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31화 (31/150)

31화 내가 만드는 세상

손창의, 일본명 마사요시 손. 시혁보다 11살 더 많은 나이다.

손창의는 일찍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로드맵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다.

- 20대, 이름을 날린다.

- 30대,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 40대, 사업에 승부를 건다.

- 50대, 연 1조 엔의 사업을 완성한다.

- 60대,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그는 소프트파워 사무실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과연 내가 세운 인생의 목표는 달성되고 있는 것인가?

올해 32살, 돌이켜 보면 20대에 이름을 날렸다고 자신하기 애매하다. UC버클리 유학 중 회사를 창업해 나름 성공한 건 사실이다.

사업의 포인트를 설정할 때, 소프트웨어 시장은 이미 거대 개발업체들이 장악을 한 상태라 판단하고 자신은 인프라, 즉 유통을 선택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컴백해 소프트파워를 설립하고, 컴퓨터 관련 전시회인 컴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 웨어가 대박을 치면서 나름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5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일선에서 물러나 몇 년을 보냈었다. 허무했다.

손창의의 분신과 같은 소프트파워는 그가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 완전히 쇠락하고 말았다. 겨우 병을 극복하고 복귀한 손창의에게 당장 절박한 것은 바닥난 자금이었다.

30억 엔만 있으면 허드슨 소프트의 독점 유통권을 따고 재기에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허드슨이 가진 기술의 우수성을 파악할 혜안이 손창의에게 있었다. 문제는 돈…….

열심히 여러 곳에 투자 제안을 했지만, 돌아오는 싸늘한 눈초리에 몸도 마음도 지쳐 가는 찰나.

손창의는 기막힌 소문을 들었다. 한국에서 온 한 부동산 회사가 말 같지 않은 대출방식으로 수십 채의 긴자 빌딩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

마침 미국에서 같이 유학을 했던 일본인 지점장이 다리를 놓아 미팅을 급히 잡았지만… 확신은 없었다. 한국의 K 글로벌은 투자회사가 아니라 부동산 업체였으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맨땅에 헤딩을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공사홍 부사장을 만났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허탈하게 돌아오다 받은 기적 같은 소식.

‘한국에서 보스가 관심을 보이신다. 일등석을 끊어 줄 테니 한국으로 가겠느냐?’

그렇게 무작정 아무 정보도 없이 향한 한국행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귀도 막히고 코도 막혔다. 눈도 멀 뻔했다.

통역인 줄 알았던 어린 학생, 당신이 보스?

그 정도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차도 없어 택시를 불렀단다. 산 넘어 산이라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K 글로벌 사무실은…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

그게 손창의와 시혁의 첫만남이었다.

하지만, 지금 손창의에게 시혁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존재로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정확히 만난 지 5분만에 김시혁은 말을 끊더니 30억 엔의 투자를 약속했다. 거기다 자신에게 70억 엔을 더 줄 테니 투자가로 방향을 선회하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치기? 장난기? 겨우 그런 감정으로 100억 엔(약 700억 원)을 던질 사람이 있을까?

언제 봤다고?

그때 마주친 김시혁의 눈…….

저건 맹수의 눈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섬뜩한 느낌.

이제 손창의는 시혁이 지시하는 일이라면 칠흑 같은 밤이 하얗다 해도 믿을 판이다. 미국에서 일으킨 블랙 먼데이의 기적을 지켜보았으니까.

겨우 몇 달만에 일본 부동산을 파죽지세로 쓸어 담아 400억 엔 이상의 돈으로 뻥튀기 한 사람이다. 겨우 7억 엔을 투자한 것을 생각하면 실로 눈부신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더니 2억 달러를 7억 달러로 불렸다. 딱 두 달 보름만에…….

지금까지는 누굴 만나든 자신을 천재라고 소개하곤 했었다.

천재? 내가? 그럼 김시혁은?

그를 생각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가 되는 기분이다. 시샘이 아니라 너무 엄청난 능력에 숙연해지는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울리는 전화… 채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손창의는 전화를 들었다. 오로지 김시혁을 위해 따로 설치한 직통전화였다.

[손 사장님, 지금 바쁘세요?]

“아닙니다. 대표님.”

[혹시 미국 갈 일 있으세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제가 또 미국에서 할 일이 있습니까? 최대한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고요. 요즘 미국에서 연일 성공하는 기업 하나와 실패하는 기업 하나가 눈에 들어와서요.]

“…어떤 기업에 관심을 가지신 겁니까?”

[성공한 기업은 미크로 소프트, 실패한 기업은 야호 닷컴… 아세요?]

“익히 들어본 이름들입니다만.”

[미크로 소프트의 운영체계가 결국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세가 될 것으로 봅니다. 특히 지금 새롭게 출시한 윈도어 95는 꽤 성능이 개선된 시스템 같아요.]

“예, 저도 세상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집약될 것으로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미크로 소프트는 엄청난 회사로 성장할 겁니다.”

[흠… 손 사장님도 그리 생각하신다니 잘됐네요. 일본 배포권을 독점하시면 어떨까요? 파이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워낙 핫하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기업입니다. 무작정 찾아가봐야 상대도 안 해 줄 겁니다.”

[하하하. 다행히 저에게 미크로 소프트 회장실로 갈 수 있는 직행티켓이 생겼습니다. 소개장을 보내 드릴 테니 일본 내 솔 에이전트(총대리점)권을 확보하는 설득은 손 사장님이 하세요. 그쪽 회장도 천재거든요.]

창피하게 또 그 천재 이야기다. 이젠 쉽사리 ‘내가 천재요’ 소리를 못 하겠다.

[그리고 실패한 기업 야호에는 투자를 적극 검토해 보세요. 여전히 적자투성이지만 지금이 적기로 보입니다.]

“야호의 어떤 점을 높게 보시는 겁니까? 언제 흑자로 전환될지 가늠하기 힘든 기업입니다.”

[손 사장님. 하나만 명심하세요.]

“…….”

[투자는 30% 미만일 때 해야 합니다. 80% 완성된 후에 들어가면 쭉정이밖에 못 먹어요. 여왕벌이 똬리를 트는 것만 확인되면 일벌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투자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그래야 꿀을 빨 수 있습니다.]

마치 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번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30%일 때 투자하고, 80%일 때는 수확해야 한다. 이걸 거꾸로 하는 투자는 먹을 게 없다.

너무 당연한 말, 너무 상식적인 지침이지만 이제껏 그러지 못했다.

손창의는 당장 미국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신기한 보스다. 언제 미국에 이런 인맥을 만들었는지… 소개장을 써 준 마이클 서더랜드는 전미 전기전자 협회장을 역임했던 IT거물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국제 표준화가 결정되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 아니던가?

‘무조건 믿자.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게 아니라 믿으면 전설이 만들어진다.’

* * *

잘 한번 요리해 보세요.

이정도 팁만 줘도 손 사장은 충분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올 사람이다.

미크로 소프트의 일본 총판권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고, 야호닷컴의 투자는 몇백 배 수익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다.

노태후의 요청으로 나갔던 통역 일은 시혁에게 각국의 거물들을 사귈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다. 손창의에게 보낸 소개장도 미국 IOC 위원으로 방한한 마이클 서더랜드에게 받은 것이다. 그는 IOC의 기술 고문을 맡고 있었다.

땡큐, 이런 기회라면 언제든지 맛있게 먹어 주지.

이번엔 미국 상황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지. 시혁은 다시 전화를 들었다.

“아저씨, 사무실 세팅은 끝났나요?”

[응, 나는 일체의 참견을 하지 않고 있다. 모든 건 메리웨더 대표에게 일임한 참이다.]

“잘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가만 둬도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지금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줄을 서고 있다면서요?”

[신기한 일이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밀어 넣으려는 회사들로 미어터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메리웨더 대표의 고집 때문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고집?”

[그래, 투자금을 받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호오! 돈을 받는데 조건을 까다롭게 건다?”

[첫째, 소액은 받지 않겠다. 최소 천만 달러 이상이라야 한다.]

“그건 블랙 먼데이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권리로 이해하면 되고요. 두 번째는 뭡니까?”

[수익이 나든, 손실이 나든, 3년 내에 투자금 회수 불가. 이게 두 번째다.]

“와우! 그건 좀 쎄다. 또 있습니까?”

[응. 손실이 나면 너네들 책임, 수익이 나면 25% 수수료 공제, 거기다 연 2%의 고정 비용 공제… 혀를 내두를 세 번째 조건이지.]

“하하하.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괴짜 맞네요. 투자자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런 극악의 조건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일 돈을 싸들고 오는 월가의 생리가 진짜 이해가 안 돼. 완전 별세계에 있는 기분이다.]

“아저씨, 그냥 두세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참! 펀드 이름은 정했답니까?”

[응, 메리웨더가 이름을 붙였다. LTCM(롱 텀 케피탈 매니지먼트)]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또 증명된 셈이다. 다만, 변수는 시혁 본인이다.

존 메리웨더는 LTCM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세웠던 인물이었다. 지금처럼 펀드 이름으로 사용한 게 아니라.

장장 10년 이상 월가라는 정글에서 최고 왕좌를 차지했던 사람. 채권 트레이딩을 통해 매년 27%에서 60%까지 수익을 창출한 헤지 펀드계의 몬스터.

마지막에 메리웨더가 굴렸던 총 금액은 2조 2,500억 달러에 달했었다. 세계 연간 교역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실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자금을 주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블랙 먼데이와 비슷한 러시아 모라토리엄 사태로 한 방에 훅 가는 펀치를 맞게 되고.

이 사태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지경에 빠지자 결국 FRB(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서 손실액을 긴급 지원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든 사내가… 존 메리웨더.

그런데.

지금 시혁이 개입하면서 존 메리웨더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 이런 식으로 세계 역사를 비틀어도 되는 것일까?

- 미래를 알고 있다는 치트키를 통해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 내가 마음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움직여도 괜찮은 것일까?

시혁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형님아,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합니까?”

“응, 태식아. 형님이 괴물이 되어도 너는 형을 끝까지 믿을 거지?”

“무슨 그런 말이 있어, 왜 괴물이 되는데?”

“형의 행동으로 인해서 역사가 바뀐다거나, 주변 사람의 운명이 뒤틀린다든가, 아니면 형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든가… 이래도 괜찮아?”

이자식, 피식 웃는다.

“시혁 형님, 형님은 공원 화장실에 버려졌지? 나는 네 살 때 교회 앞에서 오지도 않는 엄마를 밤새 기다렸다. 다 기억나거든…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더나?”

“…….”

“어떤 과학책에서 봤는데 있잖아. 우리가 가진 핵무기가 동시에 터지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알고 있지? 다 뻥이라더라. 모든 핵탄두가 터지면 인류는 멸망하지만 정작 지구 자체는 멀쩡하다더라.”

“……!”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세상을 다시 만들든, 재창조하든…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변함이 없다. 알겠나?”

시혁은 놀랐다. 묘하게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태식의 의식 속에 이런 깊은 철학이 숨어 있을 줄이야.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변함이 없다.’

“응, 태식아. 형님이 조금 어리석었나 보다. 그래. 형님 마음대로 한번 살아볼게. 무한 자본을 만들어서 진짜 빌런이 되어 보련다.”

“시혁 형님은 절대 나쁜 악당은 못 될 거야. 그래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찬성!”

태식과 대화를 통해 시혁은 머릿속의 잡념을 말끔히 털어내는 데 성공했다. 예기치 못했던 깨달음이었다.

고민하지 말자.

더 이상 나약한 55세의 김시혁, 땅에 생목숨이 묻히던 김시혁으로 살지 않겠다 다짐한 바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어야지.

누가 뭐라든… 내가 만든다.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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