참아야 한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새겨진 500원 지폐를 한 장 더 삥 뜯기고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박하송은 늦깎이 대학생이다. 무려 사수를 한 끝에 서울대 법대 문턱을 넘은 처지.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의 나이를 내세워 형 행세한 적이 없었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빈대 붙기를 주특기로 삼는 놈이다.
그래서인지 시혁에게도 넉살스럽게 엉겨서 돈을 뜯어내는 한량이었다. 시혁 또한 넉살 좋은 박하송을 편하게 대하곤 했었다.
사철 물들인 군복을 입고 오백 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시혁은 알고 있었다. 박하송이 누구인지.
1960년대부터 한국 증권가의 대모로 불리던 백 할머니라는 분이 있었다.
평양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당시 최고 인텔리 여성이었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체구에 객장에서 타임지를 읽을 정도였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시골할머니로 착각할 만큼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었다.
이 백 할머니야말로 대한민국 최초의 슈퍼 개미라고 불릴 만한 분이었다. 1960년 한국 증시의 시가 총액이 1,000억 원 내외였다. 당시 백 할머니는 300억 원 정도를 주식 투자에 동원할 정도였으니… 가히 증권가의 대모에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자금을 굴린 대한민국 증권사의 산 역사가 아닐 수없었다.
그런데, 이 오백 원만 외치는 상거지 박하송이 백 할머니의 유일한 혈손이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인들 할 수 있을까.
시혁은 오백 원 지폐 두 장을 삥 뜯고 희희낙락하는 박하송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희한한 놈이다.
‘하여튼 너도 내 계획에 있는 놈이니까… 장바구니에 넣었다. 찜!’
오늘따라 찝찝했던 기분이 박하송의 뻘짓거리에 조금 풀렸다.
언제부터인지 은밀히 지켜보는 눈길.
처음에는 안기부나 노태후가 붙인 꼬리로 생각하고 무시를 했었지만… 아니다.
고도로 훈련된 프로가 아니다. 어설픈 행동으로 힐끔거리지만 티가 난다.
지금 나를 노릴 다른 세력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두 사람밖에는.
흐흥… 한 번쯤 어떤 액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
보자. 어느 쪽인지.
* * *
다소 지루한 헌법학 강의를 듣고 시혁은 책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나 시혁이 보던 것은 헌법학과 전혀 다른, 생전 처음 보는 언어로 쓰인 책이었다. 그런 시혁을 보는 질린 눈빛들.
교수들도 벌써 시혁을 간섭하지 않는다. 출첵에 빠진 적 없고,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져도 막힘없이 행간에 숨은 뜻까지 읊어 대는 놈에게 무슨 시비를…….
다른 책을 보고 있던 시혁에게 맞장 대결을 펼친 교수가 개처발린 후로 아예 경원시되는 분위기다.
레포트 제출을 어긴 적도 없고, 시험 성적은 올 아뿔… 저놈은 가만 놔둬도 소년등과는 걱정 없다고 인식이 된 것이다.
머리 처박고 안 자는 것만 해도 고마운 지경이다.
별다른 약속이 있을 턱이 없는 시혁은 정문 ‘샤’ 철골 조형물을 걸어 나왔다. 버스를 타려면 우측으로 한참을 걸어야 한다. 아직 숙소인 대치동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면의 로터리를 바라보며 우측 미술관 경사진 길을 따라 말없이 걷던 시혁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기 어려운 입장이 되어 버렸다. 시혁을 미행하던 대우 프린스 승용차의 운전사와 조수석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퉁퉁-
시혁은 차 옆으로 다가가 창문을 두드린 후 창문을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뭐시여? 학상.”
“타도 돼?”
“당최 뭔 소리를 한당가?”
“여기는 학생들 눈도 많은데 조용한 곳으로 가지. 그게 너희들 바라는 거잖아?”
“…….”
“문 열어, 괜히 힘빼지 말고.”
그제서야 뒤쪽 창문이 반쯤 열리며 선글라스를 쓴 거구의 얼굴이 보였다. 시혁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그려, 우리가 좀 서툴렀나 벼. 여그 뒤로 타더라고.”
“한 칸 옆으로 가. 그래야 내가 타지.”
“오메오메. 배짱 좋은 거 보소. 어린 학상, 쪼까 맘에 든다잉.”
구수한 사투리 뒤에 숨은 진한 살기. 사람 서넛은 잡아 본 놈이구나.
시혁은 사내가 옮겨 앉은 좌석 뒷자리에 타자마자 머리를 묻었다.
“도착하면 깨워라. 공부하느라 머리가 깨질 것 같다.”
“…….”
시혁 자신도 내심 놀라는 중이다.
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평생 닭 한 마리 잡아 보지 않은 나약한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험을 피하기는커녕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다니.
그럼에도 전혀 쫄리지 않는다. 오히려 은근 기대가 앞선다. 생매장당하던 마지막이 너무 처참했던 탓인지… 아니면 본성 깊숙이 봉인된 그 무엇이 눈을 뜬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절대 다시는, 당하고 살지 않아. 양보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내 마음대로 살 거다.’
시혁의 가슴에 매달린 옥빛 목걸이가 옅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빛이었다.
“언제 알았데여?”
“그 아가리 좀 닥쳐라. 양파 먹었지? 손님 맞으러 오면서 양치도 안 하냐?”
“오메오메. 이 깡 보소. 죽이는구마이. 근디 말이여… 차를 타기 전 같으믄 이해가 되는디 지금은 아니지 않여?”
순간 선글라스가 날아가고 사내의 턱이 덜컥 하더니 차창에 이마가 처박혔다. 정신 줄을 놓은 사내가 침을 흘리는 중에 바닥에 흩어진 이빨 몇 개가 번쩍거렸다.
“어이! 거기 앞에 놈, 이 손도끼는 네가 맡아 뒀다가 나중에 이 새끼 깨면 돌려줘라.”
시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작은 손도끼를 조수석으로 내밀었다. 뒤에서 일어난 소리를 듣고 몸을 돌리던 앞좌석의 사내는 앗 뜨거! 하는 표정이다.
“안 받아? 던져 줘?”
“…아닙니다요. 잘 보관하겠습니다요.”
“또 깨우면 뒷통수를 으깰지도 몰라.”
“…….”
“대답해야지.”
“옙, 알겠구먼이라. 도착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이제 프린스의 차 내부는 운전하는 놈의 침 삼키는 소리 외에는 침묵에 잠겼다. 마침 백미러로 다 봤던 참이다. 조직의 넘버 쓰리가 한 방에 옥수수를 털리고 정신 줄까지 놓아 버렸다. 가격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왔다메… 잘못 건드렸당께. 워째 알아서 타더만. 숨도 쉬지 말더라고.’
“쩌그… 인자 다 와부렀는디 어째야 쓰까…….”
“그래? 조금 더 자면 좋았을걸 야! 조수석 순두부. 안내해라.”
부산 청사포 동굴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힘이 불끈 솟는 것을 느꼈다. 어디가 한계인지 정확히 측정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이 기분이라면 산도 들어올릴 것 같다.
“어? 청계산이네. 여기 숲속에 너희 오야붕이 기다리는 거야?”
“…….”
“순두부, 앞장서. 참! 차 안에 잠든 놈, 물 한 바가지 부어 줘라. 얼른 깨워야지. 입 돌아갈라.”
꼭 자기 집 앞마당에 온 것처럼 편하게 걸어가는 시혁을 향해 운전하던 놈은 자신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야… 진짜 와부렀네. 왔어. 근디 도끼는 왜 안 나와?”
“여기는 다 구수한 사투리 일색이네. 그쪽 동네 조직인가 봐?”
“아그야, 너 시방 안 무섭냐?”
“누구? 너? 아니면 겨우 스무 살짜리 한 명때문에 몰려온 네 뒤의 똘마니들? 너희들 양아치지?”
“아 고 새끼… 주둥이 찟기 전에 입 다물어라잉.”
아이고, 좀 아쉽다. 겨우 이런 놈들이라니.
이게 전부라면 굳이 유도 심문할 것도 없겠다. 시혁이 뜬금없이 몸을 날렸다. 전에 안기부의 블랙요원들이 새처럼 날았다는 그 몸 놀림이다.
조용한 숲속에 돼지 멱따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단체로.
겨우 커피 한잔 마실 시간 만에 서 있는 놈이 없다. 시혁을 안내했던 조수석의 덩치만 뒤에서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을 뿐.
“요즘 의학 쪽에 관심이 있어서 의서를 보고 있는데 말이야. 이 아킬레스건이 잘리면 평생 절름발이로 산다는데… 맞아?”
“아이고, 성님. 우리가 몰라뵈었구만이라. 한 번만 봐주쇼. 다시는 건들지 않을라요.”
“에이,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봐주는 것도 내가 결정해.”
꾸엑-
“한 명은 됐고…….”
“아니,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왜 우릴 팬당가? 그라고 대충할 것이제. 애매한 다리는 왜 작신 분지른다요?”
“너희는 사시미랑, 손도끼, 야구 방망이를 들고 통성명하러 나오니? 잠깐이면 끝나니까 참아.”
시혁의 눈에 전에 없던 살기가 감돌았다. 이놈들, 프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짜도 아니다. 지니고 있는 무기들이 그리 말하고 있다.
다시 숲속에 머리칼을 쭈삣하게 만드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잠시만, 잠시만 참으쇼잉. 내가 다 말씀드릴라니까.”
“아냐, 누가 시켰는지 관심도 없어. 너무 뻔해.”
한 명씩 공평하게 오른 다리를 비틀었다. 생 발목이 부러져 나뒹구는 여섯 명의 깡패.
시혁 자신도 놀랐다. 내면에 이런 잔인함이 잠들어 있었구나. 타인의 발목을 꺾어 부러뜨리는 행동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니… 한편으론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야! 담배 있지?”
후다닥 뛰어와 담배를 건네는 조수석의 덩치, 너무 떨려서 라이터를 제대로 켜지 못하자 시혁이 뺏어 불을 붙이곤 깊게 들이마셨다.
제기랄, 입맛이 쓰다. 회귀를 한 이후 처음 피우는 담배 맛이 왜 이렇지? 그것도 최근에 발매를 시작한 고급 88담배인데.
“너, 이 일을 시킨 놈에게 전해. 힘으로 하려면 1개 중대는 데리고 오라고… 그대신 또 만나면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다 외웠어?”
“…에? 예예, 알겠습니다요.”
조문호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조폭을 떼거리로 동원할 수 있을까?
이건 그놈 짓이다. 여기 깡패들을 아무리 두들겨도 그놈 이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몇 단계 거쳤겠지. 중간의 꼬리는 다 잘랐을 것이고.
55살이 되도록 그놈 곁에 있으면서 너무 많이 겪었던 일이다. 나도 그랬어…….
그런데 자룡아, 자룡아. 너는 어릴 때부터 이랬구나. 한 치도 변함 게 없네.
보채지 말고 좀 더 기다려. 이 새끼야.
너처럼 유치하게 할 생각 없어. 나는 돈으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씹어 먹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