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34화 (34/150)

34화 오 대 오, 됐냐?

1988년은 대한민국에게 어떤 의미일까?

미래 100년사에 다시 없을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 부정할 수 없다. 정치 따위 던져 버리고 냉정히 평가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작은 나라.

아시아의 4룡 중 하나로 불렸지만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도 밀려 꼴찌였던 나라.

그랬던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비상의 날갯짓을 선포한 해였다. 올림픽으로 인해서.

비로소 세계 만방은 사우스 코리아를 알게 되었고, 그 나라가 불과 30여 년전 처참한 전쟁의 폐해을 딛고 일어서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서히 올림픽 열기가 대한민국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형님, 이거 아직도 해야 해?”

“그럼, 하지 마?”

“돈도 무지 많으면서…….”

“태식아,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알지?”

“…….”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이 틀어진다는 것을 평생 명심하고 살아라. 미국에 가서도 마찬가지.”

“아니, 막판에 이렇게 몰리니까 그렇지. 며칠째 잠 한숨 못 잤다니깐.”

이건 아니다. 우물 천정만 바라보던 개구리가 어쩌다 두레박을 타고 세상에 나오니까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온 격이다.

“태식아, 돈이 뭔지 아니?”

“뭐든지 살 수 있는 만능열쇠지.”

“돈에도 인격이 있다는 말 들어 봤지?”

“…….”

“돈은 금액을 쓴 종이에 불과한 거다.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문제는 그 돈을 가진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지.”

“몰라. 그런 거.”

“더 들어. 같은 시냇물도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마시면 젖을 만들어. 돈도 마찬가지다. 그걸 가진 사람의 인격이 돈에 투영되는 거다.”

“…….”

“형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거야. 종내에는 무한 자본을 가질지도 몰라. 그런 형이 독을 만들어야겠니? 아니면 젖을 생산해야겠니?”

“알겠다. 형님아. 내가 잘못했다.”

“1원을 아끼지 못하는 사람은 백억을 모을 수 없다. 돈이 얼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평생 돈을 쫓다가 끝난다. 돈이 알아서 따라오도록 생각을 바꿔라. 알겠어?”

“다는 모르겠지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은 이해했다. 형님아.”

일단 이정도만 알아들어도 성공이다. 이제 19살인 태식과 55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시혁이 같을 수는 없다.

돈… 참 어려운 화두다.

“형님, 또 성남시가 말썽이다.”

“얼마나 주문을 했길래?”

“삼만 장, 예산이 없다고 외상을 달라는데?”

“전에 오천 장도 아직 결제 안 됐잖아? 국고 수표도 없대?”

“그런 모양이더라. 막상 올림픽 다가오면 더 필요할 텐데… 나 같은 꼬맹이한테 과장님, 국장님까지 사정한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더라.”

초창기에 거의 모든 비축 물량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시, 군들은 재차 하달된 내무부 공문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시장, 군수의 심장이 또 내려앉았다.

내무부의 암행 감찰단이 전국을 돌며 올림픽과 호돌이 깃발의 관리 상태를 살핀 후 보고서를 올렸고, 결국 꼴등을 시장 목이 날아갔다. 이를 일벌백계로 명시한 공문은 또 한번 전국 시, 군 트럭 행렬이 시혁에게 몰리도록 만든 것이다. 이번에는 연신내의 비닐하우스가 아닌 삼성동 가건물로.

성남이라…….

경기도 중에서 가장 낙후한 동네에 속하는 곳이다. 지금은.

시혁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손금 보듯이 다 아니까.

시혁이 더듬어 본 기억 창고에 의하면… 내년이다. 신도시 발표.

몇 달 만에 강남은 전역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강남역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퍼진 개발붐이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쳐다보지도 않던 삼성동까지 매물이 씨가 마르고 가격은 천정을 뚫고 폭등하는 중이다.

시혁이 지금 있는 곳은 현도건설 건축팀이 임시로 지어 준 가설 막사다. 입구에 ‘부동산 업자 출입금지’ 간판이 빨간 글씨로 붙어 있다. 그래도 꾸역꾸역 찿아와 명함을 내미는 사람들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 폭발하는 개발 수요가 강남을 벗어나 향하는 곳.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신조어를 만드는 성남시 분당구 아니던가?

* * *

“안녕하세요. K 글로벌 코리아 김시혁입니다.”

[아이고, 김 사장. 이번 한 번만 더 봐주구려. 올해 하반기 예산이 내려오면 꼭 갚으리다.]

“국장님, 시장님하고 잠깐 면담 시간 좀 잡아 주시겠어요?”

[오시려고? 언제든 좋습니다. 우리 시장님 이제 곧 여의도로 가실 분인데, 여기서 목이 댕강하면 다 끝장납니다.]

급하게 마련된 성남 시장과의 면담 자리에는 고위 공무원으로 가득했다. 겨우 깃발을 얻으려고.

“이거 미안합니다. 시 재정이 씨가 말랐어요. 저번에 입고된 오천 장도 아직 결제를 못 했는데 또 외상 주문을 하자니, 면목이 없습니다.”

“네, 시장님. 나랏일 보는 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예, 김 사장. 과연 한국대 법대생답습니다. 이왕이면 오만 장 정도 있어야 올림픽 끝날 때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허허허, 염치가 없네요.”

삼만 장만 달라더니 막상 만나자 오만 장을 달라?

“흠, 오만 장이면 2억 2,500만 원에, 전의 오천 장 미수금까지 더하면 거의 2억 5,000만 원… 제가 안고 가기에 쉽지 않은 돈입니다.”

“어찌하겠소? 내무부에서 하도 닦달을 하니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성남시 재정이 워낙 빠듯합니다. 부탁하오. 김 사장.”

“…저, 이렇게 하시면 어떻습니까? 성남시가 가지고 있는 국유 녹지, 그러니까 그린벨트 땅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다 개발제한 구역에 묶여 있는 쓸데없는 땅들은 부지기수죠.”

“깃발 오만 장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그린벨트 땅을 저에게 불하해 주셨으면 합니다.”

“엉? 솔직히 개도 안 물어 갈 쓸데없는 땅이오만?”

당신에게는 그렇겠지요. 아직 개발계획이 잡히지도 않았을 테고.

“대충 알아보니 성남시의 중심가 대지가 평당 오만 원 정도고, 외곽지역 개발이 가능한 임야는 오천 원 정도군요.”

“맞습니다. 그것도 작게 분할한 것들이 그렇지요.”

“그린벨트는 얼마면 불하가 가능하겠습니까?”

“…김 사장께 드린다면 삼천 원… 정도?”

“아깐 개도 안 물어 갈 땅이라면서요?”

“…….”

어디 약을 팔고 있어.

“서현동과 정자동에 상당히 큰 덩치의 그린벨트가 있습니다. 각기 오만 평씩 저에게 주시고, 그보다 더 떨어진 판교 쪽 땅을 십만 평 정도 주시면 어떨까요?”

시장은 배석한 도시개발 국장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시세가 어떻게 되느냐는 뜻이다.

“예, 시장님. 솔직히 시세를 정하기 힘듭니다.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그린벨트가 통상 천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유지는 덩치가 커서 불하를 한다고 해도 살 사람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국장, 그렇게 말하면… 어쩌란 말이오?”

“문제는 건설교통부 승인도 쉽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큰 국유지를 일반에 불하하는 것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결론은 개도 안 물어 갈 땅이 맞기는 한데, 상급 중앙부서 허가를 받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돌려서 반대하는 거다. 자기 목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데 귀찮은 업무를 떠맡는 게 싫은 거지.

전형적인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다.

“그럼 시장님하고 국장님들이 공동으로 차용증을 써 주면 외상으로 드리죠.”

“…….”

“…….”

바로 조개처럼 입을 닫는 국장들.

예산을 쓰는 것과 자기가 보증을 서는 것은 다른 차원이거든. 어차피 나랏돈을 받아 결제하겠지만, 자기가 빚쟁이로 전락하는 것은 정말 찝찝하니까.

“그렇게 합시다. 건교부 장관이 나하고 한솥밥 먹던 군대 동기요. 내가 책임지고 설득할 테니 거기 어디? 서현동하고 또 정자동… 또 어디라고 했죠?”

“판교요.”

“그래, 판교까지 얹어서 김 사장에게 불하하는 것으로 합시다. 당장 내 목이 간당간당하는 판에… 김 국장! 당신 차용증 쓸 자신 있어? 엉?”

브라보! 천당 아래 분당의 노른자위가 될 서현동과 정자동 각 오만 평, 그리고 강남 뺨따귀를 때리게 될 판교 십만 평을 손에 넣었다. 돈으로 환산하지도 못할 금싸라기를 거저 주웠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이라더니. 당신들은 일 년만 지나면 배가 아파서 위장약을 한 주먹씩 먹어야 할 거야.

아! 배가 빵빵해 터질 것 같다. 고마워.

시혁은 전국의 시, 군, 구에 일제히 연락을 돌렸다. 성남 케이스처럼 예산 때문에 깃발 구매를 망설이면 그냥 쓸모없는 땅으로 받겠다. 다만, 위치는 내가 정한다.

처음이 힘들지 한번 길을 내면, 그 다음부터 쉬운 법이다. 성남시도 해 줬는데, 다른 시라고 안 될 턱이 없다.

* * *

성남에서 돌아온 시혁은 가건물 앞에 서 있는 현도 스텔라 번호판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촌스럽게 1111이 뭡니까?

또 왔네. 좀 대충하시지.

졸지에 신기 충만한 점쟁이가 되어 버린 시혁.

“어, 이제 오냐? 성남에 갔었다고?”

“오늘은 뭐 싸오셨어요?”

“이거, 순대하고 떡볶이… 간하고 염통 위주로 많이 달라고 했다.”

“이건 돼진데요?”

“이놈아, 소고기는 특별한 날에 먹는 거야.”

마치 손자와 할아버지가 정겨운 대화를 하는 듯 자연스럽다.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던 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1위 재벌은 삼송이 아니라 현도그룹이다. 그만큼 중동에서 벌어오는 오일머니가 큰 탓이다.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현도건설에서 충당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큰 회사의 명예 회장님이 뻑하면 까만 비닐봉지에 먹을 것을 싸와서 들이밀고, 시혁 형님은 불퉁거리는 풍경이 태식이 볼 때 마냥 신기한 것이다.

“그래, 곧 사법고시 1차 시험인데, 준비는 잘되고 있냐?”

“대충요. 작년에는 입학하기 전에 시험이 있어서 못 본 것뿐이에요.”

“오오오! 저 패기. 당연히 합격은 따 논 당상이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시험은 쳐 봐야 알죠?”

“자식이… 너는 다 알고 있잖냐?”

“제가 무슨 박수무당입니까? 그걸 미리 알게.”

“너, 박수무당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놈 맞아.”

“에이… 씨. 안 먹어요.”

“이놈아. 이거 사려고 줄 서서 기다렸어. 주인 할머니가 삼십 년간 이거 하나만 하는 맛집에서 산 거다. 삐치지 말고 어여 먹어.”

“맛있긴 하네요. 그런데 달랑 일인분을 어느 코에 붙이려고… 많이 가져오시지.”

“주전부리로 배 채우는 버릇하면, 큰돈을 못 보고 지나친다. 딱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맛보면 되는 게야. 그래야 진짜 밥상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지 않겠니?”

“……!”

간간이 툭툭 던지는 말에 깊은 철학이 묻어 있다. 과연 왕 회장님.

“너, 여기 이만 평 중에 절반만 떼서 나한테 넘기면 안 되겠니?”

“뭐 하시게요?”

“놀랐다. 솔직히. 이 짧은 기간에 삼성동에 송곳 하나 박을 땅이 없어질 줄이야. 어느 신을 모시는지 몰라도 네가 나긴 난놈이다.”

“박수무당 아니라니깐요.”

“하여튼 여기 백화점을 하나 올리면 사람들이 바글거릴 것 같다. 좀 팔아라.”

“싫은데요. 동업이라면 몰라도.”

“허어… 이놈 봐라. 천하의 현도그룹하고 동업을 하자고?”

“싫으면 마시고요. 저는 굳이 지금 시세에 팔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십 프로.”

“육십 퍼센트.”

“이십 프로.”

“육십 퍼센트.”

“이 도적놈아. 너는 꼴랑 땅밖에 없지만 백화점이 한두 푼 들어가는 공사인 줄 아는 게냐?”

“그 땅 없으면 백화점은 어차피 못 올립니다.”

“……삼십 프로.”

“육십 퍼센트요.”

기가 차는 모양이다. 한 치도 양보를 안 한다. 정조영 회장은 시혁이 너무너무 탐이 났다. 이놈만 얻으면 현도그룹의 미래는 한시름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삼송처럼 권한을 회사별로 나누는 관리가 되지 않는 현도. 오로지 모든 결정을 정 회장이 하는 제왕적 구조는 결국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굳어져 버렸다. 모두 자기만 쳐다본다.

지금은 아직 버틸만 하다. 그러나 사람이 평생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언젠가 자신이 죽고 나면 현도그룹이 어찌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시혁 같은, 미래를 내다보는 놈이 중심을 잡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내가 졌다. 오 대 오… 공평하게, 됐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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