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거인 대 거인
“커피? 괜찮나?”
“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고맙네. 우리 현도건설을 찾아와 줘서.”
“예, 제가 아는 건설사가 별로 없어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설계팀이랑 건축부서 사람들하고 나누고… 지을 돈은 있나?”
“대충 얼마가 들지 모르겠습니다만,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외상이 아니다… 이 말이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객일세. 우하하하.”
들은 대로 호탕하다.
얼마 전 올림픽 리셉션장에서 스치듯 인사했지만 정조영 회장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네, 노태후 대통령 당선자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사적으로 조금 알기는 합니다만…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흠, 노태후 당선자와 무관하다?”
“예,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압니다. 제 자금 출처는 백 퍼센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구린 돈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아냐 아냐.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잘 보여야 할지 생각하는 것일세. 이 나라에서 대통령과 사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권력이니까 말이야.”
“회장님, 아까 저를 고객으로, 회장님은 을이라고 하셨는데… 왜 지금은 권력을 거론하십니까? 별개의 건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오오오, 한성깔 하네?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좋아.”
귀엽나? 아니면 간을 보나? 꼭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듯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정조영 회장. 그에 반해 배석한 이명보 사장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 미래에도 당신에 대한 인상은 별로 좋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당신을 치우고 싶지만… 역사를 그렇게까지 비틀고 싶지 않아서 나도 참고 있어요. 이명보 사장!
“나중에 자네에 대한 파일을 일부러 찾아봤어.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만.”
“나쯤 되면 여기저기서 뒷문을 열어 주는 족속들이 있기 마련이거든. 하하하.”
“…….”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그전에 역사상 최초의 만점자, 거기다 대통령 당선자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이 정도면 나하고 마주할 자격이 넘치지. 안 그래? 시혁 군.”
“제가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방에 올 자격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오오, 아냐. 아까 말했지만 나는 상인일세. 돈이 된다면 천리길도 가야 하는 처지, 건축주를 홀대하는 건설사, 미래가 없지.”
그제서야 이명보의 눈길이 바뀌었다. 자신도 들은 기억이 새록새록 난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라 놀란 모양이다.
- 꿈 깨세요. 이명보 씨. 당신과는 잠시라도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역겹습니다.
시혁의 못마땅한 표정을 힐끔 본 정조영 회장.
“이것 봐, 고객님이 불편한 모양인데 자넨 가서 일 보시게. 이라크 공사나 차질 없도록 잘 체크하고.”
“아, 예… 알겠습니다. 김시혁 군. 다음에 시간 나면 밥이나 한 끼 하세.”
미련이 남는지 미적미적 일어나는 이명보 사장이 나가고 정조영 회장은 눈빛이 확 바뀌었다.
“어때? 자네가 보기에…….”
“예?”
“이 나이쯤 되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이 보이는 법이야. 자네가 아까 이 사장을 보는 눈길… 시꺼먼 먹물 같았단 말이야.”
“……!”
“능력도 빼어나고, 욕심도 많고,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내 눈에도 색깔이 썩 밝지 않아서 고민 중인데 자네가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니까 희한한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일세.”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관상 같은 거 볼 줄 모릅니다.”
“그럴까?”
“예, 저는 남보다 조금 공부 머리가 앞서서 운좋게 시험을 잘 본 학생에 불과합니다.”
“노태후를 통해서 박세진 위원장을 구워삶아 따낸 사업권, 그거 다 망한다고 했다며? 내가 봐도 그랬거든. 그런데 신기하게 큰돈을 벌었지? 다음으로 자네 돈 송금된 곳이 일본이었어. 이상했지. 그래서 조금 더 알아봤더니… 이거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
이 영감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정식으로 대면을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거늘… 시혁은 오장육부를 다 드러낸 느낌에 섬찟했다.
“거기까지 알면서 건축비는 있냐고 물어보신 이유가 뭡니까?”
“부동산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생물이면서 요물이지. 그걸 오를지 내릴지 미리 알 수 있다? 딱 둘 중 하나야.”
“…….”
“사전에 개발 정보를 알고 있던가, 아니면 감… 신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촉이 뛰어난 사람만이 미친 듯 오르는 부동산을 선점할 수 있는 거거든.”
“그래서요?”
“뭐는 뭐야? 자네 연치가 일본의 부동산 2차 버블 정보를 미리 알 리는 없을 테고, 결국 신기가 있다는 말밖에 더 되나? 그런 자네가 이명보 사장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아주 극혐하는 눈길로 본다?”
“…….”
“자를까?”
허어… 이 영감님.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렇다고 거기에 휘말릴 이유는 없다.
“거기까지 제가 개입할 까닭이 없고요. 지금 알고 계신 내용들 당분간 좀 비밀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쿠하하하하. 공짜로?”
“건축주잖습니까? 업무상 취득한 갑의 비밀을 지켜 주는 것이야말로 상도의상 당연한 것입니다. 회장님.”
“약해, 차변 대변 균형이 안 맞아.”
질기다. 아예 뽕을 뽑으려고 덤빈다.
“건설비를 최소한의 이익, 관리비만 남기는 선으로 해 주면 저도 보따릴 더 풀어 볼 의향이 있습니다.”
“콜! 해 보게.”
망설이지 않고 직진이다. 자기 나름대로도 이명보 사장에 대해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망설일 이유가 없지.
“어차피 몇 년 내로 나갈 사람 같습니다. 아마 사업보다는 다른 쪽, 예컨대 정치 같은 것을 할 사람으로 보입니다. 굳이 회장님이 나서서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정치를 하면 어떨 것 같나?”
여기서 시혁은 시험에 들었다. 사실대로 말을 해서 정조영 회장을 그냥 경제에 몰빵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대충 얘기하고 원 역사대로 정치판의 쓴맛을 보도록 할 것인지…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정 회장은 시혁을 거의 신기 충만한 점쟁이 비슷하게 보는 판이다.
“어디까지 알고 싶습니까? 회장님의 의지 여하에 따라 제 대답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하지 말란 얘기구먼.”
“…….”
“건물은 시원하게 지어 주지. 원가에 말이야. 다만, 자네도 내가 정치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사실… 비밀에 부쳐 주게.”
“예. 그러겠습니다.”
“너무 많이 시달렸어. 박장희 정권, 전도환 정권, 그리고 자네가 관계 있는 차기 정권도 마찬가지 겠지만… 이 나라에서 기업을 하려면 정권과 결탁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손 벌리면 무조건 갖다 줘야 했거든.”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훗! 자네를 믿어. 어디 가서 말한다고 믿어 줄 사람도 없겠지만… 하여튼 정치는 하지 말라?”
“예, 절대로요.”
커피 잔을 들었지만 입에 대지는 않는다. 생각이 많은 것이다.
- 제발, 그놈의 정치판에 발을 들이지 마시길… 당신 같은 존경받는 기업가의 노후가 형편없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소고기 사 줄까?”
“더 드릴 말씀도 없는데요? 저는 설계팀과 만나야 합니다.”
“설계팀은 나중에 자네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면 되지. 남자는 밥심으로 일하는 거야. 일어나. 가자.”
더 거절할 수 없었다. 밥 한 끼 먹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소고기를 사 주겠다니…….
그런데, 이 망할 영감탱이.
* * *
“맛있지? 많이 먹어. 이 집이 건더기를 진짜 많이 주거든.”
“이것도 소고기에 속합니까?”
“그러엄, 소머리 국밥을 소고기로 끓이지 돼지로 삶나? 많이 들어.”
“그러면 저기 편육이라도 한 접시 시키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국밥도 다 못 먹는 판에 왜 비싼 편육을 또 시키나? 그건 쓸데없는 낭빌세.”
소고기는 맞는데… 웬지 사기를 당한 기분으로 시혁은 국밥을 욱여넣었다.
“지금 오일 달러 버느라 정신이 없으시죠?”
“응, 거기가 노다지밭이야. 사실 국내 공사보다 중동에서 버는 돈이 현대건설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냐.”
“대충 일이 년은 괜찮겠습니다.”
“……!”
“대충 내후년부터는 조금씩 줄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이라크쪽요.”
“뭐가 보이나?”
“편육 시켜도 되죠? 내장 모둠하고요.”
* * *
[시혁아, 이건 네가 결정해야 할 것 같다.]
간만에 들리는 공사홍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었다.
“메리웨더가 잘하고 있지 않나요?”
[너무 의욕이 넘쳐서 탈이지.]
“아저씨, 작은 실수 정도는 모른 척 넘어가세요. 그 사람은 일반적인 잣대로 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
냉정한 판단력과 세심한 업무처리, 그리고 시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공사홍이 당연 발군이다. 그런 공사홍이 이상하다면 심각한 사인인 것이다.
“어떤 일입니까?”
[어떤 교수를 영입하겠다고 하는구나. 그것도 공동대표로 말이다.]
브라보!
이 새끼 제대로 가고 있구나.
시혁은 공사홍의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삼촌!”
[…….]
말이 없다. 그동안 삼촌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밥을 다 먹으면 수저를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수저를 쥐고 있던 손목을 자를 수는 없잖습니까?”
[아직 이해를 못 했다.]
하지만 공사홍은 지금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것이다. 삼촌이라니… 내 사랑하는 아이가.
“삼촌, 그냥 두세요. 맘껏 저지르도록. 어차피 K 글로벌 USA의 주식은 백 퍼센트 제 것입니다.”
[그러나 손실이 발생하면 그 책임도 백 퍼센트 네가 지게 된다.]
“손실 절대 안 생깁니다. 믿으세요. 지금은…….”
[그 교수가 누군지 아는 것 같구나. 너는 짐작을 했어. 그렇지?]
“예, 삼촌. 보나마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숄즈 교수일 겁니다. 맞죠?”
[……맞다. 블랙 숄즈 옵션 모델을 만든 유명한 사람이다.]
“메리웨더가 제대로 가는 겁니다. 공동대표 아니라 수석대표라도 시킬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위험하다. 나도 회계학을 공부한 사람이다만, 한순간에 나락으로 처박힐 수도 있는 몽상가적 발상이야.]
미안합니다. 삼촌. 이게 삼촌의 한계입니다. 인간적으로야 세상에서 스님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나… 저처럼 미래를 알지 못하는 한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한계.
“삼촌, 메리웨더와 숄즈 교수는 다 숟가락입니다. 언젠가 밥을 다 먹으면 놔야 합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 줄 거예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다. 일체 간섭하지 않으마.]
그래, 무럭무럭 성장해라.
당신이 진정한 내 오른팔이 될지, 아니면 숟가락으로 버림을 받을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선을 넘으면 언제든 수저를 놓아 버릴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그중에 왼발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미크로 소프트를 설득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일본 독점 판권은 따게 되어 있다.
또 야호닷컴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고 절대 지분을 가져올 것이다. 손창의 사장의 동물적 본능이 그 맛있는 먹잇감을 놓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이를 시작으로 손창의 사장은 본격적인 투자자 각성을 할 것이고, 그의 회사 소프트파워는 지붕을 뚫고 구름 위까지 직행할 것이다.
물론 지분 51%는 내 것이다. 손창의의 각성과 소프트파워의 투자 성공은 내 금고를 더 빵빵하게 채워준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문제는 아직 각성을 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한 오른발… 중국의 마운이다. 그에게는 단련의 단계가 아직 남아 있었다.
후진타오 위원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으니 위기는 벗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시혁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실히 인지했을 테고.
기다리자. 김치가 푹 익어서 숙성될 그날까지.
당장 시혁이 해야 할 일들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 사회가 가장 높게 쳐주는 시험이 목전이다.
이것까지는 해 주마. 그래야 삼송의 목을 물어뜯을 때, 삼송을 집어삼킬 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그 훈장을 따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