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밀교와 목걸이, 그리고 거인과의 인연
1987년 겨울은 유난히 뜨거웠다. 날씨가 아니라 13대 대통령 선거가 목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항쟁으로 달아오른 민심이 6.29선언을 이끌어 냈고,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직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역사를 외면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다.
여당인 민공당은 노태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정권 재창출을 위해 뛰고 있는 반면, 야당의 적전분열… 예상하고 걱정했던 대로 삼김(三金)은 어느 누구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노태후와 김다중, 김양삼, 김종팔의 삼김은 출마를 선언하고 1노 3김의 제 팔 흔들기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양삼이 내건 슬로건은 ‘군정종식’이었다. 이건 이미 식상한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김다중이 내건 슬로건은 ‘민주주의 가치 회복’, 김종팔은 기억도 나지 않을 여러 슬로건을 번갈아 내세웠다.
그 와중에 노태후의 치명적이고 중독성 쩌는 슬로건이 나왔다.
“저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 주세요.”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습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청중들의 뇌리에 박히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이후로 수많은 대선이 치러졌지만 이만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숙이 각인된 말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캐치 프레이즈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 또 치명적인 사건이 터졌다.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가 선거를 2주 남겨 두고 폭발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보수층은 노태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12월 1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겨우 36.64%를 얻은 노태후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김다중과 김양삼의 득표를 합하면 55%가 넘었지만 승자독식을 하는 대한민국 선거제도에서 모두 죽은 표가 되고 말았다.
아쉽고 통탄스럽지만 이것도 국민의 선택이다. 되돌릴 수도 물릴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13대 대통령은 노태후로 정해졌다.
이때 신은 대한민국에게 기회를 줬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 이 과자 진짜 맛있다.”
“응. 잊지 않고 매달 보내오네.”
“그 사람이 은근 속정은 있는 거 같아요. 정치인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놈아, 그래도 너에게 기회를 준 사람이다.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는 법이여.”
“아이고, 활불 나셨네. 요즘 아침 예불도 녹음기 틀어 놓고 탱자탱자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가차 없이 등짝 스매싱. 이 노인네 힘도 좋다. 그래서 좋다. 한번씩 맞아 봐야 아버지 건강을 확실히 체크할 수 있다.
“아버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돈 없다.”
“아… 지겨워. 그 레퍼토리 좀 봐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아버지 돈을 뜯어 가는 나쁜 아들로 보일 거 아냐?”
“그래도 한 푼도 없다.”
“에이… 씨. 재미없다니까. 밑에 애들 식당이랑 숙소는 진짜 멋지게 지었네. 그런데 아버지 방은 왜 이따위로 변함이 없어?”
“그냥, 익숙한 게 좋아, 아버지는.”
“하다못해 침대라도 하나 사면 안 될까?”
“빌어먹을 놈, 불자가 등이 푹신하면 부처를 버린 거나 똑같은 거지. 세속을 등진 이유가 뭬야? 언제든 바랑 하나 매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게 정상인겨.”
그래, 그래서 아버지. 20년을 한결같이 사랑으로 키워 주신 스님답다. 쓰라고 드린 7억 원이면 지금 시세로 정말 큰돈이다. 불광 자비사를 통째로 팔아도 천만 원 받기 힘들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서 단 한 푼도 쓰려고 하지 않는 저 고집. 덕분에 앞으로 퇴소하는 동생들은 제법 묵직한 통장을 하나씩 들고 나갈 수 있겠지.
“이 옥 목걸이 어떻게 얻은 건지 자세히 말해 줘요.”
“그거… 보자. 벌써 몇십 년 된 일이구나. 그때 중공에서 세계 불자 대회를 열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어. 공산당이 종교를 탄압한다는 세계의 시선을 희석시키려고 기획한 일이었지.”
“그런데요?”
“한국에서 이 땡초들이 겁을 내고 아무도 가지 않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등 떠밀려 가게 된 거다. 먼저 일본으로 갔다가 거기서 일본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이건 항저우 뇌봉탑에서 주웠다며?”
“응, 막상 가보니까 할 일도 없고, 공경해 마지않는 고승 혜초의 발자취를 따라 무작정 항저우로 간 거지.”
“혜초?”
처음 듣는 소리.
실로 한민족 최초의 코스모폴리탄(세계인)으로 불리는 신라 고승 혜초. 그는 당나라 시대 때 중국 광동성에서 시작해 40여 개국을 여행한 고승이자 자유인이었다.
그가 돌아와 집필한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최고라 인정받는 여행기 아는가? 그분이 여기서 왜 나와?
“불교계에서는 배척을 하고 있지만 신라 고승 혜초는 밀교(密敎)를 받아들인 분이다. 왕오천축국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혜초가 항저우의 뇌봉탑에서 동안거(冬安居)를 했다는 말이 있어서 한번 보고 싶었지.”
“오오… 흥미진진.”
“그런데 썩을, 아버지가 도착해 보니 뇌봉탑은 다 무너져서 흙벽돌만 뒹굴고 아무것도 없는 거여. 참 세월 무상이다 하고 탑의 잔해를 따라 천천히 걷는데.”
“아, 왜 거기서 이야기를 끊어?”
“믿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눈앞에서 벼락이 떨어졌단다. 아버지 평생 처음 겪는 무서운 광경이었어. 번쩍하더니 섬광과 함께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뇌봉탑 상부가 와르르 무너지더구나.”
“안 다쳤어요?”
“응, 그냥 놀라서 뒤로 자빠졌지. 그 다음에 슬며시 탑을 기어올라 상부로 가 봤더니 시커멓게 그을은 흙벽돌 사이에 뭔가 빤짝거리더구나.”
“……! 그게 이 목걸이?”
“그래, 별 볼 일 없는 작은 옥 조각이지만 기념으로 주워 온 거여. 그게 너한테 건너간 것이고.”
그랬구나… 이 목걸이는 그렇게 인연을 찾아 스님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었어.
“아버지, 밀교는 뭔데? 혹시 아버지도 그 비밀스런 밀교의 후계자야?”
“이름 때문에 비밀스럽게 느껴지겠지만, 부처님이 깨우친 진리를 전하는 대승불교의 한 교파가 밀교여.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었듯이 삼국시대에는 모든 백성이 밀교를 믿었었다.”
“그래요?”
“응, 밀교는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라는 즉신성불(即身成佛) 교리를 가지고 있지.”
“현재 불교 교리랑 비슷한데?”
“당연하지, 이놈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던 결국 해탈해서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을 추구하니까… 듣기로는 아주 오래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중국에 들어올 때, 심장에서 형성된 두 개의 옥불이 뇌봉탑에 모셔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
“천년 고찰 불국사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도 밀교의 경전이여. 이놈아. 이름처럼 비밀스런 음지 조직이 아니란 말이다.”
들을수록 기분이 묘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혹시 이 목걸이가 부처님 진신사리 아닐까? 두 개의 옥불 말이야.”
“헐헐헐, 그랬으면 좋겠구나. 두 개의 옥불이 같이 만나면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우리 같은 밀승들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기도 한단다.”
‘맞을까? 맞을 거다… 분명히 맞다.’
그렇지 않으면 시혁 자신의 회귀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자신이 그 증거 아닌가?
뭘 원하는 것일까? 나를 통해 어떤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왜 다른 하나의 목걸이는 마운에게 이어진 것일까?
* * *
시혁은 차분하게 다가올 1988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기반을 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방문한 현도건설. 계동의 현도그룹 사옥에서 시혁은 난감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우리 회사는 작은 건물은 짓지 않습니다. 다른 회사를 알아보심이 어떠실지요?”
그럴 만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의 학생이 건물 신축을 의뢰하기 위해 왔다고 하니… 로비의 인포 여직원에게 막히고 말았다.
“저, 제가 조금 크게 지을 거니까 담당자를 연결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학생,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회장님 오실 시간인데 이러면 누나가 난처해. 알았죠?”
빡친다. 그렇다고 큰소리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다. 시혁에게는 생소한 분야가 건축이고 기억에 현 시점에서 그래도 가장 선두기업이 현도건설이었다.
그때 로비가 소란스럽게 사람들로 붐비더니 도열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는 노인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포석의 여직원도 바짝 긴장한 탓인지 시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왕회장의 등장이다. 대한민국 경제사의 한 획을 그은 정조영 현도그룹 회장을 필두로 이명보 사장과 임원진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때 정조영 회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가만가만… 저기 안내 데스크에 있는 저 학생, 낮이 익다.”
“취업 때문에 방문했을 겁니다. 인사부에서 알아서 알려 줄 겁니다. 올라 가시죠.”
“이거 봐! 이 사장, 벌써 눈이 침침해? 저 친구가 누군지 기억 안 나?”
정조영 회장의 느닷없는 호통에 수행하던 현도건설 사장 이명보는 가뜩이나 작은 쥐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지만, 저런 학생까지 알 턱이 없었다.
그사이 정조영 회장은 성큼성큼 인포 데스크로 걸음을 옮겼다. 우르르 일행이 따라왔다.
“이거 봐, 너 나 알지?”
“아… 예. 정조영 회장님 아니십니까?”
“맞네 맞아.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네, 제가 건물을 하나 올리려고 하는데 담당자를 만날 수 없어서 사정하는 중입니다.”
“뭐? 건설사가 고객을 가려 받아? 우리 현도건설이 언제부터 그리 고압적인 회사가 되었나? 이 사장 이거이 무슨 소리야?”
오늘이 이명보 사장의 수난일인가… 여러 번 깨진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수주액을 감안해서 하청업체로 내려보내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옛날 일은 다 잊었다 이거네? 당신들 월급을 회사가 주는 줄 아나? 이런 작은 고객이 주는 건설비로 월급 받는 거이야. 안 그래?”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아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즉시 조치토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이거 봐, 이름이 거 뭐이더라? 김…….”
“예, 회장님. 김시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제 기억난다. 얼마 전 각국 올림픽 위원들이 탐을 내던 그 천재… 올라가지. 내 방에서 차 한잔하자고.”
엉뚱한 상황에 모두 당황했지만, 필연이었다. 시혁과 정조영 회장의 만남은.
88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정조영 현도그룹 회장이었으니… 그가 아니었다면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은 올림픽을 유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정조영 회장과 이명보 사장이 타고 시혁과 몇 명의 임원이 더 탑승했다. 회장실은 15층이었다.
“그래, 내가 세상 살면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고, 또 데리고 함께 일을 하지만 말이야. 자네처럼 총명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이것 봐, 자네는 오늘 고객이야. 내가 을이라고. 너무 그리 겸손하지 않아도 돼. 건물을 지을 바닥 면적이 얼마나 되길래 우리 회사를 찾아왔나?”
“예, 전체 토지는 2만 평입니다. 전체 토지에 다 건물을 올리지는 않겠지만요.”
“……!”
순간 엘리베이터 안은 침묵 속에 잠겨 버렸다. 시혁의 대답이 너무 충격적인 까닭이다. 2만 평?
“호오! 이거 단순한 천재가 아니었네. 그야말로 왕건이 손님 아닌가? 토지는 어디에 있나? 어느 지방이냐에 따라 건설비가 달라지거든.”
“서울인데요.”
“……!”
이 노인네, 오늘 몇 번 놀라는지 모르겠다.
“……서울, 어딘가?”
“삼성동요.”
“우하하하, 알겠다. 알았어. 요즘 누가 강남에서 엄청난 땅을 사들였다고 소문이 돌더니만… 자네였구먼. 어느 집 자제인고?”
“저… 죄송하지만 고아입니다. 보육원 스님 아버지가 계시긴 합니다만.”
“…….”
현재의 거물과 미래의 거물이 희한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시혁은 거물이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 밝힐 수 없을 뿐이다.
“이것 봐, 이 사장. 자네 안내 아가씨랑 총무부장, 당장 현장으로 발령 내라. 그런 눈깔로 무슨…….”
이명보의 쥐 눈깔이 방향을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